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밤. 우울한 기분. 우울한 노래. 추적추적 흘러내리는 빗소리. 함께 흐르는 음악소리. 떨어져 내리는 달빛. 가리어진 구름.
그 사이로 부서져내리는 별빛. 가라앉은 목소리. 느리게 움직이는 몸짓. 멀리서 들려오는 강아지가 짖는 소리. 슬피 우는 고양이의 울음소리.
순간 세상을 파랗게 물들인 번개. 같이 내리치는 천둥. 노란 가로등불.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 두근거리는 심장. 떨어지는 눈물.
입술로 스며드는 눈물. 흘러나가는 기분. 점점 커져가는 우울함. 그와 함께 깨닫게 되는 무력감.
꺼지지 않는 불안감. 차오르는 기대감. 지나가는 바람소리. 흔들리는 나뭇잎.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춤을 추는 나비 한 마리.
귀를 간질이는 모기 한 마리. 불빛을 향해 날아가는 나방 한 마리. 떨어지는 불빛. 침대로 돌아가 뉘인 몸. 스르륵 스치는 이불.
몸 위로 내리 앉는 우울. 그 안에 스며드는 몸. 토해내지는 울음. 커져가는 소리. 젖어가는 베갯잇.
덮은 이불 위로 짓누르는 빗소리...
'끄적끄적-./불편한 이야기-네달.'에 해당되는 글 31건
드디어 판은 시작됬다. 우리는 국경을 넘으려 했다. 우리를 옥죄는 자유로부터 뛰어넘을 그 순간이다. 짓누르는 어둠을 친구 삼아 걸음을 옮긴다. 진창이 되어버린 땅과 우거진 풀들이 우리의 도주를 방해하듯 발목을 잡아끌었다. 땅으로 손을 내민 버드나무 가지가 우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아가야 했다. 한 손에 쥔 칼의 예기가 서늘하게 우리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우리는 말이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우리의 어둠 사이에는 깊은 숨 소리만 메워져 있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충격과 소음에도 깨어져버릴 것만 같은, 우리의 신경을 갉아먹는 침묵이었다. 사각거리며 우리의 지금을 갉아먹는 것만 같은.
온갖 환상과도 같은 방해를 무너트리며 우리는 국경에 다다랐다. 길을 나설 때만 해도 우리를 피해 어둠만 비추던 달빛은 찬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른침을 삼켰다. 아마 저 황홀하고도 찬란한 달빛은 우리를 놔주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우리는 몸을 숙여 땅에 찰싹 달라붙었다. 너무나 밝다, 우리가 찾는 자유처럼, 우리를 옥죄는 자유를 향해 너무나 밝은 빛을 뿌려대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위험했다. 서로 손을 맞대고 서로의 죽음을 응원하던 그 순간으로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서로의 죽음을 담보하기로 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진창을 박차고 일어나 뛰었다. 저 달빛이 너무나 밝다. 내 왼편을 달리던 녀석이 땅을 나뒹군다. 오른편의 녀석은 무엇을 밟았는지 몸뚱이가 하늘을 향해 튀어올랐다. 아직 걸음을 옮길 수 있는 녀석들은 멈추지 않았다. 국경을 향해, 저 눈앞에 보이는 철조망을 향해. 저 멀리 소리를 내지르며 뛰던 녀석의 머리가 터져나간다. 그 옆의 녀석은 부수어진 다리를 땅에 끌며 자유를 향해 몸을 굴린다.
아, 우리의 자유가, 우리를 옥죄는 자유가, 우리를 비추는 달빛이, 저 찬란히 빛나던 달빛이.
나를 향해 쏟아진다. 빛은 내 몸을 감싼다. 난 우리를 가로막은 국경을 눈앞에 두고, 우리를 옥죄는 자유를 두고 더 나아갈 수 없었다.
너와 내가 만난 지 7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조금은 긴 시간, 그러나 너와 나에게는 순식간에 흘러지나 간 시간. 20대였던 너와 30대가 된 너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시간은 벌써 이만 치나 흘렀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로.
넌 그때와 같은 표정. 그때와 같은 목소리, 손짓으로 날 불렀다. 언제나와 같은 여느 때와 같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모습으로. 넌 아무렇지 않은 척 나를 불렀고 그런 너의 행동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아 나도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대답했다. 너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 메마른 목을 따갑게 만드는 침을 삼키고. 메말라 갈라진 입술을 물어뜯으며 애써 웃었다. 무언가 애처로워 보이는 그 모습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우리는 왜 의식하지 못한 채로 이 시간들을 헛되이 달려왔나. 바로잡을 새도 없이.
