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달'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18.07.19 아버지.
  2. 2018.07.18 신뢰.
  3. 2018.07.18 서울.
  4. 2018.07.18 슬럼프.
  5. 2018.07.12 눈길.
  6. 2018.07.12 방황.
  7. 2018.07.12 거울.
  8. 2018.07.12 너.

거친 손을 내밀며 미소 짓는다. 등 뒤에 떠오른 햇빛에 눈이 부신다. 그 모습이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아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손을 내밀어 그 거친 손을 잡는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거친 손. 움켜쥐듯이 나의 손을 쥐고는 잡아끌어 일으킨다. 나는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낸다. 아버지는 내 머리에 손을 올려 한번 쓰다듬고는 등을 돌린다. 별 다른 말은 없다. 넓은 어깨, 커다란 등. 듬직한 아버지. 나의 아버지. 말이 없는 과묵한 나의 아버지. 따뜻한 미소로 웃어주는 나의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다. 삼촌의 말을 들어보면, 어머니가 나를 낳다 돌아가셨을 때부터라고 하셨다. 항상 과묵한 아버지. 그러나 어디서나 열심히 일하시는 아버지. 무심코 찾아간 아버지의 직장, 공사판. 흔히 말하는 노가다의 인부. 아버지는 무거운 회색 벽돌을 어깨에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고 계셨다. 노란 철모 밑으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까맣게 타버린, 거칠어져 버린 피부 위로 땀방울이 흘렀다. 아버지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나 하나를 키우기 위해 아버지는 힘이 들면 안 되었다. 아프면 안 되었다. 언제나 똑같이, 성실히 일하셔야 했다. 힘든 집안, 죽을 둥 살 둥 벌어도, 새어나가는 돈들. 빌어먹을 돈. 돈돈돈. 언제나 우리의 목을 죄어오는 돈. 아버지의 입을 더욱 굳게 다물게 했던 돈. 아버지는 말이 더욱 없어지셨다. 하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일을 나가셨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독감에 걸린 몸으로, 펄펄 열이 끓는 몸으로 벽돌을 옮기셨다. 내가 다리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할 때도, 아버지는 그 크고 거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뿐이었다. 단 한마디 말씀 없이 아버지는 또 일을 하러 나가셨다. 덜덜 떨리는 손발로 벽돌을 옮기고 치밀어 오르는 거친 숨을 골라야 하셨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나의 우상. 나의 위인. 나의 단 하나뿐인 영웅, 아버지. 말이 없으신 나의 아버지.

나는 성공해야 했다. 아버지를 위해서. 나의 하나뿐인 영웅을 위해서. 미친 듯이 공부했다. 다른 친구들과 놀 시간 따위는 없었다. 공부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 코피를 쏟고 몸살이 나도 책을 놓지 않았다. 나에겐 공부뿐이었다. 아버지의 희망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난, 성공했다. 성공? 그래, 아마 성공했었다. 나는 대기업에 들어갔고, 어느 동창 부럽지 않게 돈을 벌었다. 20대 중반이 안된 젊은 나이에 외제차에 집까지 있었다. 난 그때나 돼서야 내가 먼저 거칠고 주름진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는 그저 웃으셨다.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이젠 힘들게 일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에도 아버지는 고개만 저었다. 아버지는 내가 대기업에 들어간 뒤에도 공사판을 나가셨다. 언제나처럼 노란 철모에 벽돌을 짊어지고.

그리고 나는 내 젊은 성공에 방심했다. 친구에게-그나마 몇 되지 않는 친구였지만- 서준 보증. 순식간에 내 목을 다시 죄어오는 돈. 사방에서 날아드는 붉은 딱지. 피를 말리는 붉은 딱지. 사방을 물들이는 붉은 딱지. 붉은 돈. 아버지는 온통 빨갛게 물들어버린 방안에서, 그 거친 손으로 붉은 딱지 하나를 메만지셨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서 계셨다. 나는 차마 아버지를 제대로 볼 수 조차 없어서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친 아버지의 숨소리, 심장을 욱신거리게 하는 거친 한숨소리. 아버지는 터벅-거리는 메마른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어떻게 얻은 돈인데, 아버지께 자랑하고 싶었던 내 모습이었는데.

