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 별다른 느낌은 없었어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으니까요. 그저 처음엔 그냥 아~사람이 탔네 하는 정도였죠.
남 : 글쎄요. 그때는 별다른 생각 없었습니다. 뭔가 불안해 보이긴 했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요.
여 : 그런데 그때부터 그의 행동이 이상했죠.
남 : 그런데 그때부터 그년의 행동이 이상했습니다.
"그때요?"
여 : 예. 엘리베이터가 멈춘 뒤부터 그는 지나치게 히스테릭을 부리기 시작했어요.
남 : 짜증 났습니다. 며칠 전부터 계속된 야근에, 상사의 스트레스. 거기에 오늘은 잠도 못 자고 나온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곤 해도 남에게 피해가 가는 그런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여 : 머리를 헝클었어요. 한참을 쥐어뜯다가 거울을 보며 뭐라고 중얼거리더군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남 : 그냥 이 좆같은 상황에 욕을 했을 뿐입니다. 별다른 의미 있는 말은 아니었어요.
여 : 죽여 버린다고 했어요. 분명히 들었다고요.
남 :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 까진 괜찮았어요. 그 뒤가 문제였죠. 그 뒤가...
여 : 엘리베이터가 멈추니까 본색이 드러난 거라니까요?
"멈춘 뒤에요...?"
남 : 불이 꺼진 시점부터요. 엘리베이터는 멈춰있지 덜컹거리는 소리는 계속 들리지. 그런데 갑자기 불이 꺼진 겁니다.
여 : 불이 꺼졌어요. 갑자기! 타악-하고 꺼진 불 틈으로 그놈이랑 눈이 마주쳤어요.
남 : 눈이 마주쳤냐고요? 글쎄요. 그런 것까지 기억할 정신이 아니었어요. 무엇보다 야근 때문에 졸려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요.
여 : 그놈 눈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어요. 마치 공포영화나, 삼류 영화에 나오는 강간범들 같은 그런 눈이었어요!
남 : 아니 그러니까 씨발! 난 가만히 있었다고요. 구석에 박힌 채로! 그런데 그 년이 갑자기 소리치더라니까요!
여 : 가까이 오지 말라고, 분명 난 경고했어요. 수십 번은 했어요!
남 : 가까이 갔냐고요? 하-씨발. 난 가까이 안 간다고 그저 손만 뻗어서 흔들었어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고요.
여 : 예. 찔렀어요. 그놈이 손을 뻗고 가까이 다가오길래, 먼저 찔렀어요!
"찔린 곳은 괜찮습니까?"
남 : 하... 괜찮을 거 같아요? 시벌.
여 : 그런 놈은 죽어버렸어야 돼요. 그런 상황을 틈타서, 여자를 어떻게 해봐야겠다는 개새끼들은.
남 : 시펄. 그년 고소할 겁니다. 개 같은 년.
'끄적끄적-./불편한 이야기-네달.'에 해당되는 글 31건
"이대로 죽게 해줘요 엄마..."
그녀는 아들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산소호흡기로 인해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말을 꺼낸 아이의 말이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소리가 병실에 가득 메워진다. 그녀는 아들에게 고개를 흔들곤 머리를 쓰다듬었다. 독하디 독한 약으로 인해 맨들 머리가 된 아이의 피부는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것만 같았다. 푸석한 진흙더미를 만지는 듯한 기분에 그녀는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아이의 이마에 키스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잠깐 사이에 아이는 생명이 끊어진 것처럼 잠이 들었다. 간혈적으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쌕쌕 소리만이 아이가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선채로 한참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아이의 고통을 계속해서 연장하는 것이 누구에게 좋은 것일까. 그녀는 지난한 몇 년간의 간병생활에 지쳐있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머리를 가득 메운 하나의 상념을 잊을 수 없어 크나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입 밖으로 차마 내기도 어려운 그 생각이 잠을 설치게 했다. 점점 심해져만가는 수면장애는 결국 불면증으로 이어졌고, 그녀 또한 나날이 심약해져 갔다. 사실 굳이 따지고 보자면 이날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오랜 간병생활의 하루일 뿐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언제나 아이가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일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아이의 말이 마치 명령처럼, 혹은 아이의 간절한 소망처럼 마음을 옥죄어왔다.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 투병으로 인해 아이의 얼굴은 여기저기 상해있었다. 약에 취해 잠에 들었음에도 고통스러운 표정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아이의 몸을 여기저기 찌르고 있는 선들이 아이를 속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유로워 지기를 바라는, 고통 없는 세상을 바라는 아이를 자신의 이기심으로 붙잡아두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아이의 몸 위로 올라탔다. 침대의 흔들림에 아이가 슬며시 눈을 떴다. 아이는 마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베개를 집어 들었다. 아이는 마치 선물을 보채는 아이처럼 그녀에게 말없이 재촉했다. 어서요, 빨리요-. 그녀는 베개로 아이의 얼굴을 짓눌렀다. 베개 위로 보이는 눈이 그녀를 향해 깜빡인다. 고마워요, 엄마. 그녀는 환청처럼 들리는 그 소리에 베개를 더욱 세게 짓눌렀다. 아주 미약한 힘도 내기 힘든 아이는 잠시 잠깐 손발을 버둥거리다 이내 축 쳐졌다. 그녀는 아이가 움직임을 멈추고, 병실에 가득 시끄러운 소리가 채워졌음에도 아이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웃고 있는 아이의 눈에 흐른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냈다. 그리곤 아이의 이마에 키스했다.
