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가게에는 단골손님 한분이 계십니다. 음, 그분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게, 그 뭐냐. 의사들이 말하는 그 개인정보 보호? 뭐 그런 거에 걸리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쪽 생각을 한번 듣고 싶어서 말이지요. 하하 부담 안 가지셔도 됩니다. 네, 네. 뭐 굳이 답변을 원하는 건 아니니까.
손님이 보시기에도 우리 가게, 그냥 어디에나 있는 작은 오뎅바 아닙니까? 하하-, 주인이 이렇게 말하면 장사 마인드가 글러먹었단 얘기가 나오겠지만, 뭐 사실이니까요. 아, 간장은 저기에. 예, 이렇게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손님들의 면면은 참 다양합디다. 거 그런 말도 있잖아요, 장사꾼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하하. 아이고, 얘기가 잠깐 샜네요.
어찌 됐든 말입니다. 저기 보이십니까? 가게 왼쪽 구석, 기둥에 가릴랑말랑한 자리요. 예예, 거깁니다. 손님들 중에서는 이렇게 저와 얘기를 하기 좋은 자리를 선호하시는 분도 있는가 하면, 저런 기둥에 가리어져 혼자 술을 드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뭐 이런 사람은 한둘이 아니라 그런 분들이 오시면 저희도 딱히 말을 건다거나 친한 척한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 단골손님은 항상 저 자리에 앉으시지요. 뭐 저는 언제나 그렇듯 주문받고 술 내오고 그저 조용히 자리를 지킵니다. 굳이 혼자 드시러 오신 분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
그 손님은 항상 기름진 단발머리에 연분홍 원피스를 입고 혼자 오시곤 했습니다. 언제나 구석에서 소주 두병과 오뎅 두 개. 한 병에 오뎅 하나, 하하. 맞습니다, 거의 깡소주나 다름없지요. 그 손님은 그렇게 드시곤 항상 돈만 올려놓고 자리를 나갔지요. 예? 아 물론 저런 손님은 저희 입장에서야 깔끔하고 좋지요. 그런데 조금 특이한 일이 있습니다.
매주 화요일, 밤 11시, 분홍 원피스에 며칠씩 감지 않은 것 같은 기름진 단발머리. 그걸 일 년이 넘게 지속합니다. 저와 같은 장사치들이야 소중한 단골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가끔 한 번씩 화요일에 머리를 깔끔히 감고 올 때가 있습니다. 그 날은 원피스도 분홍 원피스가 아닌 빨간 얼룩이 불규칙적으로 그려진 원피스를 입고 옵니다. 그치요, 그저 한 번씩 다른 옷을 입거나 머리를 감을 수도 있는 거지요. 당연히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봅니다.
그런데 혹시 손님께서는 월요일 밤의 연쇄살인마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아, 뉴스를 안 보시나요? 최근 이 곳 근처에서 지속적인 살인이 있습니다. 무서운 세상이지요, 이 얘길 왜 꺼내냐고요? 하하, 사실 전 그 단골손님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의심이고 그저 아무 증거 없는 추측에 불과할 뿐이지만, 뭐랄까요. 오랜 장사 끝에 얻어진 눈치 같은 거랄까요?
그 살인사건 말이죠, 항상 월요일에서 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어린 소년의 목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주욱 그어서 피가 낭자한 상태로 말이죠. 그런데 그 단골손님 말이죠, 왼손잡이입니다. 예? 무슨 상관이긴요? 모르시겠습니까? 시체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목이 그었다고요. 물론 앞에서 했을 수도 있지만 뒤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왼손잡이일 거라고요. 예, 맞습니다. 제 의심일 뿐이죠.
그런데 말이죠, 그 살인사건이 있던 다음날이면 항상 그 손님은 머리를 감고 방문합니다. 기묘하게도 여지껏 사건이 있던 그 날들만 말이죠. 우연이라기엔 재밌지 않습니까? 억측이라도 말입니다.
제 생각은 이런 겁니다, 월요일 밤. 그녀는 피해자를 물색합니다. 어린 소년의 뒤로 접근하는 겁니다. 키가 작은 소년들은 그녀가 뒤에서 제압하기에 아주 쉬운 존재인 거죠. 그녀는 소년의 뒤에서 왼손에 든 칼로 목을 주욱-. 그래서 피해자들의 목 왼쪽 끝에서 덜 잘린 채로 죽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피가 얼굴을 비롯해서 머리에도 덕지덕지 들러붙는 거죠. 예, 맞습니다. 그녀는 그래서 사건 후의 화요일엔 목욕을 하고 나타는 거죠.
