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담기 위해 작은 병을 사 왔습니다. 오늘의 후덥지근한 날씨를 기억하려, 오랜 시간 차 안에 방치되어있던 물을 담았습니다. 차 안에서 달궈진 물은 뜨겁게 병을 덥혔습니다. 이 온도는 오래가지 않겠지만 그때의 기억은 병 안에 담기겠지요. 그때의 기억과 뜨거운 그날의 날씨를 담은 채로. 작은 병의 날씨가 선선해질 때가 되어서야 작은 병을 책장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책장의 한 구석엔 그렇게 모은 기억들이 색색을 발하고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 처음 가보았던 푸른 백사장의 모래가 담긴 병을 시작으로, 내 기억들의 단편은 하나둘씩 늘어갑니다.
슬픔이 담긴 병은 시간이 흐르고 눈물은 풍화되고 기억이 흐려져,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되뇔 수 있겠지요. 기쁨이 담긴 병은 시간이 흐르고 험난한 현실에 지쳤을 때 추억이 되어줍니다.
오늘의 슬픈 기억도 이 작은 병에서 언젠가는 흐려지겠지요.
'다섯달'에 해당되는 글 28건
사방에서 폭발음이 들린다. 우현은 철모를 깊게 눌러쓰고 참호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후드득-하는 빗방울 소리가 철모를 때린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시야가 흐리다. 저 멀리서 「죽어 이 개시키들아!!!」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지만, 곧 폭발음에 사라진다. 우현은 자신의 옆에 몸을 숙이고 조용히 앉아있는 이석우 상병을 바라봤다. 아무런 표정 없이 주머니에서 잔뜩 불은 육포 조각을 꺼내 입에 털어놓고 있다.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육포를 건네는 시늉을 한다. 우현이 고개를 가로젓자, 석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남은 육포를 입에 다 털어 넣는다.
"먹어야 사는겨 인마-"
"많이 드십쇼"
석우는 피식 웃는다. 철모를 꾹 눌러쓰고 주변을 살핀다. 폭발음이 멈춘 걸 보니 주변의 아군은 전멸- 혹은 은엄폐. 죽지만 않았으면 좋을 텐데. 우현은 가능성 낮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석우는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줄 알고 있었다. 방금 전 목소리-.
아마 김하사 목소리였을 거다.
이빨이 몇 개 깨져서 발음이 새는 김하사, 그놈의 개시키하는 발음이 귀에 맴돈다. 빌어먹을 폭음 속에서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때부터 속이 너무 허했다. 배고프다. 주변을 살피면서도 주머니에 다른 먹을 게 없나 뒤적거렸다. 시펄-없구먼? 가벼운 욕지기를 내뱉고는 참호를 기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변에 떨어진 주인모를 군장을 뒤적거린다. 곧 손에 건빵 하나가 들려 나왔다.
"에이씨 또 건빵이고"
그러면서도 봉지를 뜯어 입안에 털어 넣는다. 와그작와그작 하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힌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건빵을 씹어 삼킨다. 아마 여기서 살아 돌아가긴 힘들 거다. 빌어먹을, 개죽음이네.
"우현아-"
"예"
"넌 꼭 살어~"
"예"
한동안 석우는 말없이 건빵만 씹었다. 봉지 속의 건빵이 비에 젖어 뭉개질 때쯤 되어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얼굴엔 왠지 모를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철모를 눌러쓰고는 잔뜩 움츠린 우현의 철모를 후려쳤다. 딱-하는 소리에 우현이 석우를 노려본다.
"뭔 짓입니까. 소리가 들리면..."
"가자-. 여서 죽든 저서 죽든 넌 살릴꺼니께"
석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소총을 한발. 타아앙-하는 소리가 사방을 울린다. 다시금 알 수 없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석우는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반대로 뛰그라!!"
우현은 움직이지도, 그렇다고 말리지도 못한 채 멀어지는 석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빗속에서 다시 한번-.
"뛰그라 개자식아!!!"