우리는 식탁에 앉았다. 우리의 돈을 모아 산 낡은 의자가 삐걱-. 7년이란 시간의 흔적과, 방안에 가득 찬 너와 나의 시간들. 너는 잠시 의자를 쓰다듬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언제나처럼 또 다르지 않은 듯이 넌 자작하게 끓고 있는 된장국을 한입 떠먹었다. 그리곤 작은 캬~하는 소리를 내곤, 그리곤 너는 멈추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작은 틈 후에, 너는 어깨를 들썩였다. 숟가락을 쥔 손가락이 빨갛게 변했다. 너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참았다.
난 조용히 숟가락을 들어 밥을 욱여넣었다. 항상 먹던 그 맛의 그 요리들. 그렇지만 내가 느끼기엔 달라져버린 맛들. 물을 입에 넣고 마시듯이 밥을 삼켰다. 내가 도망치듯 밥을 다 먹은 후에도 너는 한참이나 숟가락을 든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듯 식탁의 음식들을 치웠다. 너는 언제나처럼 설거지를 했고, 난 평상시와 다르게 돕지 않았다.
넌 꼼꼼히 설거지를 마치고, 겉옷을 입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나는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고 현관으로 따라나갔다. 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메마른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찰칵-하는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넌 옮겨지지 않는 것 같은 한 발자국을 밖으로 내놓았다. 등 돌려진 너의 모습은 작아져 있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안녕..."
"응 안녕"
우리는 평상시와 같게 인사했다. 그리고 너는 문을 나섰고 우리는 평상시와 다르게 이별했다.
너와 나 사이에 '내일'은 없다. 7년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긴 시간일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순식간에 흘러갔다. 이별하는 지금 이 순간이 7년이란 시간보다 더 길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에게는.
우리의 7년이 흘렀고, 더 이상 그때와 같지 않았다.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있다. 무언가 넋이 나간 듯이 보였다. 간혹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상을 두들기기도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몇 시간째더라-? 오늘은 당직도 아닌데 얼떨결에 이 녀석을 맡아버렸다. 집에 돌아가서 마누라가 끓여주는 김치찌개를 먹고 곤히 자고 있는 딸내미의 볼에 뽀뽀 한번 해주고 컴퓨터 좀 해볼까 했었다. 아니면 마누라랑 함께 티브이를 틀어놓고 영화라도 보려고 했다. 시발-. 근데 이게 뭐야.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긴다. 그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바짝 메마른 입술이 무언가 말할 것처럼 옴싹 거 린다. 한참을 그렇게 망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뭐? 말해봐"
"무... 물 좀..."
이 개새끼가 진짜... 잠시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정수기로 다가가 천천히 물을 떠다 주었다. 이 새끼 지 목마른 건 참기 힘든 건가 보지? 그 녀석은 받아 든 물컵을 덜덜 떨며 입으로 가져갔다. 손 끝에 발라져 있는 노란색 매니큐어가 반짝거린다. 덜덜 떨리는 손끝 때문인지 노란색 손톱이 잔상을 남기듯이 흔들린다. 녀석은 물을 다 마시고는 탁자 위에 천천히 올려놓았다. 그 행동이 너무도 불안하고 느려서, 보고 있으면 없던 짜증도 생길 판이었다. 그 녀석은 또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약간은 총기가 돌아왔다. 촉촉이 젖은 붉은 입술 위로 혓바닥이 날름.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저기요... 저희 집엔 먹을게 많아요..."