옷이요? 글쎄요. 옷은 음~. 사실 그 빨간 얼룩은 피라고 할까. 글쎄요. 그걸 입고 나타나는 이유는 자기 과시욕이라 할까요? 하하-, 그러니까 단순한 제 추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오늘도 역시나 저기 오시네요, 그 단골손님. 음-, 어제도 사건이 있었나요? 빨간 얼룩 원피스군요. 어때요, 재미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오뎅바에 오는 연쇄 살인마. 하하하-.
'끄적끄적-./불편한 이야기-네달.'에 해당되는 글 31건
다른 이들의 선의는 날 불편하게 하곤 했다.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곤 할 때마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을 몰고 오곤 했다. 검은 먹구름과 같은 불쾌감이 날 집어삼킬 때마다, 난 숨길 수 없는 비뚤어진 미소를 내뱉고는 했다. 나는 이 불쾌감에 대해 많은 날들을 고민해 왔다. 그들의 이유 없는, 목적 없는 선의는 언제나 반짝거렸다. 검은 그림자처럼 한없이 어둠에 스며져 있는 나에게조차 반짝거리는 선의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드러나는 내 치부와도 같은 그림자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들과 나의 명암은 대비가 너무나도 극렬하여 다가가는 게 고통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내민 손에서 느껴지는 반짝이는 선의, 그리고 그 속에 스며있는 아주 조그마한, 나를 향한 연민. 그리고 그들 자신이 나와 같지 않다는 아주 조그마한 연민보다 더 작은 환희. 한번 눈에 들어온 이질감은 사라지지 않고 몸뚱이를 키웠다. 마치 암덩어리와 같이, 서서히 몸을 불리던 불쾌감은 이내, 그리고 이윽고. 나 자신을 뒤덮어 그들의 선의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극명한 불쾌감을 선사했다. 그건 아마 나 자신이 다른 이에게 선의를 표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자신의 추악한 자존감이 만들어낸 방어기제로써의 불쾌감일 것이다. 내가 못하는 일에 대한 일로써 불쾌감을 만들어내는. 아마 이것은 고치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랑을 하다 아픔을 알았다. 스무 살의 설렌 순간들은 운명의 장난처럼 순식간에 사랑을 앗아갔다. 서로 간의, 서로에게 향한 수많은 순간들이 일련에 사라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는 걸 직감했다. 손톱을 파고든 가시처럼, 살을 에는 겨울바람처럼, 긁혀 쓰라린 상처처럼. 사랑의 시발점에서부터 시작된 수많은 고통과 상처는, 순항하던 배를 좌초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이별했고 서로에게 쓰라린 상처만을 남겼다.
나는 혼자 서 있다. 아무도 없다. 내 주위엔 조용한- 적막한 분위기만 흐른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보지 않는다. 아니-,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주위는 금세 어두워졌다. 그제야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소리인가? 아니. 나는 눈을 뜬다. 잠시 잠깐 들려왔던 소리는 금세 사라진다. 손을 뻗는다. 아무것도 손에 걸리지 않는다. 나는 손을 움켜쥔다. 손 안의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손을 펴 바라본다. 역시 아무것도 없다. 방금 느낀 것은 착각인가? 잠시 숨을 고른다. 다시 나는 혼자 서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 나는 앞으로 한 발 내딛는다. 무언가 퍼석-하는 메마른 소리가 들린다. 발 밑을 바라본다. 역시 발 밑에는 차가운 무기질의 바닥뿐, 아무것도 없다. 발을 들어서 살핀다. 나는 다시 발을 내려놓고 한발 내딛는다. 몸의 움직임이 거북스럽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만 같다. 아니 언제는 내 몸이었나. 나는 눈을 감으며 한 발을 내딛는다. 내 주위는 금세 고공의 외나무다리로 바뀐다. 당장이라도 삐그덕 거릴 것 같은 거북한 소리가 귀에 들린다. 온몸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이 흔들거린다. 눈을 뜬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몸의 균형을 바로잡고 한발 내딛는다. 다시 눈을 감는다. 또 한 발을 내딛자 땅은 당장이라도 갈라질 듯이 쩍쩍 입을 벌린다. 나는 벌어진 틈을 피해 발을 내딛는다. 퍼서석- 하고 땅이 부서져 내린다. 나는 놀라서 얼른 눈을 뜨고 발을 옮긴다. 하지만 주변은 너무나도 멀쩡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난 후우-하고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쿵쿵거린다. 적막하던 귀에 쿵쿵하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나는 혼자 있다. 눈을 뜨고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주변이 우그러진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혹은 내 망상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젠 눈을 감지 않아도 땅은 깊은 늪지가 되고, 공기는 탁해지며, 지나가는 바람이 손에 잡힌다. 이젠 눈을 감지 않아도 나는 움직일 수 없다. 한 발 내딛기가 두렵다.