나는 집을 나섰다. 검은 하늘, 조그맣게 떠오른 별들 몇 개. 한참을 걸었다. 몇 시간을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멓던 하늘은 어느새 옅어지고 있었다. 세상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다리가 아파왔다. 근처 놀이공원의 바닥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동이 터오는 하늘, 주변에서 짹짹거리는 참새 몇 마리. 멀리서 들려오는 가정집들의 알람 소리. 그리고 내 눈앞에 드리워진 그림자.

아버지,

"일어나라, 가자"

거친 손을 내밀며 미소 짓는다. 언제나 그렇듯 타박하지 않고 별다른 이야기 없이 손을 내민다. 밤새 그리워진 아버지의 눈 밑엔 아직 눈물 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채 반달 눈웃음을 그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다시 날 위해 먹먹한 웃음을 터트렸다. 등 뒤로 떠오른 햇빛에 눈이 부시다. 거친 손이 내 손을 잡는다.

아버지, 나의 영웅의 웃음에 일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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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신뢰란 매미의 허물과도 같다. 일평생 고이 간직해오다 일순간, 어떤 상황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점에 벗어던져져 땅에 바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너무나 허무하게 여름날 땅에 바스러져 발에 밟히고 바람에 흩날려 먼지가 되어 하늘을 부유하듯.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매미처럼 사라진 신뢰를 버리고 울음을 터트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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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모든 사람이 바빠"

그렇게 말하며 넌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난 잠시 너의 말에 끊기어진 전화만 잠시 바라보았다. 마치 바쁜 서울 사람들 틈에서 나만 동떨어진 채 느리고 게으르며 무료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느껴진다. 전화를 땅에 내려놓았다. 해가 지고 있다. 나의 아침은 해가 정오를 넘어서 땅거미에 가까울 즈음에 시작하여, 해가 떠오를 때에 밤이 되곤 했다. 이 사이클은 웃기게도 고착화되어서 이제는 이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난 너의 질타 섞인 목소리에 오늘도 텄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술 한잔 얻어먹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각박한 서울이라지만 점점 더 숨통을 메어오는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 지내는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빛 조차 들지 않는 답답한 고시원에서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난 점점 나와 쥐를 동일시했다. 어둠 속에 숨어서, 조그만 굴 방 안에서, 누군가가 흘린 부스러기만을 도둑처럼 몰래 먹어대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거북한 존재감만을 내뿜는 그런 존재. 난 점점 서울의 지박령처럼, 더러운 악취만을 내뿜게 되는 그런 쥐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나도 성공을 바랄 때가 있었다. 이 어둠에 스스로를 처 밀어 넣고 작은 독방에 날 가둔지 1년. 곯아가는 육신을 다그치며 또다시 1년. 이번엔 될 거야 이번만은 성공하겠지 헛된 희망 속에 1년. 난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퇴실 소식은 어떨 때는 나도 그들처럼 될 거라는 희망을, 어떤 때는 나도 그들처럼 그늘로 숨어드는 쥐처럼 될 거라는 절망을 주곤 했다. 난 담배를 손에 든 채 옥상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서울은 하늘에 별이 없다. 빌어먹게도 길거리의 조명들이 별빛을 대신에 깜빡거리고 있다. 고개를 들면 어둠이 고개를 숙이면 빛이 반겨준다. 서울 이곳에선 고개를 숙여야만 빛이라도 볼 수 있다. 저 바닥의 불빛들은 죄다 서둘러 점멸하며 서둘러 발길을 움직인다. 난 땅을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빨간 담뱃불은 바닥으로 떨어져 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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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나에게도 슬럼프가 왔나 봐"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평소와 같은 한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에 가득 찬 당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파우치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나에게 내밀었다. 난 한숨을 쉬고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붙여주었다.

"잘 안되니까 재미가 없더라구, 닥터는 그런 적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흠-하는 콧소리를 내고는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담배부터 끊어요, 될 일도 안될 거 같은데"

"흥, 이 아이 없으면 아마 진작에 때려치웠을 거야"

"이젠 그 아이가 놓아주지 않겠죠"

내 말에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맞네 맞아, 이제는 이 녀석이 내 목줄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을걸?"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다시금 담배를 빨아들인다. 사실 나도 그녀가 끊으리란 생각은 없다. 몸에 딱 달라붙는 빨간 원피스, 하얀 살결. 그녀는 마치 장난처럼 자신의 몸을 과시했다. 자신에게 눈을 뗄 수 없게,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에게 눈을 돌릴 수 없도록. 그녀가 몸을 기울여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한다. 깊숙이 파인 원피스 사이로 그녀의 가슴골이 눈 앞으로 들이닥치는 기분이다. 난 애써 눈을 돌렸다.