석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현은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콰앙-하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온다. 땅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몸의 균형을 채 바로잡기도 전에 땅을 뒹군다. 철모가 코를 때리고는 바닥을 뒹군다. 왈칵-하고 피가 쏟아진다.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몸을 일으킨다. 흙을 뒤집어쓴 철모를 다시 눌러쓴다. 죽을 수 없다. 여기서 죽을 수 없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죽어서는 안 된다. 다리를 움직여. 뛰어. 귀를 때리는 폭발 소리에도 선명하게 말소리가 파고들었다.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자. 여서 죽든 저서 죽든 너는 살릴꺼니께]
[먹어야 사는겨-]
"저기요, 나랑 자고 싶어요?"
당돌한 꼬마다. 아니- 꼬마라고 보긴 어려운가? 슬쩍 위아래로 훑어보니, 볼록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이쁜 힙라인이 눈에 들어온다. 꽤나 성숙한 몸이다. 얼굴은 완전 애인데... 내가 잠시 대답이 없자 꼬마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툭 찌른다. 그리고는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짓는다. 초승달처럼 사라지는 눈웃음이 매력적이다. 어딘가 많이 본, 매력적인 얼굴이다. 연예인을 닮았나? 잠시 기억을 뒤적여보지만 딱히 생각나는 배우는 없다.
"위아래로 훑어보지만 말고 말해봐요"
아-. 훑어보는 게 티 났나?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꼬마는 그 반응을 보더니 잠시 고개를 까딱까딱. 그러고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펴더니 쭉-내밀었다. 그리고는 장난치듯 손을 쥐었다폇다하며 눈앞에서 흔들어댄다. 내가 그 손을 잡고 끌어내리자 다시 씩-웃는다.
"어때요? 이렇게 싸게 하는 곳도 없고, 솔직히 아저씨 생긴 게 괜찮은 편이라 나도 싸게 해주는 거예요. 아무래도 나도 조금이라도 잘생긴 남자랑 하는 게 좋으니까, 어때요?"
잠시 그녀의 말에 피식 웃었다. 뭐 그래도 상관없겠지. 다섯 장이면 엄청 싼 편이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꼬마는 '낙찰-'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손바닥을 짝-소리 나게 부딪혔다.
"저기요 저 가기 전에 술 좀 사줘요"
그렇게 말하고는 편의점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안주거리 몇 개를 집어 들고는 나에게 건넨다. 나는 어정쩡한 폼으로 안주를 안고, 소주 몇 병을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간단한 신분증 검사-는 개뿔. 사십 대의 남자에게 신분증 검사를 하는 놈이 미친놈일 테지. 카드를 건네어 계산을 마치고는 편의점을 나간다. 꼬마는 앞에서 걸어가며 이 얘기 저 얘기 조잘거린다. 보통 이 일을 하는 여자애들과는 다른 면이 많다.
나는 꼬마에게 손짓을 하곤 근처의 골목으로 들어선다.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모텔로 들어선다. 주인 여자가 잠시 껄끄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하지만 딱히 제재할 생각은 없는 듯, 내가 건넨 카드를 받아 조용히 계산한다. 쓱 밀어준 키를 건내어받고 방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텔 특유의 라벤더 향이 풍긴다.
"후아-먼저 씻을래요? 아니면 내가? 아니면 같이 씻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며 윗옷을 훌훌 벗어던진다. 아직 덜 여문 매끄러운 살결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약간은 단단한듯하지만 부드러운 가슴을 어루만진다. 꼬마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내 손을 자연스레 떨쳐낸다.
"씻고 와요 씻고-!"
그렇게 말하며 내 등을 밀어 욕실로 밀어 넣는다. 샤워기를 틀고 몸을 서둘러 씻는다. 그동안에도 잠시 잠깐 만졌던 꼬마의 가슴이 아른거린다. 잠시 후 안을 꼬마의 덜 여문 몸이 계속해서 생각난다. 나는 물기도 다 닦지 않은 채 욕실을 나왔다.
알싸한 알코올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꼬마는 침대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술병을 입에 가져간다. 그리곤 나를 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내민다.
"마셔요"
나는 옆에 앉아 술병을 받아 든다. 찰랑거리는 가벼운 소리가 들린다. 그대로 입에 가져가 삼킨다. 술병을 내려놓고 손을 뻗는다. 하얀 피부, 매끄러운 살결, 적당히 오른 살집. 손을 움직여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아저씨, 좋아요?"