길을 지나다 우연히 죽은 고양이를 보았다. 우연히 눈에 걸린 그 싸늘한 몸에 차마 가까이 가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못한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머뭇머뭇 땅에 무겁게 이끌리는 다리를 억지로 잡아끌어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렇게나 꺾이어진 다리, 움직이지 않는 몸. 이상하리만치 푸석해 보이는-혹은 기름져 보이는 털들 사이로 녀석은 날 노려보고 있었다.
또 한참을 머뭇거리다 주변의 나뭇가지 하나와 종이박스를 찾아들었다. 천천히 박스 위로 몸을 올린다. 혹여나 손에 닿을까 잔뜩 긴장한 채로. 갑자기 몸을 움직여 내 손을 쥘까 하는 공포감에 식은땀이 흐른다. 조심스레- 혹은 무서워하며 나는 녀석을 종이 박스에 올리었다.
때마침 힘 없이 떨구어진 녀석의 머리와, 그 틈으로 마주친 녀석의 눈에 화들짝 놀라 박스를 떨어트렸다. '왜 날 죽였어?'하고 묻는 것만 같다. 초점 잃은 눈으로 나를 책망한다. 눈을 피하기가 어렵다. 애써 침을 꿀꺽 삼키고 녀석의 눈이 보이지 않게 박스를 돌린다. 다시금 박스를 집어 들어 주변의 수풀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왜 날 죽였어, 왜 죽인 거야' 메아리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외면하고, 우거진 수풀 아래 박스를 뒤집는다. 탁-하며 떨어진 녀석의 몸뚱이. 수풀 사이로 발 하나가 뻗어 나왔다. 난 재빨리 몸을 돌려 여기를 벗어난다. 무거워진 다리 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란 감정이 매달려온다.
그리고 그 뒤로 '왜 날 죽였어'하는 울음소리가 끌려온다.
[내 소원을 정말 들으시는 거라면 한 번만 대답해주세요. 신, 그대에게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난 어릴 적부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신은 존재할까? 그것이 내가 가진 딱 한 가지 궁금증이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지요. 제가 당신이 존재한다고 믿게 된 건 무슨 사실, 혹은 종교에 의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전 단지 새로 생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그 본질인 당신을 인정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궁금증은 당신이 존재해야만 성립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신, 당신은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까?
그래요, 난 이 질문이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의 모든 인류를 딱 두 가지로 정의하게 했습니다. 자신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믿는 자는 어떤 사람이든지 포용하고 믿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이던지 배척하라.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과는 참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당신이 정의해버리게 된 두 가지의 사람들은 사실 세부적으로 수 많이 갈리게 됩니다. 당신도 보고 있다면 알고 계시겠지요.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악행을. 그리고 그들이 벌인 추잡한 짓거리들을. 물론,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제 질문에 답해주셔야 합니다. 답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악행을 저지른 자신의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포용하는 겁니까? 살인을 저지르고, 강간을 하고, 폭행, 절도, 간음. 그런 것들도 당신을 믿기만 한다면 모두 용서가 되는 것입니까? 아니 용서가 되지 않더라도. 그들이 당신을 믿지 않는 착한 사람들과 같은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까? 당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그렇게 큰 죄악인 것입니까? 이것이 제 질문입니다. 제 궁금증입니다. 당신을 믿지 않던 제가 당신을 인정하게 된 이유입니다. 오로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하여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몇 번의 질문인지 몇십 번의 호소인지. 당신의 대답을 간절하게 기다립니다.
저는 제 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야만 합니다. 전 당신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의 방에 있던 편지의 전문입니다."
여성은 얼굴을 찌푸린 채 손에 들려있던 종이를 책상에 내려놨다. 커다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던 남성은, 종이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몇 년 전인가부터 시작된 그의 기행도 이 편지로써 끝이 나게 되었다.