"귀엽다니까, 닥터는"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곤 다시 차트를 살폈다. 십여 년간 지속적인 상승세를 그리던 그녀의 인기는 최근 들어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대기업이라 불리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몹시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등 뒤로 스치는 절망과도 같은 감정이 진료실을 가득 채웠다.

"이제 그만하려구, 위에 있어야 재밌잖아? 아냐 닥터, 당신 탓은 아니니까. 이만 갈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걸친 코트를 집어 들고 진료실을 나섰다. 난 그녀의 처방전을 미처 작성을 다하지 못한 채 앉아있었다. 그녀 다운 당당한 표정과 행동 뒤로 드리워진 어두운 감정에, 의사로서 그러면 안되면서도 그녀의 말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건 어찌 보면 거부할 수 없는 암흑과 같았다. 어떤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면서도 난 그 어둠을 놓아주고 말았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를 뒤덮었던 어둠은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슬럼프와 어울리진 않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정상에서 고고하게 바라보는 게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난 어쩐지 그녀의 죽음에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매료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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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눈이 내렸다. 아직 해가 뜨기 전,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바라본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눈길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가만히 바라보다 얇은 점퍼 하나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간다. 뽀드득-하는 소리가 쓸쓸하게 골목길을 메아리친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 그 위에 내 발자국을 남긴다. 내가 처음이라는 사실에 괜히 기분이 설렌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서 내가 만든 발자국. 노란 입김이 이리저리 퍼진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너와 같이 걸었던 그날인 것만 같다.

이리저리 장난치듯 걸은 발자국 하나하나가- 너와 있던 그날인 것만 같다.

그 날인 것만 같아서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흐른다. 너와 있던 눈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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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하늘 아래로 검은 해가 빛을 뿌리고 있다. 땅 위로 뻗어있는 노오란 나무들. 잎사귀 끝에 걸린 동그랗고 붉은 열매가 땅을 향해 떨어진다. 파아란 땅에 붉은 열매가 떨어진다. 붉은 열매는 몇 번이고 꿈틀꿈틀, 살아있는 것마냥 움직이더니 이윽고 붉은 껍질을 깨고 녹색 손을 내뻗는다. 작은 아이의 손. 너무나도 작은 그 아이의 손은 붉은색 껍질을 깨어내고, 이윽고 파란 땅에 발을 내딛는다. 소년- 혹은 소녀. 성을 알 수 없는 그 아이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하나 싶더니, 이윽고 달리기 시작했다. 검은 햇빛을 받으며 아이는 달리었다. 달릴수록 아이의 다리는 자라고, 몸은 커지었으며 팔은 길어졌다.

민둥민둥했던 머리는 어느새 하이얀 머리가 허리춤까지 자라났다. 아이는 자신의 몸이 변화했다는 것을 느끼자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리곤 자신의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힘이 세진 것이 느껴진다. 몸이 방금 전과는 다르게 움직이기 쉽다는 것을 느꼈다. 언제 어디고 어느 곳까지, 자신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아이는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하늘을 향해 뜀박질한다. 곧이어 다가오는 통증- 아니 희열. 순간순간 오가는 감각에 아이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다시 뛰어오른다. 하늘을 향해 몸을 날린다. 에메랄드빛 날개가 등에서 솟아오르고 아이는 보랏빛 하늘을 가로지른다. 하늘색 구름을 가로지르고 검은 태양빛에 눈을 가리며. 아이는 생각했다. 나는 누구지? 난 누굴까? 나는 왜 태어난 걸까? 아이는 날갯짓을 멈추고 땅을 살핀다. 파란 하늘 위로 솟아오른 갖가지 꽃들, 나무들, 그리고 그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작은 동물들. 아이는 파란 땅에 있는 작은 동물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작은 동물아, 넌 누구니?"