"응?"
"나... 좋아요?"
꼬마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끌어 자신에게 더욱 밀착시켰다. 따뜻한 숨결이 잠시 뺨에 와 닿는다. 아직 여린 교성이 귀를 간지럽힌다. 손끝에 닿은 얇은 천조각 너머로 꼬마의 체온이 느껴진다. 손을 움직이려 하자 꼬마가 힘을 주어 움켜쥔다. 불그레해진 얼굴로 꼬마는 계속 물었다.
"나 어때요? 좋아요?"
"응"
난 급한 마음에 대충 대답하고 꼬마를 끌어안았다. 여린 교성이 귀에 울리고, 덜 여문 몸을 거칠게 끌어안는다. 내 품으로 작은 젖가슴이 와 닿는다. 쿵쿵거리는 심장의 뜀이 몸 전체로 울려 퍼진다. 더 이상 꼬마가 하는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꼬마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술에 취한 건지 단순히 몸을 뒤섞어서 붉어진 것인지 얼굴이 새빨갛다. 거칠게 턱을 돌려 입을 맞춘다. 입술을 벌리고 혀를 얽는다. 왠지 모를 달콤한 입술에 더욱 거칠게 몸을 밀어붙인다. 우리의 교성은 조금씩 더 커져가고 몸은 뒤엉킨 채 떨어지지 않는다. 덜 여문 젖가슴에 얼굴을 박는다.
몇 시간이나-몇 번이나- 나는 그렇게 꼬마의 몸을 탐했다. 지쳐 쓰러져 잠들 때까지. 시끄럽게 울리는 체크아웃 알람 전화에 깨어나서 주위를 둘러봤다. 꼬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찾았다. 훔쳐가진 않았군. 다행이란 생각이 들고나서야 몸이 끈 적하 단 걸 깨달았다. 아침에 한번 더 안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할 수 없지. 전날 밤의 후유증인지, 욱신 거리는 허리를 붙잡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튼다.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정신이 좀 맑아지고 나서야 거울에 빨갛게 쓰인 글씨가 보였다.
[날 잊지 말아요. 아빠]
다시 따르릉-하는 체크아웃 전화소리가 들린다.
자극은 점진적으로 에스컬레이트되어 갔다. 감각의 역치는 가파르게 상승하여 어느새 도달할 수 없는 지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타는 갈증에 시달렸다.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이 욕구는 점점 날 시들어가게 했다. 난 내가 미쳤다는 걸 안다. 냉철한 이성과 돌아버린 감정은 서로 상충하며 더욱 강렬한 자극을 만들어냈다. 그래, 마약과 같다. 머리를 뒤흔들고, 눈에는 환상을, 소리는 환청을, 후각은 맹렬한 악취를 풍긴다. 잊을 수 없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선명히 느껴지는 것만 같은 촉각은 뇌를 속인다. 그때의 그 공간, 그 시간, 그 장면으로 끊임없이 리바이벌시킨다. 마치 멋진 추억을 곱씹기라도 하듯. 그럴 리 없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 거친 자극을 미화시킨다. 쓰다듬는다, 잘리어진 너의 몸뚱이를 보며. 촉각은 잘리어진 단면은 이제는 들릴 리 없는 비명은 코를 찌르는 이 비릿한 악취는. 이 자극은. 너를 상상한다. 촉각의 자극은 널 선명히 일으켜 세웠다.
가해지는 고통이 강해질수록 같이 커져가는 비명을 상상한다. 울부짖는 표정에서 난 미쳤음을 실감한다. 이 욕구에, 고통의 주인이 되어, 카타르시스의 노예가 되어 난 미쳐가고 있다. 이제 비명을 지르지 않는 너를 보며 난 다시 갈증을 느낀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너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아직 감기지 않은 눈을 가린다.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찾듯, 난 또 다른 너를 찾아 나서야 했다.
"너 있자나-. 그거 알아?"