이 편지의 주인은 죽었다. 남성은 종이를 다시금 여성을 향해 내밀었다.
"파일에 넣어놔"
"예"
여성은 손에 들린 파일에 종이를 끼워 넣고는 방문을 나섰다.
여성의 손에 들린 파일 안에는 편지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성의 프로필이 적혀있었다.
강철웅 43세. 살인 및 강간, 납치.
사형.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다. 앞자리의 숫자가 두 번이 바뀔동안 나의 몸뚱이는 끊임없이 세포를 죽여가고 있었지만, 나의 정신은 어릴 적 그때를 답보하고 있다. 발전이 없는 정신상태는 나태하고 불안정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끊임없이 게으르기만을 추구하는 이 육신은 어느새 지방 덩어리의 괴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염없이 언젠간 변화될 거라는 거짓된 자기만족을 하며, 대기만성할 것이란 헛된 꿈을 마음에 품은 채. 와룡과 봉추와 같이 아직 내 재능이 꽃피울 곳을 찾지 못한 것이라 세상을 탓한다. 사실 마음속 불안은 슬슬 머리를 치켜들며, 언젠가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단 걸 알고 있다. 난 알고 있다. 그 불안이 튀어나와 날 집어삼킬 날이 온다면, 그런 날이 언젠가 온다면. 아직도 성장하지 못한 날 좌절로 밀어 넣을 것이란 걸.
남는 시간은 사람을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진다. 나에게만 주어진 이 남은 시간은 끊임없는 불안감을 짊어지게 했다. 무언가 안정될 만한 것을 찾는다. 숨소리가 귀를 어지럽힌다. 타닥 거리는 펜 놓는 소리가 온 방 안을 채운다. 시간을 채워야 한다. 숨을 천천히 내쉰다. 온몸의 신경이 날카로운 바늘 끝처럼 곤두선다. 발 끝에 힘을 준다. 종아리까지 타고 오르는 둔탁한 고통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 이내 등줄기를 내달린다. 머리가 아찔하다. 비어있는 이 시간,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는 유난히도 천천히 흐른다. 마치 더 느리게 더욱 느리게 거꾸로 내달리는 거북이와 같았다. 날카로웠던 신경을 붙잡아야 했다. 잠시만 신경을 놓아준다면 야생마와 같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상념은 상념을 낳았다. 그 상념은 살아있는 생물체가 되어 끊임없이 정신을 뒤흔들었다. 이윽고 난 얼마 지나지 않아 야생마의 고삐를 놓았다. 이리저리 내달리는 정신은 온갖 상념들의 파도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눈을 들어 주변을 살피었다. 나 외에 모두가 바쁜 이 곳, 난 홀로 남은 시간과의 싸움에 지고 말았다. 책상에 엎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을 끝마치는 고통과 같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일어설 수 없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에 따른 다양한 관점과 생각들이 존재한다. 그 생각들은 개인의 성향과 교육 환경, 그리고 그들이 속한 그룹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 그룹들이란 결국 속한 사람들의 위치와 이익 관계를 대변하게 된다. 사람들은 결국 세상 안의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자신이 속한 그룹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로써 귀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자신이 속하지 않은 그룹의 관점에서 생각을 전개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는 것이지, 정확하게 그들과 같은 관점에서 생각을 전개하기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그들의 생각을 난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는 자만과 위선일 수 있다.
한 남성이 있다, 그는 자신이 페미니스트이길 자처한다. 허나 그가 완벽히, 그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과 동일한 차별과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그걸 몸으로 체득하면서 그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는 남성이고 그가 여성으로써 느낀 부당함을 자신의 몸으로 체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페미니스트적 사고를 견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야 옳다. 그는 남성이라는 그룹에서 여성이라는 그룹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경우를 보자면,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적인 남성과 여성들은 LGBT를 대변할 수 없다. 그들의 생각과 그들이 그러한 결정을 내려 삶을 살아가는 자세까지 대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보면 자신이 겪을 수 없는 모든 경험을 자신이 겪은 것이라 오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입장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서로를 배척해서는 안된다.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지만 페미니스트적 견해를 견지해야한다. 일반적으로 LGBT에 대하여 그들의 삶에 대하여 우리는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그룹의 서로간에 대변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서로 다른 그룹들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계속 관철해야한다.
"... 그래서 그랬습니다."
