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은 점진적으로 에스컬레이트되어 갔다. 감각의 역치는 가파르게 상승하여 어느새 도달할 수 없는 지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타는 갈증에 시달렸다.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이 욕구는 점점 날 시들어가게 했다. 난 내가 미쳤다는 걸 안다. 냉철한 이성과 돌아버린 감정은 서로 상충하며 더욱 강렬한 자극을 만들어냈다. 그래, 마약과 같다. 머리를 뒤흔들고, 눈에는 환상을, 소리는 환청을, 후각은 맹렬한 악취를 풍긴다. 잊을 수 없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선명히 느껴지는 것만 같은 촉각은 뇌를 속인다. 그때의 그 공간, 그 시간, 그 장면으로 끊임없이 리바이벌시킨다. 마치 멋진 추억을 곱씹기라도 하듯. 그럴 리 없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 거친 자극을 미화시킨다. 쓰다듬는다, 잘리어진 너의 몸뚱이를 보며. 촉각은 잘리어진 단면은 이제는 들릴 리 없는 비명은 코를 찌르는 이 비릿한 악취는. 이 자극은. 너를 상상한다. 촉각의 자극은 널 선명히 일으켜 세웠다.

가해지는 고통이 강해질수록 같이 커져가는 비명을 상상한다. 울부짖는 표정에서 난 미쳤음을 실감한다. 이 욕구에, 고통의 주인이 되어, 카타르시스의 노예가 되어 난 미쳐가고 있다. 이제 비명을 지르지 않는 너를 보며 난 다시 갈증을 느낀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너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아직 감기지 않은 눈을 가린다.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찾듯, 난 또 다른 너를 찾아 나서야 했다.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다섯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생.  (0) 2018.07.26
작별 인사.  (0) 2018.07.26
고백.  (0) 2018.07.26
호상.  (0) 2018.07.26
질투.  (0) 2018.07.26
Posted by Ralgo :

"너 있자나-. 그거 알아?"

그녀는 혀가 잔뜩 꼬인 말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술을 너무 마셨다. 간혹 비틀 거리는 몸짓으로 '안 취했어!, 안취해따고!'라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옆에서 가만히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눈이 사라지는 웃음으로 배시시 웃더니 내 머리에 손을 얹는다. 까치발까지 한 채로 머리에 손을 얹어서 잠시 쓰다듬더니 몸을 슥- 돌린다. 짧은 단발머리가 흩날린다.

"나 너 좋아해애~"

이러고는 다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친구들 틈으로 슥- 사라져 버린다. 친구들과 섞인 그녀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괜스레 그녀가 만진 내 머리를 쓱 만져본다.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만 같다. 작년 요맘때도 그녀는 나에게 똑같이 말했었지. 그때와 똑같은 행동, 말투, 달라진 거라곤 그때와 달리 짧아진 단발머리뿐. 그녀-, 정확히는 이윤진. 내가 대학 초년생 때 그녀는 일 년 선배였다. 우린 그저 그런 선배와 후배의 관계였다. 딱히 연관될 일도 없고 마주쳐봤자 간단한,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고 가는 그런 사이. 딱히 우리는 그 어떤 관계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맘때 그녀는 남자 친구가 있기도 했었지.

"야! 개오중, 빨리 안 와?"

친구 녀석들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개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친구들 무리에 끼어들었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특유의 그 웃음을 짓는다. 나는 괜스레 못 본채 하며 고개를 돌린다. 술에 취한 건지 얼굴이 화끈거린다. 심장이 두근 거리는 게 꼭 술 때문만은 아닐 거다. 우리는 그렇게 몇 시간을 더 술을 마셨고, 마지막으로 노래방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내 옆에 앉아서 소주잔을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선배, 괜찮겠어요?"

"괜찮아 갠찮아~!"

그러더니 옆사람과 소주잔을 짠~하고 부딪히더니 단숨에 털어 넣는다. 나는 은근슬쩍 안주 하나를 집어 건넨다. 그녀는 살짝 찡그린 얼굴로 안주를 받아먹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던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바라본다. 나는 의식하지 않는 척 안주를 향해 손을 뻗는다. 아무래도 취했는지 안주가 떨어졌다.