"잘 자렴, 우리 아가"
합격 소식을 들었다, 너의. 난간에 올라 담배를 물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몸을 적신다. 저 밑의 사람들은 개미처럼 재빨리 걸음을 옮긴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피해 이리저리 걸음을 재촉한다. 우산을 꺼내 쓰고 가방과 옷으로 머리를 가린다. 누군가는 그늘 밑으로 몸을 숨기고 또 몇몇 사람은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긴다. 카악-하는 소리를 내며 입에 가래를 머금는다. 천천히 밑을 조준하고 퉤- 내뱉는다. 빗방울에 섞여 침이 떨어져 내린다. 땅으로, 누군가의 머리 위로, 또는 누군가의 우산으로, 누군가의 가방 위로.
침을 맞지 않은 자들과 맞은 자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서도, 그 무수히 많은 빗방울 속에서도 침을 맞은 사람의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들의 노력은 무엇이 있었을까. 아니 맞지 않은 그들은 무슨 노력이라도 해서 피하기라도 한 것일까. 침을 피한 이가 합격이라 한다면 그에겐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내가 하는 행위가 저 위의 누군가가 하는 행위와 다를 바는 또 무엇이란 말일까. 합격한 너의 노력과 나의 노력이 무엇이 그리 차이가 난 걸까.
담배를 난간 밖으로 던졌다.
너를 갈망한다. 사막에 오아시스를 찾듯, 목마른 이들이 비 한 방울을 기다리 듯. 난 너를 갈망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끊임없는 갈증과 같았다. 절대 채워지지 않는, 아니 정확히는 채워질 수 없는 그런.
넌 나에게 다가올 리 없는 파랑새였기에, 나에게 희망이나 행복 따위는 다가올 리 없었다. 그건 마치 끊임없는 수렁으로 날 밀어 넣는 행위와 같았음에도, 난 끊임없이 그 나락으로 내 몸을 던져 넣었다. 그것은 일종의 내 마음에 대한 자살과 같았다. 스스로 내리는 마음의 사형선고라 할 수 있다. 널 가질 수 없음에 널 갈망하는 게 끊임없는 죽음의 고통과 같았다.
나의 갈망은 나 자신에게 독이었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감정의 갈증에 난 그 독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죽음으로 나락으로 감정이 죽어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때까지, 내가 갈증을 느낄 수 없도록. 참으로 멍청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절대 해결될 일이 없는 갈증임을 알면서도, 너를 갖기 전까진 없어지지 않을 갈망이며 갈증임을 알면서도.
난 절망과도 같은 갈증이 없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갈망을 들이켰다. 최대한 빨리 내가 죽어 스러질 수 있도록. 내가 갈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스러질 때뿐이란 걸 알기에.
여름밤, 달빛을 친구 삼아 혼잣말을 털어놓았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할 얘기들을.
난 어릴 적 많은 고민과 고통을 가진 아이였다. 그건 때로는 분노 발작처럼, 다른 이들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내 폭탄과도 같은 성질을 견뎌내어야만 했다는 것과 동일했다. 특히 그건 내 옆에 있는 가족들에게 더 심한 트라우마처럼 심어지기에 충분했다.
난 사회의 피해자이며 가해자였다. 학교에서 당한 모든 폭력은 고스란히 내면 깊숙한 곳에 상처를 만들었다. 절대 아물리 없는 흉터처럼, 곪고 곪아 썩어버리는 그런 흉터는 고름을 잔뜩 머금은 채 날 죽여가고 있었다. 웃기게도 이런 상처는 나를 가해하는 가해자들에게 화살이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있어서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허들과 같았다. 내가 아무리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고 그들에게 애원해도, 그들은 가차 없이 날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다. 마치 즐거운 유희처럼, 난 그들의 장난감과 같았다. 언제 어느 때고 부서져도 문제없는 싸구려 장난감. 그런 그들에게 난 반항할 수 없었다. 반항은 용기 있는 자의 행동이었으니까.