그녀는 혀가 잔뜩 꼬인 말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술을 너무 마셨다. 간혹 비틀 거리는 몸짓으로 '안 취했어!, 안취해따고!'라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옆에서 가만히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눈이 사라지는 웃음으로 배시시 웃더니 내 머리에 손을 얹는다. 까치발까지 한 채로 머리에 손을 얹어서 잠시 쓰다듬더니 몸을 슥- 돌린다. 짧은 단발머리가 흩날린다.
"나 너 좋아해애~"
이러고는 다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친구들 틈으로 슥- 사라져 버린다. 친구들과 섞인 그녀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괜스레 그녀가 만진 내 머리를 쓱 만져본다.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만 같다. 작년 요맘때도 그녀는 나에게 똑같이 말했었지. 그때와 똑같은 행동, 말투, 달라진 거라곤 그때와 달리 짧아진 단발머리뿐. 그녀-, 정확히는 이윤진. 내가 대학 초년생 때 그녀는 일 년 선배였다. 우린 그저 그런 선배와 후배의 관계였다. 딱히 연관될 일도 없고 마주쳐봤자 간단한,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고 가는 그런 사이. 딱히 우리는 그 어떤 관계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맘때 그녀는 남자 친구가 있기도 했었지.
"야! 개오중, 빨리 안 와?"
친구 녀석들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개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친구들 무리에 끼어들었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특유의 그 웃음을 짓는다. 나는 괜스레 못 본채 하며 고개를 돌린다. 술에 취한 건지 얼굴이 화끈거린다. 심장이 두근 거리는 게 꼭 술 때문만은 아닐 거다. 우리는 그렇게 몇 시간을 더 술을 마셨고, 마지막으로 노래방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내 옆에 앉아서 소주잔을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선배, 괜찮겠어요?"
"괜찮아 갠찮아~!"
그러더니 옆사람과 소주잔을 짠~하고 부딪히더니 단숨에 털어 넣는다. 나는 은근슬쩍 안주 하나를 집어 건넨다. 그녀는 살짝 찡그린 얼굴로 안주를 받아먹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던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바라본다. 나는 의식하지 않는 척 안주를 향해 손을 뻗는다. 아무래도 취했는지 안주가 떨어졌다.
"긴장했구나~우리 오중이~"
"안 했어요"
"거지잇~마~알~"
옆구리를 찌른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무릎으로 끌어내렸다.
"간지러우니까 하지 마요"
쳇~하는 혀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차선배가 마이크를 잡고 고해를 부르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야유가 터져 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선배는 열창 중이다. 핏대까지 세운채로. 얼굴이 터질 것만 같다. 나는 잠시 그걸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나 싫어?"
조그마한 입술이 삐쭉 움직인다.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거북하다. 피하기엔 그녀의 눈이 너무 이쁘다. 그렇게 잠시 있었다. 그녀는 몸을 기대듯이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녀의 숨결이 뺨에 닿는다. 다시금 취기가 올라온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 아뇨"
억눌린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을 하는 시간이 몇 시간이나 흐른 것 같다. 그녀는 또 배시시 웃더니 잠시 몸을 떨어트린다. 그리곤 기지개를 켜듯 팔을 쭉 펴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내 손을 잡은 채로. 그리곤 사람들을 향해 소리친다.
"우리 잠깐 나갔다 올게!"
어째서 이 말 만은 말도 안 꼬이고 똑바로 말하는 걸까. 난 못 이기듯 따라나선다. 뒤에선 우우~하는 야유가 계속된다. 에라-모르겠다. 난 그냥 무시하고 문을 닫는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그렇게 손을 잡은 채 쭉쭉 걸어나갔다. 방금 전까지 헤롱거렸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구석에 있는 화단까지 온 우리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보다 밤바람은 차가웠다. 그녀는 히야~좋다~라고 말한 뒤에, 아직도 잡고 있던 손을 끌어당겨 품 안에서 양손으로 잡는다. 손에 심장이 있는 것만 같다.
"나 너 좋아해"
이번엔 똑바로- 하지만 나를 보지 않은 채로 말을 한다. 나도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앞만 본채 대답했다.