"나? 나는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이지"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땅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이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두 개의 머리를 끄덕거렸다. 한쪽에만 달린 눈이 빙긋 웃는다.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아. 넌 누구니?"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은 등에 달린 입을 오물거렸다.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세 개의 손으로 두 개의 머리를 긁적거린다. 한 개의 눈이 이리저리 대답할 말을 생각해낸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여섯 개의 다리로 땅을 굴렀다. 땅이 비명을 지르듯 쿠구구구구궁-하는 소리를 만들어낸다.

"나는 여섯 개의 다리로 땅을 달려 세상이 넓다는 것을 증명할 거고, 세 개의 손으로 많은 물건을 쥘 테지. 두 개의 머리로 사고하며, 등에 달린 입으로 남에게 보이지 않는 말을 하겠지"

대답이 되지 않아. 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는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을 뒤로하고 날개를 움직였다.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동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다시 날갯짓을 멈추고 물었다.

"저기 앉아있는 동물아, 넌 누구니?"

"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동물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동물은 그저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동물도 대답이 되지 않아. 이 세상에서 나는 왜 태어난 걸까? 나는 무슨 이유로, 어떤 존재가치로 이 곳에 있는 것일까. 나는... 아이는 날개를 퍼덕였다. 에메랄드 빛 날개 하나가 파란 땅을 향해 떨어지고 파란 땅위의 수많은 동물들은 아이의 날개를 향해 몸을 옮겼다. 아이는 잠시 멈추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간의 다툼, 소란 이윽고 아이의 날개를 손에 쥔 작은 동물 하나가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아이야, 넌 누구니?"

"나? 나는 하늘을 나는 아이지"

"그래, 하늘을 나는 아이야. 너는 누구니?"

다시 들려온 그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이얀 머리를 손으로 긁는다. 녹색 얼굴이 잠깐 찌푸려진다.

"나는 하늘을 날며 나를 찾는 아이야"

"그래, 하늘을 날며 너를 찾는 아이야. 넌 누구지?"

"하늘을 날며 나를 찾고 세상에서 내가 있을 곳을 찾는 아이야"

"그래. 하늘을 날며 너를 찾고 세상에서 네가 있을 곳을 찾는 아이야. 넌 누구야?"

아이는 대답하기에 지쳤다. 밑에서 들려오는 끊임없는 똑같은 질문, 대답. 그리고 이어지는 의문. 아이는 생각했다. 나는 누구지? 나는 하늘을 나는 아이. 나는 누구지? 하늘을 날며 나를 찾는 아이. 나는 누구지? 하늘을 날며 나를 찾고, 세상에서 자신이 있을 것을 찾는 아이. 난 누구지? 난 누구지? 난 누구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는 한 가지 점점 깨달아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지? 나는 나. 나는 누구지? 하늘을 나는 나. 나는 누구지? 자신을 찾는 나. 나는 누구지? 내가 있을 곳을 찾는 나. 모두 다 나, 자신. 아이는 검은 하늘을 향해 몸을 날린다. 보랏빛 하늘에 녹색 섬광이 스치고- 검은빛이 내리쬔다. 나는 나다. 아이는 아이다. 쉼 없이 고민해도 쉼 없이 자신을 찾으려 해도 자신은 모두 다 같은 자신. 그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아이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일터다.

검은 태양에 닿은 손이 하얀 손으로 변한다. 하늘은 파래지고, 땅은 푸르러지며, 녹색 잎들이 자라난다. 아이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 세상은 다시금 원래의 빛깔을 찾는다. 아이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하늘을 날며 자신을 찾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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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울고, 너에게 너희들에게 모두에게 보일 수 있는 얼굴로. 가면을 갈아치우듯이 얼굴을 바꾸고, 표정을 바꾸며 사람을 상대하고. 사람과 얘기하며 사람과의 소통을 이어간다. 언제나 나는 내 얼굴을 감춘채-. 진짜 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너와 너희들과 모두에게 미움받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적당히 조용히 무리에 섞여 들어갈 수 있게. 쉽게 말하면 이건 게임이다. 각 사람 한 명은 하나의 문제가 되고, 난 그 문제에 맞는 답- 표정을 지으면 된다. 그것은 생각보다 쉬운 작업이라서 이것만 잘해준다면 모든 문제를 풀고 승리할 수 있다. 게임에서 나는 이길 수 있다. 언제나처럼 이길 수 있어야 했다.

