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죄인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무릎을 꿇었다. 사실 우리들로써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리고 왜 우리에게 사죄를 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최근 들어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는 들었으나, 그의 눈에는 어떠한 진정성도 담겨 있었기에 우리는 그를 말릴 수 조차 없었다. 그는 자신을 일으키려는 비서의 행동을 저지하고는 머리를 숙였다. 백발의 노인이 우리에게 사죄를 할 일이라 무엇이 있을까. 심지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유명항 독립운동가이며 독립운동 역사관이라는 박물관을 만든 사람이.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우리의 얼굴을 살피고, 주변의 전시품들을 살폈다. 마치 그의 남은 인생 동안 모든 기억을 끄집어내는 모습 같았다. 이윽고 그의 메마른 입술에서 거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약간은 흐느끼듯 또는 부끄러운 그런 목소리로.
"저는 당신들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분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또 우리 민족을 팔아먹은 죄인입니다"
이윽고 이어진 그의 말은 우리를 침묵에 휩싸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는 독립운동가가 아닙니다. 저의 이름은... 그러니까 저는 김성복이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전중철, 우리 민족을 고문하고 짓밟고 팔아넘긴 사람입니다."
김성복, 아니 전중철은 고개 숙여 흐느끼며 말을 함에도, 그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그 자신의 진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떠한 맹세라도 한 듯 아직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우리의 얼굴을 표정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눈에서 흐르던 눈물을 닦아내고 입을 열었다.
"저의 이야기를, 아니 본래 김성복이었을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합니다. 김성복은 본래의 독립운동가인 김성복으로, 전중철, 아니 다나카 테츠는 본래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의 모습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전중철은 잠시간 숨을 고르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김성복을 만난 건 제가 순사부장으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저는 상부로부터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에 합류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 당시의 김성복은 조선총독부를 폭파할 계획을 가진 무력단체의 단장으로 있었습니다."
전중철의 눈이 전시품들을 향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내는 듯 입술을 꽉 물었다. 그는 마치 하나라도 놓치어 설명하면 안 되는 의무라도 쥔 것처럼 굴었다.
"저는 몇 번의 협력과 그들과의 공조로 그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습니다. 김성복은 언제든지 당장 폭탄을 들고 뛰쳐나갈 기세였습니다. 다른 독립 무력단체의 단장들과는 다르게 그는 항상 최전선에 있길 바랬습니다. 단원들과 한 몸, 한날 한뜻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고 죽기를 바라 왔지요. 거사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저를 포함한 단원 3명과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말을 멈추었다. 전시품들을 향했던 눈이 다시금 땅을 향했다.
"전 그들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들로써는 그때의 상황에서도 조선총독부로 향하는 걸음을 옮기려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을 잡아넣을 수 있었습니다. 총을 맞으며 수많은 사람에게 휩싸여 몰매를 맞으며 그들은 허망하게 조선총독부의 근처도 가지 못한 채 끌려가야 했습니다... 김성복은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습니다. 손톱과 발톱이 뽑히고, 생 이빨이 뽑히는 건 아주 작은 고통에 불과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고 그와 함께 끌려온 단원들이 모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건장했단 김성복도 한없이 야위어 독방의 벽 구석에 기대어 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하려 애쓰는 듯했다. 나를 비롯한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저를 부르더군요. '전중철 동지 나와 내기 하나 하지 않겠냐'며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는 그러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저를 동지라 부르기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그는 제가 그 동지라는 말에 멈출 것을 확신한 것만 같았습니다. 그의 내기란 제가 그에게 고문을 하며 했던 말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만약에 조선이 독립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자손들을 위해 일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그는 독립은 결단코 될 것이며, 독립운동가와 그와 같은 무력단체의 후손들은 경원시당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측이심이 될 것을 알았던 셈이지요. 그때의 저는 독립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만, 김성복은 확신에 찬 말투였습니다. 그리고는 독립이 되지 않았을 때에는, 구천에 떠도는 귀신이 되어 절 저주할 일은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며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리곤 자신은 가족도 다 죽었으며, 자신을 아는 단원들도 여기서 숨을 거뒀으니, 원한다면 이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김성복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내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그는 아마 자신이 죽을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일 이후로 며칠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습니다'
전중철은 거기까지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참을 무릎 꿇고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웃기게도 그렇게도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독립은 왔습니다. 그리고 기억 속에 잊고 지내던 그가 한 말이 마치 메아리처럼, 눈덩이처럼 머리 속에서 점점 몸집을 불렸습니다. 웃기게도 전 그가 일방적으로 정한 내기에 응하고 말았던 거지요. 전 김성복으로 살기로 했습니다. 그건 그가 남기고 간 작은 복수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죽음에서도 초연한 그가 바라는 것은 독립이었으며, 그의 후손들을 위한 죽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복수의 작은 불꽃은 저를, 전중철을, 다나카 테츠를 욕하고 때리고 불태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요. 그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팔아넘겨 번 돈으로 그들의 후손을 돕는 셈이었으니까요"
그는 그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여기 이렇게 여러분께 지금에 와서야, 아주 뒤늦은 지금에 와서야 말하는 저를 용서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전중철은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를 비롯한 그가 후원한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은, 그를 비난할 수도,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못하는 이 상황을 황망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