"저도요"
히히-하는 웃음이 옆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입을 맞춘다. 보지 않아도 그녀는 웃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아뇨..."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노래방을 향해 뛰어갔다. 난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종이 쪼가리와 담배를 꺼낸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본다.
신부 측 이름에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다.
나는 종이를 구겨 땅에 내던진다.
술이 깬 것 같다.
몇 년만에 시골로 내려가는지 가물가물하다. 머릿속이 백지가 된 것처럼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가,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곡소리들 속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웃음소리. 조문을 하기 전 걸쳐 입었던 양복을 바로 하고 들어선다. 녀석은 어디로 가버리고 낯선 얼굴의 사내가 상주를 보고 있다. 상주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나는 타오르는 향 앞에서 가만히 서서 영정사진을 바라본다. 남의 손주인 나를 항상 친손주처럼 챙겨주셨던 할머니. 사진 속 할머니는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간 그런 웃음을 짓고 계셨다. 언제나 사진을 찍을 때면 짓던 그런 미소. 사진 찍는 게 어색하고 싫다면서 짓던 그런 미소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향 하나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는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연기가 솟아오르고. 할머니께 머리 숙여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접객실로 들어서서 창이 사려진 자리에 아무렇게나 주저앉는다. 소주 한 병을 끌어당겨 잔에 따른다.
소주가 쓰다.
"어우-형 오셨네요"
사실 상주를 해야 하는 새끼는 이 새끼인데. 어디서 놀다 왔는지 처자다 왔는지, 머리가 아무렇게나 뻗쳐있다. 내가 손을 올려 내 머리를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자, 녀석이 대충 자신의 머리를 쓸어내린다. 아무 말하지 않았음에도 녀석은 내 앞에 앉아서, 잔 하나를 꺼내 소주를 따른다. 그리고는 싱글싱글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건넨다. 역겨운 술냄새가 여기까지 풍겨온다.
"오늘 못 오실 줄 알았어요"
"언제 돌아가셨어?"
어떻게 안 올 수가 있어, 이 개새끼야. 나는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눌렀다. 할머니는 항상 이 빌어먹을 새끼가 쳐놓은 사고를 수습하려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항상 무릎이 아프시다고 하셨으면서도 열심히 일하셨다. 내가 돈을 부쳐주며 쉬라고 하실 때에도 쉬지 않으셨다. 내가 준 돈은 모두 이 새끼의 술 쳐 먹는 돈으로 들어갔겠지. 녀석이 소주 한잔을 들이키며 '캬~이맛이야'라고 중얼거린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인다. 빨간 불이 눈앞에서 연기를 내뿜는다. 나는 녀석의 입에 있던 담배를 빼앗아 물었다.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문다.
"언제 돌아가셨냐고"
"아-. 글쎄요. 듣기로는 10시쯤에?"
시발 새끼. 듣기로는?
"임종은?"
"삼촌이 봤다고 하더라고요."
"삼촌만 본거야?"
"예. 뭐-"
"넌?"
"아... 전..."
녀석이 말을 얼버무린다. 나는 비어버린 잔에 소주를 따르고 다시 입에 털어 넣는다. 소주의 끝 맛이 더욱 쓰다. 나는 알싸하게 오르는 술기운을 느끼며 담배를 쭉 빨아 당긴다. 머리가 핑- 어지럽다. 녀석은 또 그 싱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친구들에게 문자를 날린다.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없는 그런 행동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은 일어서서 상주 노릇을 하러 가지 않는다. 씨펄놈이. 할머니 가는 길을 배웅할 생각은 못하고. 이 개새끼가 이렇게 여기 앉아서 담배나 빨고 술이나 마시고 있다. 할머니가 그렇게 자기를 예뻐해 줬는데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다. 모른다 시펄놈이.
"편히 가셨대?"
"주무시듯 가셨대요. 호상이죠 뭐"
뭐? 호상? 소주잔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소주잔을 당장이라도 녀석의 얼굴에 던져버리고 싶지만 애써 참는다. 소주를 병째로 들어 입안에 들이붓는다. 녀석이 '형-아우... 왜 그래요. 천천히 마셔요'라며 나를 만류한다. 시팔새꺄 너 때문에 이렇게 먹는 거다 개새꺄. 욕이 터져 나온다. 소주병을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는다.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빙글빙글 녀석의 얼굴이 웃고 있다.
