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혈기 넘치는 대학생이었고, 여느 대학생이 그렇듯 젊음을 불태울 일을 찾아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태양이 아마 우리를 쪄 죽이리라 생각했던 그 여름날, 친구들과 나는 바다로 향했다. 남자들만 있는 대학 친구들의 바다 여행이란 결국 다 젊음을 허비하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술과 노래와 여자, 모두의 목표는 그것이었고, 그 일을 위해 다들 밤이 되길 기다렸다. 오늘은 드디어 딱지 뗀다는 헛된 기대감과 저질스런 얘기들이 이어졌다. 마치 오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한 것처럼.

밤바다는 어찌 보면 짐승들의 구애 현장과 다를 바 없었다. 공작새는 멋진 꼬리깃을 펼쳐 암컷에게 구애한다. 화려한 생김새는 암컷을 유혹하기 충분했다. 다른 수컷 놈들도 서서히 암컷을 낚아채 제 둥지로 쏙쏙 숨어 들어갔다. 그에 비해 우리는 닭,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볼품없이 옆으로 쓰러지는 빨간 벼슬만 가진채, 있는 것도 없이 목소리만 울려대는 볼품없는 닭들.

우리는 바다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주저앉았다. 그렇게 우리의 젊음을 공쳤다는 생각에 씁쓸함이 몰려왔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끼리 밤바다를 무대 삼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얼큰하게 들어간 술기운은 다시금 맥락 없는 용기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나는 술기운을 벗 삼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친구들은 내 실패를 확신하며 비웃을 준비를 하며 나를 미리 놀려댔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그때의 난 확신에 차 있었다. 혼자 가면 가능할 것이다. 혼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면. 난 무작정 밤바다를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결국 나의 자만이었을 뿐, 난 수많은 퇴짜를 경험했다. 얼큰하게 올랐던 술이 깨어갈 때쯤, 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시도해보기로 했다.

검은 생머리에 붉은 뷔스티에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밤바다의 바다에 발을 담근 채 서 있었다. 검은 생머리가 별빛을 반사시키는 것처럼 반짝였다. 난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아직 돌아가지 않은 술기운을 억지로 붙잡아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서울에서라면 내가 감히 말도 못 붙일 정도의 미인이란 걸. 그리고 마음속 언저리 어딘가에서 말을 걸면 안 된다는 불편한 생각이 두둥실 떠올랐다.

하지만 난 이미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저랑 술이나 한잔 하실래요?"

그녀는 천천히 검은 생머리가 미동도 않을 정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칠흑 같이 어두운 그 눈은 날 가만히 바라보다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빨간 혀가 입술을 핥았다. 저 입술에 입 맞출 수 있다면. 마음속 언저리 어딘가에 있던 불편한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그녀는 가벼이 말하고는 내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맞잡은 채 나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발목에 넘실대는 파도는 어느새 무릎으로, 허벅지를 넘어서 허리를, 가슴을 지나 목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난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목 밑까지 차오른 별빛이 눈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나를 더욱 잡아당겼다.

그리고 난 그때가 되어서야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나보다 작았을 그녀는 아직도 가슴 언저리만 밤바다에 잠긴 채 날 당기고 있었다. 목을 넘어 턱에 넘실거리던 밤바다는 이내 날 집어삼켰다. 내 기억 속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가 허우적 대는걸, 기괴하게 꺾인 목 각도로 똑바로 선차로 웃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다행히도 난 극적으로 친구들에 의해 구해졌다.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난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바다로 바다로 걸어갔다고 한다. 난 술을 많이 마신 걸까? 아니면 귀신에게라도 홀린 것일까. 어찌 됐든 그 날 이후로 난 밤바다에 가지 않는다.

지금도 생각나는 그녀의 모습이 날 언젠가 밤바다로 끌고 갈 것 같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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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