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나에게도 슬럼프가 왔나 봐"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평소와 같은 한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에 가득 찬 당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파우치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나에게 내밀었다. 난 한숨을 쉬고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붙여주었다.
"잘 안되니까 재미가 없더라구, 닥터는 그런 적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흠-하는 콧소리를 내고는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담배부터 끊어요, 될 일도 안될 거 같은데"
"흥, 이 아이 없으면 아마 진작에 때려치웠을 거야"
"이젠 그 아이가 놓아주지 않겠죠"
내 말에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맞네 맞아, 이제는 이 녀석이 내 목줄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을걸?"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다시금 담배를 빨아들인다. 사실 나도 그녀가 끊으리란 생각은 없다. 몸에 딱 달라붙는 빨간 원피스, 하얀 살결. 그녀는 마치 장난처럼 자신의 몸을 과시했다. 자신에게 눈을 뗄 수 없게,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에게 눈을 돌릴 수 없도록. 그녀가 몸을 기울여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한다. 깊숙이 파인 원피스 사이로 그녀의 가슴골이 눈 앞으로 들이닥치는 기분이다. 난 애써 눈을 돌렸다.
"귀엽다니까, 닥터는"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곤 다시 차트를 살폈다. 십여 년간 지속적인 상승세를 그리던 그녀의 인기는 최근 들어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대기업이라 불리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몹시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등 뒤로 스치는 절망과도 같은 감정이 진료실을 가득 채웠다.
"이제 그만하려구, 위에 있어야 재밌잖아? 아냐 닥터, 당신 탓은 아니니까. 이만 갈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걸친 코트를 집어 들고 진료실을 나섰다. 난 그녀의 처방전을 미처 작성을 다하지 못한 채 앉아있었다. 그녀 다운 당당한 표정과 행동 뒤로 드리워진 어두운 감정에, 의사로서 그러면 안되면서도 그녀의 말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건 어찌 보면 거부할 수 없는 암흑과 같았다. 어떤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면서도 난 그 어둠을 놓아주고 말았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를 뒤덮었던 어둠은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슬럼프와 어울리진 않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정상에서 고고하게 바라보는 게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난 어쩐지 그녀의 죽음에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매료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