"후우-"
노려보던걸 멈춘다. 내가 노려본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이미 사람을 죽여버린 녀석이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녀석을 죽여버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 녀석에게 무슨 사과를 받아낼 이유도 없다. 나는 그저 말 잘 듣는 로봇처럼, 혹은 마음이 없어져버린 사이코패스처럼,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감정을 억누르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말자.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시체를, 고깃덩어리를 의식하지 말자. 감정의 찌꺼기는 뇌 속 한 공간에 묻어두자. 묵직한 이성 덩어리로 감정을 억눌러 흘러나오지 않게. 그렇게 맘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금 바라본 사건 현장, 붉은 바닥. 흘러내리는 붉은 핏방울. 떨어지는 핏방울 속 걸려있는 고깃덩이. 혹은 사람이었던 그것. 푸줏간을 연상시키는 붉은 불빛. 사람마저 붉게 변해 보이는 그런 공간이다. 아무도 말이 없다. 모든 사람들은 이 상황에 뭐라 말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는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할 일을 깨달은 막내가 녀석의 손목을 잡아끈다. 찰칵-거리는 소리, 질척 거리는 발소리. 막내와 녀석이 사라졌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붉은 공간에서 홀로 검게 물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붉게 변한 물이 채워진 욕조에 다가간다. 이젠 익숙해져 버린 비릿한 냄새. 욕조 속에서 손이라도 뻗어 나올 것만 같다.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몸을 숙여 땅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머리카락 한올을 집어 들었다.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 끝, 그 끝 부분에 거칠게 뜯겨 나간 피부 조각이 들러붙어있다.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눈을 돌릴 수도 없다. 끝까지 보고 파악하고 분석 해내야한다. 냉철해져야 한다. 하지만... 갈수록 그러기가 힘들다. 바지 주머니에서 증거품 수집용 비닐백을 꺼내어 넣는다. 피부 조각이 붙은 머리카락이 휑한 비닐봉지에 담긴다.
못 해 먹겠다. 속이 메슥거린다. 나는 대충 둘러보다가 방을 나왔다. 잠깐 머리라도 식히자. 더 보고 있자니 묵직한 이성 덩어리가 쩌적 소리를 내며 금이 가고만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이성을 짖눌러 보아도 난 사람이다. 그들과 똑같지 않은. 매달, 혹은 매주, 그것도 지나치면 매일. 나는 지옥과 일상을 오가고 있다. 흔히 악마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과 매일 마주치고 그들의 말을 듣고, 일반인들이 오열하는 걸 견뎌야 한다. 맨 정신으로. 술의 힘을 빌릴 수도 없이. 그들과 매일 마주하며 매시간 환희와 거짓에 찬 목소리와 그들에게 당한 피해자들의 피 흘리는 오열을 들어야 한다. 그들의 어디부터가 거짓이고 진실인지, 그들의 말 틈 어딘가에 빈틈이 없는지 찾아야 한다. 눈물 흘리는 피해자들과 마주하며. 피해가족의 오열과 절규를 악마 놈들의 거짓과 진실처럼 냉정하게 받아야 한다. 익숙해지면 안 된다. 나약해지면 안 된다. 흐트러지면 안 된다. 어디까지나 냉철해야 한다. 하지만 난 사람이다. 난 기계가 아닌 사람이다.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일 이런 것들과 마주하며 살아온 내 선배들이 존경스럽다. 지금의 난 하루하루 깨어져 가고 있는데...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붉은 그곳으로 들어간다. 검은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만 같은 그곳으로 선뜻 발을 내밀기가 힘들다. 수많은 생각이 교차된다. 아까 봤던 그 붉은 공간이 다시 눈 앞에 펼쳐진다. 매달려있던 시체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듯이 움직거린다. 욕조에 담긴 붉은 물에서 손들이 뛰쳐나온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많은 고깃덩어리가 하나가 되어 일어선다. 눈을 질끈 감는다. 어둠에 감싸여 모든 환상이 사라진다. 잠시 숨을 고른다. 거칠어진 숨소리, 심장이 달음박친다.
"에이 씨발"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있던 사표를 꺼내 땅에 아무렇게나 내던진다. 휴대폰 배터리를 뽑아 꺼버린다. 어디 사람 없는 곳으로 가버리자. 일상으로, 지옥과 마주칠 일이 없는 곳으로.
"씨이발..."
...
....
.....
......
다시 사표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