"거짓~말."

"응?"

"네가 하는 말 거짓말이란 거 알고 있어. 어차피 지키지 않을 약속 하지 마"

답을 틀렸다. 나는 처음 겪는 상황에 잠시 곤혹스러웠다. 내 앞에 있는 이 녀석이, 별 것 아닌 이 녀석이. 내가 승리해오던 게임을 멈추었다. 잠시 스코어는 0:1. 정답률은 99%. 1포인트 하락했습니다. 경고 경고- 수많은 알림음, 띵띵-하는 비프음이 머릿속을 울린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나는 언제나처럼 다른 녀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녀석에게도 승리할 수 있어야 했다. 이건 내가 이기는 게임이고, 나만이 승리자고,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 머릿속을 뒤흔드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승자일 수밖에 없는 이 게임에서 나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한 녀석. 나는 잠시 멍-한 채로 녀석을 노려본다.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한발, 몸을 들이밀었다. 얼굴을 둘러싸고 있는 가면에 지지직- 금 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기는 게임인데. 분명히. 나의 표정을 바라보던 녀석이 씩-웃는다. 그리곤 손을 뻗어 가슴을 밀친다. 탁-하는 가벼운 소리. 그와 함께 후드득- 떨어지는 나의 가면. 나의 표정. 내 얼굴'들'. 바닥에 유리조각처럼 떨어진 표정들은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깨진 채로 날 노려본다. 화난 눈이 날 노려보고, 웃는 눈이 비실비실 웃고 있다. 하품하는 입이 혓바닥을 내보이고. 잔뜩 일그러진 입술에서 짜증이 샘솟는다. 이리저리 갈라진 얼굴들 날 바라보는 표정들. 깨져버린 내 표정들은 날 쳐다보고 있다. 나는 머리를 털어내 애써 내 표정들을 지워낸다. 간신히 생각해낸 얼굴 표정 하나를 억지로 지어낸다.

눈은 웃자. 반달 모양으로. 실눈으로 사라지게. 그래. 입은 그래.입꼬리를살짝.조금만더?조금더?아니.너무올린건가?내릴까.그래-내리자.코는찡긋.아니아닌가.그래그럼가만히있을까.고개는갸웃?아니그냥있자아니움직일까아니움직이는게좋을까어떻게하지.

문득 앞을 바라보자 녀석이 내 표정을 따라 하는지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모든 근육들이 따로 움직이는 듯한 녀석의 얼굴에. 나도 똑같이 표정을 짓는다.

거울 속 나는 기괴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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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단 둘이 앉아 얼굴을 마주 보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너의 목소리에 취해서. 카페에 단둘이 앉아, 가끔은 알아들을 수 없는 팝송을 흥얼거려보기도 하고, 때로는 달달한 노래가 마치 우리 노래인냥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고 싶다. 너의 숨결이 내 뺨에 와 닿고, 내 붉어진 뺨에 너의 입술이 닿고. 당황한 내 얼굴에 너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가끔은 서로만 알아들을 수 있는 암호를 풀어내며, 다른 사람 몰래 사랑을 나누고 싶다. 아무런 것도 하지 않고 서로 눈을 맞추고, 음료수 하나에 빨대 두 개. 너 몰래 바람을 불어넣어 거품을 만들고. 너도 반달 눈웃음으로 거품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너와 있고 싶다.

달빛 부서지는 옥상에 앉아, 반짝이는 별들을 조명삼아. 꿈을 꾸는 달빛요정이 우리의 위에 내려앉고. 포근한 달빛을 이불 삼아 잠에 들고.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너와 잠들고 싶다. 창가에 아기 햇살 내려앉고, 짹짹거리는 참새 소리에 잠에서 깨고. 내 옆에 누워있는 너의 얼굴을 보며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쓸어내리고 발그레한 너의 뺨에 입맞춤하고, 너는 잠에서 깨어 입을 맞추고 싶다. 아침을 그렇게 너와 마주하고 싶다. 일어나기 싫어 앙탈 부리는 너를 끌어안고. 내 가슴에 안긴 너의 심장소리를 듣고. 두근거리는 소리에 다시 너와 나는 잠에 들고.

그렇게 하루를 너와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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