"그래. 계속 말해봐"
"냉장고예요, 냉장고에 말이죠. 과일도 있고 고기도 있고... 먹을게 많아요 히히히. 그러니까 전 그게, 그러니까 먹을게 떨어지면 말이죠. 그러니까- 그... 그 뭐라 그러더라. 아아- 그래, 불안해져요. 방금 밥을 먹어서 배부른데도, 냉장고에 먹을 게 없으면 불안해져요. 많이요. 엄청. 히히히... 그래서요 전 항상 먹을게 떨어지기 전에 먹을걸 구해와요. 잔뜩 구해온 먹을걸 냉장고에 그득그득 채워 놓고 나면 괜히 마음이 편안해요. 경찰님도 그렇지 않아요? 든든할 거예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아아-. 그리고 말이죠 전, 사 오는 것도 좋아하지만 직접 구해오는 것도 좋아해요. 의외로 먹을게 도시나 한적한 시골길에 많거든요. 멧돼지라든가 사슴이라던가-. 혹은 고양이도 그래... 그래, 고양이도 먹을만했어요. 사람들이 왜 그걸 안 먹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죠. 아아-특히 개고기는 말이죠, 일단 개를 잡잖아요? 그럼 죽을 때까지 패야 돼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물고 할퀴어도 말이죠. 발로 밟고 몽둥이로 후려치고- 뭐 그런 것도 좋지만 말이죠, 진짜 좋은 건 죽어갈 때쯤에, 그러니까 숨이 간당간당할 때 있잖아요? 그때 칼로 목을 스윽- 긋는 거예요. 그럼 붉은 피가 줄줄 흐른단 말이죠. 근데 그게 또 별미예요. 항상 개새끼를 잡고 나면 저도 모르게 목에 입을 대고 피를 빨고 있더라니까요? 그게 드라큘라나 뭐 이런 거 보면 잘 나올 거 같죠? 아니에요-아니라고요. 그게 더럽게 안 나와요. 씨발 그 맛있는 게 말이죠. 핥아재낄때마다 굳어서 다시 칼로 후벼야 된다니까요?"
녀석은 자랑이라도 하듯 말을 계속 지껄였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표정을 관리한 채 타자를 두들겼다. 타다닥-거리는 타자 소리와 녀석의 말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피를 그렇게 다 쳐 먹고 나면 말이죠, 그때서야 고기가 생각나요. 근데 그게 씨발 진짜... 무거워요. 진짜. 너무 무거워서 질질 끌고 가다가도 열 받아서 그냥 쑤셔버리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 사냥한 뒤로는 캐리어 가방을 가지고 다녀요. 조금씩 썰어서 구겨 넣으면 어떻게든 들어가더라고요. 그 아까운 고기를 놓고 갈 순 없잖아요? 근데 씨발 진짜... 아-제가 원래 욕하고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때 개고생 한 것만 생각하면 진짜.... 저, 진짜 주위에서 사람들이 다 착하다고 그래요. 진짜예요. 중학생 때는 반장도 했고, 고등학교 땐 전교 부회장도 했었어요. 아아- 진짜..."
녀석은 회상에라도 빠진 듯 잠시 눈이 몽롱해졌다. 야이 개새끼야 하던 얘기나 계속해 씨발...
"하던 얘기나 계속해봐"
"아아-예. 그렇죠. 그러니까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아- 맞다. 그러니까 씨발 잘리기는 어찌나 안 잘리는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 조각내 놓고 캐리어에 넣어서 질질 끌고 가서 저희 집 냉장고에 떠억~하니 넣어둔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때서야 마음이 안정되는 거예요. 그게 먹지도 않은 고기들이 냉장고 안에 쌓여서 있는데 히야- 이게 얼마나 마음 뿌듯한지 몰라요. 그리고 그렇게 사냥을 한 날에는 뭐- 먹을까 고민할 것 없이 제일 싱싱한 고기를 꺼내서 요리해 먹는 거예요. 뼈는 대충 발라서 버리고 국도 끓여먹고- 구워서도 먹고- 히히히. 그러니까 매일 육식이라니까요? 제가 육식동물도 아니고- 근데 말이죠. 이 고기가 사람들이 진짜 맛있다고 자기들도 달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몇 명 건네줬더니 좋~다고 가져가고 히히히히히-. 아 진짜 그때가 제일 뿌듯하더라고요. 뭔가 남을 위해 헌신했다~이런 느낌? 어때요 경찰님도 하나 드릴..."
"야이 씨발새꺄"
나는 옆에 있던 연필꽂이를 녀석을 향해 던졌다. 빠악-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뒤로 나동그라지고, 나는 그제야 아 씨바-하는 생각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빌어먹을 씨발 좆같은 국가. 범죄자도 인권 찾는 개 같은 법이 어딨어 씨발.
나는 컴퓨터 옆에 놓인 사진을 바라봤다. 사진 속의 냉장고에는 조각조각난 시체가 가득히 차 있었다.
땅에 쓰러진 녀석이 버둥거리며 일어나 '그러니까 고기가 말이죠...'하는 소리가 무섭게 몸을 훑는다.