"긴장했구나~우리 오중이~"

"안 했어요"

"거지잇~마~알~"

옆구리를 찌른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무릎으로 끌어내렸다.

"간지러우니까 하지 마요"

쳇~하는 혀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차선배가 마이크를 잡고 고해를 부르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야유가 터져 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선배는 열창 중이다. 핏대까지 세운채로. 얼굴이 터질 것만 같다. 나는 잠시 그걸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나 싫어?"

조그마한 입술이 삐쭉 움직인다.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거북하다. 피하기엔 그녀의 눈이 너무 이쁘다. 그렇게 잠시 있었다. 그녀는 몸을 기대듯이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녀의 숨결이 뺨에 닿는다. 다시금 취기가 올라온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 아뇨"

억눌린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을 하는 시간이 몇 시간이나 흐른 것 같다. 그녀는 또 배시시 웃더니 잠시 몸을 떨어트린다. 그리곤 기지개를 켜듯 팔을 쭉 펴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내 손을 잡은 채로. 그리곤 사람들을 향해 소리친다.

"우리 잠깐 나갔다 올게!"

어째서 이 말 만은 말도 안 꼬이고 똑바로 말하는 걸까. 난 못 이기듯 따라나선다. 뒤에선 우우~하는 야유가 계속된다. 에라-모르겠다. 난 그냥 무시하고 문을 닫는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그렇게 손을 잡은 채 쭉쭉 걸어나갔다. 방금 전까지 헤롱거렸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구석에 있는 화단까지 온 우리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보다 밤바람은 차가웠다. 그녀는 히야~좋다~라고 말한 뒤에, 아직도 잡고 있던 손을 끌어당겨 품 안에서 양손으로 잡는다. 손에 심장이 있는 것만 같다.

"나 너 좋아해"

이번엔 똑바로- 하지만 나를 보지 않은 채로 말을 한다. 나도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앞만 본채 대답했다.

"저도요"

히히-하는 웃음이 옆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입을 맞춘다. 보지 않아도 그녀는 웃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아뇨..."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노래방을 향해 뛰어갔다. 난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종이 쪼가리와 담배를 꺼낸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본다.

신부 측 이름에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다.
나는 종이를 구겨 땅에 내던진다.

술이 깬 것 같다.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다섯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별 인사.  (0) 2018.07.26
자극.  (0) 2018.07.26
호상.  (0) 2018.07.26
질투.  (0) 2018.07.26
충동.  (0) 2018.07.26
Posted by Ralgo :

몇 년만에 시골로 내려가는지 가물가물하다. 머릿속이 백지가 된 것처럼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가,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곡소리들 속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웃음소리. 조문을 하기 전 걸쳐 입었던 양복을 바로 하고 들어선다. 녀석은 어디로 가버리고 낯선 얼굴의 사내가 상주를 보고 있다. 상주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나는 타오르는 향 앞에서 가만히 서서 영정사진을 바라본다. 남의 손주인 나를 항상 친손주처럼 챙겨주셨던 할머니. 사진 속 할머니는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간 그런 웃음을 짓고 계셨다. 언제나 사진을 찍을 때면 짓던 그런 미소. 사진 찍는 게 어색하고 싫다면서 짓던 그런 미소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향 하나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는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연기가 솟아오르고. 할머니께 머리 숙여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접객실로 들어서서 창이 사려진 자리에 아무렇게나 주저앉는다. 소주 한 병을 끌어당겨 잔에 따른다.

소주가 쓰다.

"어우-형 오셨네요"

사실 상주를 해야 하는 새끼는 이 새끼인데. 어디서 놀다 왔는지 처자다 왔는지, 머리가 아무렇게나 뻗쳐있다. 내가 손을 올려 내 머리를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자, 녀석이 대충 자신의 머리를 쓸어내린다. 아무 말하지 않았음에도 녀석은 내 앞에 앉아서, 잔 하나를 꺼내 소주를 따른다. 그리고는 싱글싱글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건넨다. 역겨운 술냄새가 여기까지 풍겨온다.