"시팔새꺄. 사람 뒈지는 거에 호상이 어딨어 호상이"
"형-! 왜 그래요. 아오... 진정해요"
"미친 새끼가 호상? 시펄놈아 호상? 시발 넌 뒈지는 거에도 잘 죽는 게 있냐 이 개새꺄! 시발 새끼가 호상? 시펄. 주둥이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냐? 십새끼가. 진짜... 너 할머니 돌아가실 때도 나이트에서 부킹이나 쳐하고 있었지 개새꺄! 응!? 시펄놈이. 진짜..."
"아 형!! 좀..."
"개새끼가! 어디서 소릴 질러 씨벌놈아!!!"
시펄. 소주잔을 녀석의 얼굴에 던져주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몇몇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무시하고 밖으로 향했다. 장례식장을 나오자 찬 바람이 몰아닥친다. 후끈 달아올랐던 얼굴이 조금 식는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깊숙이 빨아들인다. 가슴이 먹먹하다. 답답하다.
"시팔... 사람이 뒈지는데 호상이 어딨어 호상이. 시펄놈의 새끼"
아담과 이브, 그리고 에덴. 그 공간에서 아담과 이브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생명체는 필요 외의 존재인 것만 같았다. 완전무결한 존재와 같은-. 신의 사랑을 모두 받은 그들은 찬란하게 빛났고 아름다운 몸짓과 목소리로 얘기했다. 깨끗하디 깨끗한 생각들로 신이 자신들에게 내려준 은총을 찬미하였다. 그리고 뱀은 그들이 싫었다. 아니 정확히는 질투와 시기, 그리고 부러움. 뱀은 끊임없이 그들을 관찰했다. 벰은 그들과 같고 싶었다. 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그들과 똑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그들과 똑같은 몸으로 그들과 같이 생각하고 움직이고 싶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따라 하기로 결심했다.
뱀은 끊임없이 그들의 주위를 배회했다. 그들이 말하는걸 끊임없이 관찰했다. 그들이 말할 때 내는 목소리는 그 어느 동물이 내는 소리보다 감미로웠고 청량했다. 뱀은 밤새 그들의 울음소리를 따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뱀이 열심히 그들의 목소리를 따라 해도, 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저 울음소리일 뿐 그것은 말이 되지 못했다. 뱀은 그들이 웃고 떠들고 노래하며 소곤소곤 거리는 그 모든 말들이 알고 싶었다. 그들과 같이 노래하고 그들과 같이 찬양하며 그들과 같이 신의 은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수많은 밤을 흘려보냈을 쯔음-. 뱀은 깨달았다. 난 앞으로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들의 곁을 끊임없이 맴돌고 그들을 따라 하려 해도 절대 그들과 같을 수 없었다. 절대로!
신은 그들에게 아름다운 모든 것을 주었다. 매끄러운 머릿결과 흠 하나 없이 고운 피부, 온갖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목소리와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신을 찬양하며 춤출 수 있는 팔과 다리. 뱀은 절대 그들과 같을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이 하는 그 어떤 것도, 단 하나의 작은 몸짓도 뱀은 그들을 따라 할 수 없었다. 저들은 어째서 신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을까. 왜 나에겐. 왜 나에겐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은 것일까. 털 한오라기 없는 미끌 거리는 몸뚱이와 사그극 거리는 비늘, 두 갈래로 나누어진 혓바닥과 감기지 않는 눈. 아무리 소리를 내려해도 나오지 않는 목소리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팔다리 또한 없다.
어찌 보면 뱀은 그들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였다. 그들이 온갖 아름다움의 표본이라면 뱀은 추악하고 소름 끼치는 것들의 표본이었다. 신은 어째서 저들에게만 사랑을 주는 것일까. 왜 나에겐. 뱀은 생각했다. 저들과 같아지고 싶다. 아담과 이브, 저들과 같은 존재이고 싶다. 아니, 아담과 이브. 그 자체이고 싶다.
