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모든 사람이 바빠"
그렇게 말하며 넌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난 잠시 너의 말에 끊기어진 전화만 잠시 바라보았다. 마치 바쁜 서울 사람들 틈에서 나만 동떨어진 채 느리고 게으르며 무료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느껴진다. 전화를 땅에 내려놓았다. 해가 지고 있다. 나의 아침은 해가 정오를 넘어서 땅거미에 가까울 즈음에 시작하여, 해가 떠오를 때에 밤이 되곤 했다. 이 사이클은 웃기게도 고착화되어서 이제는 이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난 너의 질타 섞인 목소리에 오늘도 텄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술 한잔 얻어먹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각박한 서울이라지만 점점 더 숨통을 메어오는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 지내는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빛 조차 들지 않는 답답한 고시원에서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난 점점 나와 쥐를 동일시했다. 어둠 속에 숨어서, 조그만 굴 방 안에서, 누군가가 흘린 부스러기만을 도둑처럼 몰래 먹어대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거북한 존재감만을 내뿜는 그런 존재. 난 점점 서울의 지박령처럼, 더러운 악취만을 내뿜게 되는 그런 쥐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나도 성공을 바랄 때가 있었다. 이 어둠에 스스로를 처 밀어 넣고 작은 독방에 날 가둔지 1년. 곯아가는 육신을 다그치며 또다시 1년. 이번엔 될 거야 이번만은 성공하겠지 헛된 희망 속에 1년. 난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퇴실 소식은 어떨 때는 나도 그들처럼 될 거라는 희망을, 어떤 때는 나도 그들처럼 그늘로 숨어드는 쥐처럼 될 거라는 절망을 주곤 했다. 난 담배를 손에 든 채 옥상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서울은 하늘에 별이 없다. 빌어먹게도 길거리의 조명들이 별빛을 대신에 깜빡거리고 있다. 고개를 들면 어둠이 고개를 숙이면 빛이 반겨준다. 서울 이곳에선 고개를 숙여야만 빛이라도 볼 수 있다. 저 바닥의 불빛들은 죄다 서둘러 점멸하며 서둘러 발길을 움직인다. 난 땅을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빨간 담뱃불은 바닥으로 떨어져 꺼져버렸다.
"닥터, 나에게도 슬럼프가 왔나 봐"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평소와 같은 한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에 가득 찬 당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파우치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나에게 내밀었다. 난 한숨을 쉬고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붙여주었다.
"잘 안되니까 재미가 없더라구, 닥터는 그런 적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흠-하는 콧소리를 내고는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담배부터 끊어요, 될 일도 안될 거 같은데"
"흥, 이 아이 없으면 아마 진작에 때려치웠을 거야"
"이젠 그 아이가 놓아주지 않겠죠"
내 말에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맞네 맞아, 이제는 이 녀석이 내 목줄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을걸?"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다시금 담배를 빨아들인다. 사실 나도 그녀가 끊으리란 생각은 없다. 몸에 딱 달라붙는 빨간 원피스, 하얀 살결. 그녀는 마치 장난처럼 자신의 몸을 과시했다. 자신에게 눈을 뗄 수 없게,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에게 눈을 돌릴 수 없도록. 그녀가 몸을 기울여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한다. 깊숙이 파인 원피스 사이로 그녀의 가슴골이 눈 앞으로 들이닥치는 기분이다. 난 애써 눈을 돌렸다.
"귀엽다니까, 닥터는"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곤 다시 차트를 살폈다. 십여 년간 지속적인 상승세를 그리던 그녀의 인기는 최근 들어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대기업이라 불리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몹시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등 뒤로 스치는 절망과도 같은 감정이 진료실을 가득 채웠다.
"이제 그만하려구, 위에 있어야 재밌잖아? 아냐 닥터, 당신 탓은 아니니까. 이만 갈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걸친 코트를 집어 들고 진료실을 나섰다. 난 그녀의 처방전을 미처 작성을 다하지 못한 채 앉아있었다. 그녀 다운 당당한 표정과 행동 뒤로 드리워진 어두운 감정에, 의사로서 그러면 안되면서도 그녀의 말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건 어찌 보면 거부할 수 없는 암흑과 같았다. 어떤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면서도 난 그 어둠을 놓아주고 말았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를 뒤덮었던 어둠은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슬럼프와 어울리진 않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정상에서 고고하게 바라보는 게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난 어쩐지 그녀의 죽음에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매료되고야 말았다.
간밤에 눈이 내렸다. 아직 해가 뜨기 전,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바라본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눈길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가만히 바라보다 얇은 점퍼 하나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간다. 뽀드득-하는 소리가 쓸쓸하게 골목길을 메아리친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 그 위에 내 발자국을 남긴다. 내가 처음이라는 사실에 괜히 기분이 설렌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서 내가 만든 발자국. 노란 입김이 이리저리 퍼진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너와 같이 걸었던 그날인 것만 같다.
이리저리 장난치듯 걸은 발자국 하나하나가- 너와 있던 그날인 것만 같다.
그 날인 것만 같아서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흐른다. 너와 있던 눈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