"숙이야! 하이고 숙이야!! 어디갔노 숙아!!!"
저 멀리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후드득 머리를 때리는 빗줄기를 뚫고 아주 선명히 어린 경찬의 귀를 파고들었다. 경찬은 무심코 고개를 돌려 산 밑을 바라보았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 저마다의 짐을 이고 진채로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들의 뒤를 따라 긴 행렬을 만들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불빛이 점멸하는 마을은 마치 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그들을 도망치게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경찬은 점점 다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진창이 되어버린 흙바닥이, 여기저기 힘줄마냥 불쑥 튀어나온 나무줄기들이 경찬의 다리를 옭아매고 있었다. 경찬은 눈을 굴려 소리를 지른 사람을 찾았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그 소리는 빗줄기와 섞여 근원지를 찾을 수 없게 하고 있었다.
"똑바로 따라오너라! 늦으면 못 들어간단다"
어머니의 호통에 경찬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어머니는 초조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어디로 가는 걸까.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경찬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겼다. 맞잡은 손에 느껴지는 어머니의 떨림은 경찬의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놓았다. 빗방울과 축축이 베어 나오는 땀은 꽉 쥔 손을 미끌리게 만들었다. 경찬은 자신의 불안함이 늦었을 때 못 들어간다는 초조함 때문인 것인지, 오래 지내온 집을 떠나 알 수 없는 검은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산은 그 큰 아가리를 벌리고 검은 어둠을 내뿜고 있었다. 수 없이 자신의 입 속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먹어치우고 먹어치우고 또 먹어치우고 있었다. 경찬은 자신이 그 어둠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가는 게 썩 마뜩잖았다. 당장 언제라도 저 검은 어둠이 우리를 집어삼키고야 말 꺼야. 경찬의 손은 더욱 축축이 땀에 젖어갔다.
콰앙-
밝은 빛을 내뿜으며 번개가 내리친다. 사람들이 개미 흩어지듯 흩어진다. 경찬은 귀를 막고 땅에 주저앉았다. 먹먹한 귓속으로 삐-하는 이명이 머리를 괴롭힌다. 옆으로 사람들이 지나친다. 그제야 경찬은 눈을 들어 어머니를 찾았다. 어느새 경찬은 망령처럼 홀로 서 있었다. 어머니를 찾아 소리를 질러보아도 내리치는 빗소리에 사라져 버린다. 목소리가 쉬어가라 소리를 질러대지만 어디서도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씨발..."
경찬은 눈을 뜨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이 악몽과도 같은 기억은 언제 어느 때고 눈만 감으면 자신을 괴롭히곤 했다.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기억들이 눈 앞을 떠돌았다. 그들이 산을 오르던 행동과 눈빛이 잊히질 않았다. 종교는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총기를 앗아가고 허무한 희망만을 찾아 걸음을 옮기게 만들었다. 경찬의 기억 속 그들은 광기에 어린 미친 사람들이었다. 종교에 빠져 다른 것들은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경찬은 그때의 기억을 잊혀내려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무언가, 울타리가 되어버린 그 생각들은 경찬을 끊임없이 그 기억 속으로 밀어 넣었다. 미친 사람들의 틈으로, 종교의 노예가 되어버린 미친 사람들의 틈으로.
경찬은 애써 기억을 밀어내며 샤워기를 틀었다. 차가운 물줄기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기억을 악몽을 지워낸다. 머리칼을 타고 피부를 경직시키며 차가운 물방울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경찬은 기억들도 물방울과 함께 씻쳐내려 가기를 바랐다. 헛된 희망, 경찬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샤워기를 끄고 몸을 닦았다. 옷을 대충 걸쳐 입고 거실에 놓인 캠코더를 집어 들었다. 경찬이 그곳을 빠져나올 때 우연히 가지게 된 캠코더, 차마 영상을 볼 용기가 없어 아직 한 번도 켜보지 못 한 그 캠코더. 경찬은 습관처럼 캠코더의 버튼들을 쓰다듬었다. 세월의 오랜 흔적이 서린 캠코더는 마치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것처럼 경찬을 유혹했다. 기억 속 고통을 이끌어내듯 언젠가 이 영상을 보게 되고 말 것이다. 경찬은 고개를 흔들고 가방에 캠코더를 넣고 집을 나섰다.
경찬은 알고 있었다. 탁주는 언젠가 자신을 기억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말 것이란 걸. 마치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기억들이 피리소리와 함께 풀려나 자신의 목을 물고 말 것이라는 걸. 기억에 잡아먹힌 탁주처럼 술이 아니면 정신을 잃고 자신을 잃고 말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또 끝 모를 불안함이 엄습했다. 빌어먹을 1999년, 뱀의 독처럼 언젠가 자신을 중독시키고 죽이고 말리라. 빌어먹을 1999년.
경찬은 가방 속 캠코더를 만지작 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숙이, 빌어먹을. 그곳을 잊어버려도 숙이는 잊어버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작고 동그란 눈망울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경찬은 빌어먹을 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긴다. 벌써 몇 년째 방문하지 않았던 정신병원, 기억을 헤집어놓고 분해하며 다시 조립하여 더욱 큰 고통을 주는 빌어먹을 그곳. 의사들이 하는 것이라곤 머릿속을 헤집어 실험하는 그 짓거리들에 경찬은 강한 불쾌감을 느끼곤 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상황에 갈 수 있는 곳이 그곳뿐이란 것이 경찬의 발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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