그들과 같은 위치에서 신을 향해 울부짖을 것이다. 그러나 뱀은 그들처럼 될 수 없었다. 그들이 받은 신의 과분한 애정이 뱀에게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뱀은 그들을 끌어내리기로 결정했다.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저 높은 은총이 가득한 땅이 아닌, 습하고 축축한 이 더러운 땅위에서 저 신을 향해 울부짖으리라. 신, 그 고귀한 입을 위하여 준비한 선악과를, 당신의 아들과 딸의 입에 물려주리라.
에덴이 아닌 이 더러운 땅 위에서. 아담과 이브와 동등한 위치에서 당신의 사랑을 갈구한다면, 당신을 향해 울부짖는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이 미천한 나에게도 사랑을 주실런지요.
끊임없이 솟구치는 활화산 같은 충동에 평생을 휘말리며 살아왔다.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누군가 내 격정의 고통과 같은 충동에 휘말려 사는 자가 있다면, 그는 나의 절망과 비참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삶을 유지시키는 것이라곤 몇 방울의 술과 메말라버린 빵 조각 몇 개. 저 어두침침한 구멍 속에서 더듬이를 흔들거리는 바퀴보다 못한 상황, 내 핏줄에 흐르는 더러운 욕정이 눈을 통해 번들거림을 느낀다. 아! 아아! 아아아! 이 충동을 이길 수 없음을 확신한다. 테베의 라이오스 왕은 알았을 것이다. 그 어린것의 순수한 눈망울에도, 미처 숨기지 못한 처절한 욕망의 충동을. 오이디푸스는 알리라 나의 고통을, 나의 충동을, 나의 욕정을!
아아~! 어찌할 수 없는 이 욕망의 충동은 끊임없이 타올라 날 집어삼킬 것이다. 죽음과 욕망 사이에서 날 메말라 죽게 하고야 말 것이다.
난 하루에도 몇 번이고 도망쳐 다녔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불과 같이 뻗쳐오는... 마음속을 천천히 침식시키는... 오늘도 방 안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방 안에서.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귓속에는 적막하다 못해 들려오는 이명이 나를 괴롭혔다. 일정한 것처럼, 또는 일정하지 않은 것처럼 그 삐-거리는 이명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간혹 그 이명은 다르게도 들려와서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게 너무나 소름 끼치게 들려와서 머리를 흔들고 귀를 틀어막지만 이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방구석에 있는 티브이를 켠다. 잠깐 눈을 괴롭히는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지만, 금세 익숙해진다. 아픈 눈을 비비고는 티브이의 볼륨 버튼을 찾아 소리를 키운다. 그러자 귀를 괴롭히던 이명은 억울하다는 듯이 자기도 따라 소리를 올렸다. 이명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할수록 그 이명은 더욱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제야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명이 들려주는 괴상한 말소리에- 굳이 따지자면 말이라기보단 단순한 의미, 느낌이라 해야겠지만... 이명에서 무언가를 전달받았다면 난 이미 미쳐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미친 게 맞을 거다. 아마도.
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천천히 방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는다. 비틀어 당기자 오랫동안 닫혀있던 경첩이 끼익-거리는 소음을 만들어낸다. 이명에 섞여 더욱 기괴한 의미를 나에게 전달한다. 머리를 흔들어 이명을 날려 보내려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에는 이명이 전달하는 의미에 따라 몸을 움직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조용한 거실이 보인다. 내가 문을 열고 나온 일이 놀라운지 부모들이 나를 바라본다. 내가 그들을 노려보자 얼굴을 돌린다. 그래 알아 나도. 당신들이 날 싫어하는걸. 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돌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쏟아지는 눈길이 거북하다.
나조차도 얼마 만에 밖을 나왔는지 가물가물할 정도니까... 잠시 그렇게 생각하자, 주방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보였다. 시발. 밝네...