나는 모든 폭력의 분출구를 가족에게로 돌렸다. 그들에게는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난 그들에겐 피해자였으나, 가족에겐 가해자일 뿐이었다. 그들의 가혹성이 정도를 더해갈수록, 반대급부로 가족에게 가해지는 피해망상은 한없이 치솟았다. 그것은 내가 아직 이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지만, 가족에겐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계속되는 자살시도에 가족들은 지쳐갔다. 내 안에 깊이 가라앉은 해결되지 않는 분노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파괴했다. 고통의 나날이 지속되었다. 그들과 마주칠 일이 없게 된 뒤에도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날 옥죄었다. 정신병동에 갇히기를 반복해가는 와중에서야, 난 아주 간신히 내 분노를 돌릴 수 있었다. 그것은 가족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향하지 않는 아주 이상적인 형태로, 나에게 나타났다.
여름밤, 정신병동에서 퇴원한 오늘 밤, 달빛을 친구 삼아 혼잣말을 털어놓는다. 누군가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를.
"다 죽여버리고 싶다"
도심 속의 나는 홀로 있다. 회색빛의 거인들 틈에서 작은 나는 홀로 있다. 마치 나 혼자 동떨어진 존재인 것처럼 난 홀로 서 있다. 회색빛 거인들이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날 짓누를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 꺼멓게 당장이라도 비를 토해낼 것만 같은 구름도 언젠간 날 향해 빗줄기를 쏟아낼 것만 같다. 웅웅 거리며 귓가를 스치는 저 바람들도, 회색 거인들이 뿜어내는 입김처럼 날 저 멀리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난 홀로 있다, 이들 틈에서, 아무도 나의 위로가 되어주지 않는 이 군중 속에서.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나 홀로 외면을 느끼며 난 홀로 있다. 이 도심에선 아무도 내 곁에 서 있지 않는다. 아무도 날 위해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난, 홀로 서 있다.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쏟아지는 여름날이었다. 본래 그날그날의 날씨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 그날도 우산 없이 학교를 갔던 게 화근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었다.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은 우산을 들고 오실 수 없었음이 당연했고, 이미 십수 년 전의 이야기니 핸드폰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핸드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세상의 신이란 작자는 일이란 꼬일 수 있으면 더욱 꼬아버리곤 하는 괴팍한 심보를 가진 게 틀림없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뒤진 안주머니엔 분명 있어야 할 버스 승차권이 없었다. 이때의 나는 내성적이며 예민했으며 남들과 어울리기 상당히 힘들어하는 성격이었기에(사실은 이 성격은 십수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빗 속을 걸어가기로 했다.
집까지는 대략 중학생 아이의 걸음으로 30분, 참으로 미련하게도 난 그렇게 집으로 걸어갔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온 몸은 젖어들고, 하늘은 어둑어둑해졌다. 참으로 웃긴 건 그때의 그 상황이, 지금 이 시점에서도 그때 느낀 감정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빗방울이 물결을 그리는 웅덩이의 비릿한 물 냄새. 젖은 땅에서 흐릿하게 올라오는 흙냄새. 빗방울에 고개를 떨군 나뭇가지가 그리는 그림자. 구름에 가리어진 햇빛이 슬쩍슬쩍 얼굴을 내미는 그 순간. 이윽고 어둠이 내려온 그 상황에서 나 혼자 서 있는 그 길. 옆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만 시끄럽게 귀를 괴롭히는 그 순간. 어린 마음에 혼자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 서글픔이 아주 조금 눈물처럼 나오던 그 순간.