"오늘 못 오실 줄 알았어요"

"언제 돌아가셨어?"

어떻게 안 올 수가 있어, 이 개새끼야. 나는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눌렀다. 할머니는 항상 이 빌어먹을 새끼가 쳐놓은 사고를 수습하려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항상 무릎이 아프시다고 하셨으면서도 열심히 일하셨다. 내가 돈을 부쳐주며 쉬라고 하실 때에도 쉬지 않으셨다. 내가 준 돈은 모두 이 새끼의 술 쳐 먹는 돈으로 들어갔겠지. 녀석이 소주 한잔을 들이키며 '캬~이맛이야'라고 중얼거린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인다. 빨간 불이 눈앞에서 연기를 내뿜는다. 나는 녀석의 입에 있던 담배를 빼앗아 물었다.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문다.

"언제 돌아가셨냐고"

"아-. 글쎄요. 듣기로는 10시쯤에?"

시발 새끼. 듣기로는?

"임종은?"

"삼촌이 봤다고 하더라고요."

"삼촌만 본거야?"

"예. 뭐-"

"넌?"

"아... 전..."

녀석이 말을 얼버무린다. 나는 비어버린 잔에 소주를 따르고 다시 입에 털어 넣는다. 소주의 끝 맛이 더욱 쓰다. 나는 알싸하게 오르는 술기운을 느끼며 담배를 쭉 빨아 당긴다. 머리가 핑- 어지럽다. 녀석은 또 그 싱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친구들에게 문자를 날린다.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없는 그런 행동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은 일어서서 상주 노릇을 하러 가지 않는다. 씨펄놈이. 할머니 가는 길을 배웅할 생각은 못하고. 이 개새끼가 이렇게 여기 앉아서 담배나 빨고 술이나 마시고 있다. 할머니가 그렇게 자기를 예뻐해 줬는데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다. 모른다 시펄놈이.

"편히 가셨대?"

"주무시듯 가셨대요. 호상이죠 뭐"

뭐? 호상? 소주잔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소주잔을 당장이라도 녀석의 얼굴에 던져버리고 싶지만 애써 참는다. 소주를 병째로 들어 입안에 들이붓는다. 녀석이 '형-아우... 왜 그래요. 천천히 마셔요'라며 나를 만류한다. 시팔새꺄 너 때문에 이렇게 먹는 거다 개새꺄. 욕이 터져 나온다. 소주병을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는다.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빙글빙글 녀석의 얼굴이 웃고 있다.

"시팔새꺄. 사람 뒈지는 거에 호상이 어딨어 호상이"

"형-! 왜 그래요. 아오... 진정해요"

"미친 새끼가 호상? 시펄놈아 호상? 시발 넌 뒈지는 거에도 잘 죽는 게 있냐 이 개새꺄! 시발 새끼가 호상? 시펄. 주둥이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냐? 십새끼가. 진짜... 너 할머니 돌아가실 때도 나이트에서 부킹이나 쳐하고 있었지 개새꺄! 응!? 시펄놈이. 진짜..."

"아 형!! 좀..."

"개새끼가! 어디서 소릴 질러 씨벌놈아!!!"

시펄. 소주잔을 녀석의 얼굴에 던져주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몇몇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무시하고 밖으로 향했다. 장례식장을 나오자 찬 바람이 몰아닥친다. 후끈 달아올랐던 얼굴이 조금 식는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깊숙이 빨아들인다. 가슴이 먹먹하다. 답답하다.

"시팔... 사람이 뒈지는데 호상이 어딨어 호상이. 시펄놈의 새끼"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다섯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극.  (0) 2018.07.26
고백.  (0) 2018.07.26
질투.  (0) 2018.07.26
충동.  (0) 2018.07.26
도망치다.  (0) 2018.07.19
Posted by Ral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