창에서 눈을 돌려 도마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식칼을 집어 들었다. 이쯤에 이르자 귓속에서 들려오던 이명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들려오던 소리들은 이명에 묻혀버리고, 머리 속에 울리는 이명 때문에 시야마저 어질어질했다. 비틀거리는 시야에 순식간에 어지러움이 엄습했다. 쿵-하는 느낌과 함께 벽에 몸을 부딪혔다. 그 상태 그대로 기대어 서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아직 그들은 나를 못 봤는지 일그러진 시야 속에서도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꼿꼿하게 앉아서-아니. 움직이는 건가... 잘 모르겠다. 이리저리 흔들린다. 걷고 있는 바닥이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가 쓱-사라진다. 이윽고 난 걸음을 계속 옮겨서 그들의 뒤에 섰다.
그때서야 그들은 다시 날 본 건지 놀란 얼굴로 쳐다본다. 일그러진 시야에 비친 일그러진 얼굴. 끔찍하리만치 이상해야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본래 이들의 원래 표정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일그러진 입이 열리며 붉은 혓바닥이 날름 거린다. 왠지 모를 뜨거운 입김이 뺨에 와 닿는 것만 같다. 손을 들어 뺨을 문지르곤 웃었다.
"미안- 안녕"
손을 그대로 휘둘러 목에 칼을 꽂아 넣는다. 이명은 더욱더 커지고- 얼굴에 튀어 오른 핏물은 사방으로 흘러내린다. 옆으로 도망치는 얼굴을 향해서 다시 칼을 휘두른다. 쓰윽-하고 무언가 잘리는 느낌이 들려온다. 다시금 몸을 움직여 확실히 목에 칼을 휘두른다. 핏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이제야 삐-거리던 이명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내가 칼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몸에 칼을 꽂아 넣을수록 이명은 잦아들었다. 이윽고 이명이 사라지고 났을 때에는 내 주위는 붉게 얼룩져있었다.
하아...
"이제 살겠다..."
이제 이명이 들리지 않는다.
이번엔 너와 나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아마 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혹은 그냥 그저 그런 글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네가 볼 일 없는 이런 공간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는 게 참 어이없는 상황이겠지만. 아마도 언젠가 네가 내 글을 읽고 나에게 다시 연락이 왔으면 하는 그런 마음, 그런 기분으로 이 글을 쓴다.
너와 난 사귀는 동안 참 많이도 싸웠다. 별 다른 이유 없이, 별로 화낼 일이 아닌 것에도 화를 내곤 했다. 서로의 마음을 믿지 못하고, 서로의 기분보단 나 자신의 기분만 신경 썼던 것 같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 테니까. 그런 되지도 않는 생각으로 널 힘들게 했다. 알고 있었다. 네가 많이 힘들어한다는 걸. 하지만 그건 그저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니까-. 그러니까. 그걸로 용서될 거라고 생각했다.
기억할까? 언젠가 네가 나에게 같이 살자고 했던 그날. 말로는 퉁명스럽게 싫다고, 무슨 동거냐고. 그렇게 까칠하게 내뱉었던걸. 사실 속으로는 너와 함께 보낼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에, 내가 좋아했던 너의 품에 더 오래 안겨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내심 기뻤었다. 그리고 너의 그 당돌함에 널 더 좋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난 네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집착하고, 화내고, 너를 소유하려는 욕심이 커졌다. 너는 내 거. 그러니 어디도 가면 안돼. 그런 마음이 샘솟았다. 참 어리석은-. 그게 너와 나의 이별을 앞당겼던걸, 네가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떠날 거란 걸. 네가 다른 남자에게 가게 된 이유란 걸. 그때는 몰랐다.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것도 아주 어렴풋이 깨달았을 뿐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도 넌 내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 잊을 수 없었다. 네가 해주었던 사소한 것들- 악필인 글씨체로 삐뚤빼뚤 써주었던 편지, 밥 굶지 말라고 싸주었던 도시락, 생일 때 만들어주었던 케이크. 넌 나에게 사소한 기억들을- 추억들을 남겨주었다.
그에 반해서 내가 너에게 해준 것은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해준 것은 없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를 굴려서 떠올려보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주저리주저리 글을 써 내려가곤 있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거 하나인 것 같다.
미안하다.
이 말이 너무 하고 싶었다. 이만 네가 볼 일 없는 이 편지를 끝마친다. 언젠가 네가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또 영원히 볼 일이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