이별이란 지독한 후유증을 남겼다. 비극과도 같은 후유증은 날 천천히 좀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목을 옥죄는 듯한 고통은 실제로 날 죽이는 것만 같았다. 아찔해져 가는 심장의 통증들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건 아마 네가 남기고 간 마지막 저주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너에게 준 상처만큼 네가 나에게 주는 저주라고. 날 천천히 죽여가는 아주 고통스러운 저주라고.
이 고통스러운 후유증을 견뎌내고 잠에 들 때쯤이면, 지쳐 쓰러져, 더 이상 네가 남긴 저주와 같은 고통을 잊어버리고 잠에 들 때면. 난 드디어 네 얼굴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 떠나버린 네가, 기억해내려 애쓰고 심장을 억죄는 고통 속에서 너를 잊으려 할 때에도, 흐릿한 잔상처럼 남아있던 네 얼굴이 잠들 때에서야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건 마치 나에게 내리는 마지막 악몽과도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떠올랐던 네 얼굴은 아침이 되면 다시 흐려질 것을 알았기에.
넌 나에게 지독한 후유증만을 남기고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다시는 볼 수 없음에 나날이 흐려져가는 네 얼굴이 난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후유증은 내가 죽기 전까지 계속 날 괴롭힐 것만 같았다.
아침이 밝아 눈을 뜨면 그는 결정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뜨거운 불길에 자신을 밀어 넣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 그는 굳은살 베긴 손으로, 미싱사들을 다독이던 손으로 불길 속을 뛰며 소리를 질렀다. 기계가 아니라던 그의 외침은 타들어가는 그의 육신에서 평화시장을 가득 메웠다. 밤을 새워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읽어나가며, 눈을 뜨면 고사리 손으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위하여. 그는 그렇게 자신을 고난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루 16시간의 고된 노동을 겪어가면서도, 배고픔을, 굶주린 배를 움켜쥐어야만 했던,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은 없었다. 자기 몸집 불리기에 바빴던 돼지들에게, 빨갱이가 되어버린 그의 선택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의 몸을 불태워가며 노동자들의 인권을 혼자 짊어지며. 그는 그렇게 배를 굶주린 채 불길에 몸을 던졌다. 그는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야만 했다. 마음의 고향으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죽이고, 자신이 돌보지 않으면 안 될 나약한 생명들을 위해, 그는 외치었다. 불타는 심신으로 그는 외치었다.
예로부터 동족을 죽인다는 건 크나큰 금기였고, 시대가 흐른 지금까지도 그건 금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 그리고 살인. 여기서는 살인이라는 인간에 대한 초점보다는 동족 살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물계 척삭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의 사람, 흔히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동물이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말이지요.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는 많은 것들의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단순히 신진대사를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를 얻기 위한 포식 활동부터, 비를 피하고 추위에 맞서기 위한 파괴행위, 번식을 위해 하는 모든 치장에 따른 쓸데없는 가공 행위까지. 그 무엇하나 동족을 제외한 생물체들의 희생을 강요해왔습니다. 자-,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당신이 행하는 모든 포식 활동에 있어서 죄책감을 느끼고 계십니까? 글쎄요. 혹자는 동물 보호단체 따위를 행하고 있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곤 합니다만 그게 우리의 금기와 똑같은 수준으로 느껴지십니까?
자, 한번 우리를 동물이라 봅시다. 영장류와 분화되어 사람과에 속하는 호모 사피엔스가 되기까지, 우리는. 고릴라와 같은 영장류와 다를 바 없는 동물로 본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에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을, 그들에 대한 살해 행위를 우리는 금기라고 여기곤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금기를 왜 그들에게 적용시킬 수 없는 걸까요? 우리 종족이 살아남기 위해 남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포식 행위, 그로 인해 당연시되는 모든 감정들로 배제되는 걸까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동족 살해라는 그 행위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일까요? 금기라는 명칭까지 붙여가며 처벌하고 그들의 행위를 낙인찍는 것일까요. 사실 동물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동족을 죽인다는 행위 자체도 포식 활동을 하기 위해서 이뤄지는 작은 일들 중에 하나가 아닐까요.
