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너와 나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아마 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혹은 그냥 그저 그런 글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네가 볼 일 없는 이런 공간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는 게 참 어이없는 상황이겠지만. 아마도 언젠가 네가 내 글을 읽고 나에게 다시 연락이 왔으면 하는 그런 마음, 그런 기분으로 이 글을 쓴다.
너와 난 사귀는 동안 참 많이도 싸웠다. 별 다른 이유 없이, 별로 화낼 일이 아닌 것에도 화를 내곤 했다. 서로의 마음을 믿지 못하고, 서로의 기분보단 나 자신의 기분만 신경 썼던 것 같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 테니까. 그런 되지도 않는 생각으로 널 힘들게 했다. 알고 있었다. 네가 많이 힘들어한다는 걸. 하지만 그건 그저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니까-. 그러니까. 그걸로 용서될 거라고 생각했다.
기억할까? 언젠가 네가 나에게 같이 살자고 했던 그날. 말로는 퉁명스럽게 싫다고, 무슨 동거냐고. 그렇게 까칠하게 내뱉었던걸. 사실 속으로는 너와 함께 보낼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에, 내가 좋아했던 너의 품에 더 오래 안겨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내심 기뻤었다. 그리고 너의 그 당돌함에 널 더 좋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난 네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집착하고, 화내고, 너를 소유하려는 욕심이 커졌다. 너는 내 거. 그러니 어디도 가면 안돼. 그런 마음이 샘솟았다. 참 어리석은-. 그게 너와 나의 이별을 앞당겼던걸, 네가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떠날 거란 걸. 네가 다른 남자에게 가게 된 이유란 걸. 그때는 몰랐다.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것도 아주 어렴풋이 깨달았을 뿐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도 넌 내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 잊을 수 없었다. 네가 해주었던 사소한 것들- 악필인 글씨체로 삐뚤빼뚤 써주었던 편지, 밥 굶지 말라고 싸주었던 도시락, 생일 때 만들어주었던 케이크. 넌 나에게 사소한 기억들을- 추억들을 남겨주었다.
그에 반해서 내가 너에게 해준 것은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해준 것은 없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를 굴려서 떠올려보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주저리주저리 글을 써 내려가곤 있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거 하나인 것 같다.
미안하다.
이 말이 너무 하고 싶었다. 이만 네가 볼 일 없는 이 편지를 끝마친다. 언젠가 네가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또 영원히 볼 일이 없었으면 한다.
거친 손을 내밀며 미소 짓는다. 등 뒤에 떠오른 햇빛에 눈이 부신다. 그 모습이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아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손을 내밀어 그 거친 손을 잡는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거친 손. 움켜쥐듯이 나의 손을 쥐고는 잡아끌어 일으킨다. 나는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낸다. 아버지는 내 머리에 손을 올려 한번 쓰다듬고는 등을 돌린다. 별 다른 말은 없다. 넓은 어깨, 커다란 등. 듬직한 아버지. 나의 아버지. 말이 없는 과묵한 나의 아버지. 따뜻한 미소로 웃어주는 나의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다. 삼촌의 말을 들어보면, 어머니가 나를 낳다 돌아가셨을 때부터라고 하셨다. 항상 과묵한 아버지. 그러나 어디서나 열심히 일하시는 아버지. 무심코 찾아간 아버지의 직장, 공사판. 흔히 말하는 노가다의 인부. 아버지는 무거운 회색 벽돌을 어깨에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고 계셨다. 노란 철모 밑으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까맣게 타버린, 거칠어져 버린 피부 위로 땀방울이 흘렀다. 아버지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나 하나를 키우기 위해 아버지는 힘이 들면 안 되었다. 아프면 안 되었다. 언제나 똑같이, 성실히 일하셔야 했다. 힘든 집안, 죽을 둥 살 둥 벌어도, 새어나가는 돈들. 빌어먹을 돈. 돈돈돈. 언제나 우리의 목을 죄어오는 돈. 아버지의 입을 더욱 굳게 다물게 했던 돈. 아버지는 말이 더욱 없어지셨다. 하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일을 나가셨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독감에 걸린 몸으로, 펄펄 열이 끓는 몸으로 벽돌을 옮기셨다. 내가 다리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할 때도, 아버지는 그 크고 거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뿐이었다. 단 한마디 말씀 없이 아버지는 또 일을 하러 나가셨다. 덜덜 떨리는 손발로 벽돌을 옮기고 치밀어 오르는 거친 숨을 골라야 하셨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나의 우상. 나의 위인. 나의 단 하나뿐인 영웅, 아버지. 말이 없으신 나의 아버지.
나는 성공해야 했다. 아버지를 위해서. 나의 하나뿐인 영웅을 위해서. 미친 듯이 공부했다. 다른 친구들과 놀 시간 따위는 없었다. 공부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 코피를 쏟고 몸살이 나도 책을 놓지 않았다. 나에겐 공부뿐이었다. 아버지의 희망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난, 성공했다. 성공? 그래, 아마 성공했었다. 나는 대기업에 들어갔고, 어느 동창 부럽지 않게 돈을 벌었다. 20대 중반이 안된 젊은 나이에 외제차에 집까지 있었다. 난 그때나 돼서야 내가 먼저 거칠고 주름진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는 그저 웃으셨다.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이젠 힘들게 일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에도 아버지는 고개만 저었다. 아버지는 내가 대기업에 들어간 뒤에도 공사판을 나가셨다. 언제나처럼 노란 철모에 벽돌을 짊어지고.
그리고 나는 내 젊은 성공에 방심했다. 친구에게-그나마 몇 되지 않는 친구였지만- 서준 보증. 순식간에 내 목을 다시 죄어오는 돈. 사방에서 날아드는 붉은 딱지. 피를 말리는 붉은 딱지. 사방을 물들이는 붉은 딱지. 붉은 돈. 아버지는 온통 빨갛게 물들어버린 방안에서, 그 거친 손으로 붉은 딱지 하나를 메만지셨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서 계셨다. 나는 차마 아버지를 제대로 볼 수 조차 없어서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친 아버지의 숨소리, 심장을 욱신거리게 하는 거친 한숨소리. 아버지는 터벅-거리는 메마른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어떻게 얻은 돈인데, 아버지께 자랑하고 싶었던 내 모습이었는데.
나는 집을 나섰다. 검은 하늘, 조그맣게 떠오른 별들 몇 개. 한참을 걸었다. 몇 시간을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멓던 하늘은 어느새 옅어지고 있었다. 세상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다리가 아파왔다. 근처 놀이공원의 바닥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동이 터오는 하늘, 주변에서 짹짹거리는 참새 몇 마리. 멀리서 들려오는 가정집들의 알람 소리. 그리고 내 눈앞에 드리워진 그림자.
아버지,
"일어나라, 가자"
거친 손을 내밀며 미소 짓는다. 언제나 그렇듯 타박하지 않고 별다른 이야기 없이 손을 내민다. 밤새 그리워진 아버지의 눈 밑엔 아직 눈물 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채 반달 눈웃음을 그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다시 날 위해 먹먹한 웃음을 터트렸다. 등 뒤로 떠오른 햇빛에 눈이 부시다. 거친 손이 내 손을 잡는다.
아버지, 나의 영웅의 웃음에 일어설 수 있다.
나에게 신뢰란 매미의 허물과도 같다. 일평생 고이 간직해오다 일순간, 어떤 상황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점에 벗어던져져 땅에 바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너무나 허무하게 여름날 땅에 바스러져 발에 밟히고 바람에 흩날려 먼지가 되어 하늘을 부유하듯.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매미처럼 사라진 신뢰를 버리고 울음을 터트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