서글펐던 감정은 그때 단 한순간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서글픔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는 있다. 그래도 그때의 왠지 모를 서글펐던 감정은, 아마 사라지지 않고 마음 속 깊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에게 전할 얘기가 있어. 아,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좋은 소식일리 없잖아? 우리가 뭐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응, 그래. 나도 마음 같아선 네 목소리 따위 듣고 싶지 않아. 욕하지 마,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어? 도대체가 넌... 아니야. 응, 만나서 얘기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아니,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 거 같아. 야! 말 이쁘게 하라고, 너랑 말해야 하는 상황이 난 좋은 것 같아? 미친, 야! 너만 욕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다 만나면 또 때리겠다? 야, 그래. 그게 자랑이니? 네가 때렸던 게 자랑이냐고. 찾아오기만 해봐. 미친 새끼, 만날 장소나 정해. 아니, 낮에. 아니, 너 무서워서 어떻게 밤에 보겠어? 낮에 봐. 응, 그때 그 카페, 기억나? 어딘지? 미친, 헤어졌던 거기 말이야. 응. 그래. 욕하지 말랬지? 하~ 지친다. 야, 그냥 전화로 말할게. 야 나 임신했어. 그래, 니 새끼지 쓰레기 새끼야. 응, 지울 거야. 나도 니 새끼 키울 생각 없으니까. 응, 돈은 계좌로 보내. 오늘 중으로 보내, 아니면 회사고 어디고 찾아가서 미친짓 할 테니까. 그래, 당장 보내. 응, 그래.
글을 쓰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점이라면, 그건 아마 자기 자신과의 대면을 통한 고찰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나의 생각이란 수많은 의견을 반영하여 만들어진 커다란 찰흙과 같은 것이라서, 뭉치고 섞여 회색빛으로만 보일 수도 있다. 마치 내가 가진 딱 하나의 생각인 것처럼. 이건 약간의 오만이기도 해서 나의 생각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것이란 착각에서 발로 된 것이기도 하다. 다시 뒤섞인 찰흙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이 찰흙은 회색빛의 단색으로만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고 분리하다 보면 사실 이것은 여러 가지 생각의 복합체라는 걸 알 수 있다. 나의 의견은 나 혼자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글을 쓰다 보면 글이 나의 의지와 생각을 벗어난 채 써 내려가질 때가 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생각과 원하는 방향이 아닐 것일진대, 또 웃기게도 그 이상한 방향의 이야기도 써 내려가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글을 한참 내 의지 같은, 혹은 내 의지 같지 않은 글을 다 써 내려가고 난 뒤에야 한 가지 깨닫게 된다. 사실 이 글의 의지와 생각도 사실 뒤섞여 알아볼 수 없던 찰흙 덩어리였단 걸. 보이지 않았을 뿐 내 안에 있던 생각 중 하나라는 걸.
이 과정 중에서 느껴지는 그 묘한 생각은 날 불편하게 만들곤 한다. 상충되는 두 가지의 생각은 어떤 관점에서 내가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을 촉구하곤 하는데, 그것은 사실 답을 내릴 수도 내려서도 안 되는 문제가 많은 것이다. 사형과 복지, 신과 인간, 선과 악 그따위 것들 말이다. 그래서 간혹 이 상충되는 생각과 감정을 서로 충돌하게 하곤 한다. 글을 씀으로써 글을 쓰고 난 뒤에야, 나도 몰랐던 그 생각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게 한다.
사실 어린아이 장난 같은 내 글들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보단 내 생각을 정리하는 창구와 같은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내 생각을 공유(혹은 강요라고 할 수도 있다)함으로써 내가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이쪽과 저쪽, 좌와 우의 어느 쪽에서도 받아들여지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사실 이런 태도는 양쪽 모두에게 지탄받을 테지만.
불 꺼진 복도를 걷는다. 끼익-. 오래된 나무 바닥이 비명을 내지른다. 서서히 식어가는 태양이 붉은 노을을 만든다. 타박-타박. 발걸음 홀로 적막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창밖에서 붉은 노을이 날아든다. 저 멀리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인다. 빛을 삼켜버려 새까만 어둠의 모습으로. 교실 문 앞에 다다랐다. 뒤틀린 나무 문이 신경을 갉아먹는 소음을 만들며 열리었다. 교실은 그때의 그 모습으로 그때의 그 향을 머금은 채 머물러 있다. 난 흐릿한 기억 속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낙서 가득한 책상, 기억 속에선 선명한 낙서들이 여기선 흐려져 있다. 먼지를 손으로 대충 털어내자, 그 흐릿한 낙서 몇 개가 몸을 들어냈다
우리 언제까지나.
네가 새긴 그 낙서는 이제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말이 되었다. 넌 언제고 어느 때고 어느 순간이고 그때처럼 이곳에서 머물러 있겠지만, 더 이상은 널 볼 수 없게 되었다. 붉은 노을이 검게 물들어 갔다. 어둠은 금세 교실을 뒤덮었다. 검은 노을 속으로 사라진 너의 모습은, 이제 흐릿한 기억이 되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을 것만 같다. 이렇게 무너져가는 우리의 추억 속에서 나의 시간만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