자-, 우리는 서로 살해하는 행위에 대해 고찰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땅위에 존재하는 동물들 중 하나로써 우리의 생명은 사실 그리 고귀한 것이 아닐 거란 생각인 것이지요. 거기서부터 우리들은 생각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생존을 하는 것에 있어서 자신의 안위만큼 중요한 것이란 없습니다. 여러분, 죽이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 마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금기라 이름 붙여 우리의 자연스러운 모든 행위들에 대해 옥죄는 사슬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사슬을 풀어내고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금기를 깨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느 살인자의 연설 중
나는 단어와 문장과 글과, 그 속에서 느껴지는 느낌과 감성들에 명칭을 붙이는 게 싫다. 청춘의 사랑이야기가 어느 누군가의 마음을 간질이듯, 어깨 위 짊어지게 된 삶의 고난이 담긴 어른들의 이야기가 마음을 짓누르듯, 꺼져가는 어르신들의 생명에 대한 이야기가 먹먹하듯. 그들의 이야기를 그저 어떠한 명칭을 붙임으로써 퇴색되어가는 게 싫다. 아주 작은 사소한 그 명칭은 시를 시로써, 글을 글로써 읽어나가는 감정을 뭉뚱그려버린다. 그것은 일종의 비하와 멸시가 담긴 것으로써 풍부해져야 할 감성을 짖뭉개기에 충분했다.
사랑이야기가 마음을 간지럽히는 게 언제부터 오글 거리는 것이 되었나. 다른 이의 마음이 살랑 거리는 게 그리도 불편하였던가. 그들의 사랑이야기 속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을 텐데 그들은 그렇게 단정 지어버리는 것으로 더 이상 이런 이야기가 쓰일 수 없게 되었다. 글을 씀에 있어서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비굴한 일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오롯이 써 내려가야 하는 게 글이라면, 이렇게 별칭 지어진 감정들을 써 내려갈 수가 있는 것일까. 남들의 입에 거론될 그 감정들은 점점 사장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젊음이란 좋은 것이지, 언제든 어느 때곤 실패를 해도 되돌아갈 시간이 있단 얘기야. 저 절망의 끝에서 유턴할 시간은 우리네에겐 더 이상 없거든, 그래 얼마나 좋은 일이냔 말이야. 늙어빠진 이 몸뚱이를 움직이는 것도 관절의 한마디 한마디가 삐걱거리며 소리를 내지르는 것도 없는, 생각마저 둔해져 멍하니 있어야만 하는 우리와 달리 얼마나 좋냔 말이야. 그러니까 젊음은 좋은 것이지, 웃고 뛰고 울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 있다는 게. 죽음보다 삶이 더 가깝고 아직 살 날보다 살아갈 시간이 많다는 게. 즐기게 젊은이, 아직 시간은 많다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한 발 한 발 우직하게 옮기기만 한다면. 시간은 아직 많다네 젊은이. 앞으로의 세상은 자네들 것 아니겠나? 많은 시련과 고난과 슬픔이 있겠지만 두려울게 뭐 있나? 시간은 자네들 편일세"
"젊음이 뭐가 좋습니까. 당신네들처럼 돈만 많이 있다면 우리들보다 신나게 세상을 살 텐데 말입니다. 취직될까 결혼은 해야 할까 집은 구할 수 있을까 회사에서 잘리지는 않을까. 젊음은 아무짝에 쓸모없어요, 알았어요? 세상은 젊음 따위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니까요. 돈만 있어봐요, 절망에 떨어질 일도, 떨어지더라도 우리들보다 손쉽게 다시 올라갈걸요? 젊어서 고생은 무슨... 엿이나 처먹으라고 그래요. "
그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땅바닥이 가까워 옴으로써 그에게 내 생각을 전한다. 허리를 굽히는 각도에 따라 그의 마음이 흡족하게 바뀔 것이다. 허벅지에 붙인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난 잠시간 그가 나를 보며 자위할 수 있도록 허리를 굽힌 채 멈추었다. 자존심도 구부러져 땅으로 머리처럼 처박힌다. 굴욕감과 자존심은 반비례한다. 그리고 내 인사에 그의 흡족함은 미친 듯이 하늘을 향해 치솟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
그가 내 어깨를 두들겼다. 그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고 나서야 굽혔던 허리를 폈다. 뻐근한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다. 굴욕적인 감사는 그의 거만한 배려로 끝이 났다. 빌어먹을 일은 이렇게 간단히 정리가 되었다. 나 혼자 고개를 숙임으로써, 우리를 짓밟은 그에게 굴욕적인 감사를 함으로써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