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2018. 8. 1. 12:46 from 조금 긴 끄적임-./백린교
"뭐요?"
경찬은 퉁명스레 대답하며 몸을 돌려 탁주를 쳐다보았다. 항상 막걸리를 한 손에 든 채 술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그를, 사람들은 막걸리에 빗대어 탁주라고 불렀다. 경찬은 그가 싫었다, 그의 행동 그가 하는 말들 하나하나가 기억 속 고통을 헤집어 놓았다. 경찬은 대답과 동시에 탁주에게 반응한 걸 후회하고 말았다. 그의 풀린 눈이 경찬을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탁주는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팔뚝으로 훔치며 입을 열었다.
" 잘~ 샐각해보라카이... 좀 이상치 않나?"
"그니까 뭐가요?"
"한순간이다, 한날! 그 한 날에 어찌 다 사라질 수가 있냔 말이다"
탁주는 손에 들고 있던 막걸리병을 땅에 내던졌다. 벌겋게 충혈된 눈이 경찬을 노려본다. 숨을 거칠게 내쉬고는 경찬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다.
"백린교말이다...뱅닌교"
지독한 술냄새가 경찬의 얼굴에 뿜어졌다. 그리고 함께 뱉어진 그 단어에 경찬은 얼굴을 굳혔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줄 알고 있음에도 기어코 듣고야 마는 가학적인 행동임에도 이유를 알 수 없이 항상 그래 왔다. 탁주가 무언가 더 말하려 입을 움찔거리자 경찬이 탁주의 어깨를 밀쳐버렸다. 너무도 맥없이 뒤로 나뒹굴어진 탁주는 비틀비틀 땅을 짚고 일어나려 애썼다. 여기저기 페인트와 쎄멘자국이 묻어있는 허름한 옷 위로 먼지가 뒤집어쓰였다.
"시뱅알~노므 자슥... 개 후라질새끼... 없어진기다... 다~~~ 사라진기다. 뱅닌굔지 무시깽인지 다~~미치가꼬 사라진기다."
탁주는 몸을 일으켜 세워 벽에 기대었다. 참 빌어먹을 타이밍, 때마침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빗물이 떨어진다. 탁주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표정으로 경찬을 바라봤다. 비를 맞아 술이 깬 것인지, 잠깐이나마 온전한 정신이 들어온 것인지. 탁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느 때 같은 잔뜩 술에 취한 꼬부랑 말투는 느껴지지 않았다.
"경찬이 임마야...우리 숙이 좀 찾아주그라... 우리 숙이... 넌 다 봤담서...응?"
경찬은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몇 년 전 얘기지. 빌어먹을 1999년. 경찬은 우산꽂이에 있던 우산을 하나 꺼내 들고는 탁주에게 다가가 건네었다. 하지만 탁주는 경찬이 건네어주는 우산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떨어지는 비만 맞고 있었다. 얼굴에 세차게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울이 기억에 파문을 일으킨다. 물결치는 기억이 다시금 심장을 옥죄어온다. 지하 깊숙이 묻어둔 줄만 알았던 기억이 다시금 머리를 뒤흔든다.
"그만하고 들어가요, 기억 안 나니까"
"거짓부렁이다, 거짓부렁 하지 마라 개자슥아! 니만 나왔다! 니만 그기 끌려가서, 니만 여 왔다! 니만! 니만!!!"
탁주가 몸을 일으켜 경찬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탁주는 마치 피를 토해내는 것처럼 경찬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에서 피를 뿜을 것처럼 경찬을 노려보던 그는 경찬의 기괴하게 일그러진 표정에 손을 놓았다. 탁주도 알고 있었다, 경찬이 여기 있는 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단 걸. 그저 우연과 우연이 겹쳐 여기 동떨어져 혼자 남겨진 것이란 걸. 그렇다면 이 찢어질 듯한 고통은 어디에 풀어야 하는 것이란 말인가. 탁주는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제발, 제발... 경찬아... 숙이, 우리 숙이..."
빗방울이 얼굴을 때려댔음에도 경찬은 탁주가 울고 있단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내리는 비보다 그의 눈물이 더욱 짙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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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멸한다. 점멸한다. 또 점멸한다. 깜빡. 까암빡. 깜빡. 차가운 빛을 내뿜는 녀석은 깜빡. 불빛을 점멸한다. 깜빡. 시간을 보낸다. 반딧불이는 차가운 불빛을 점멸하며 시야를 괴롭힌다. 눈 앞에 반딧불이의 불꽃놀이 궤적이 깜빡. 점멸한다. 또 점멸한다. 무료한 시간은 나뭇잎 소리와 흘러간다. 물 흐르는 소리가 바위를 때린다. 깜빡. 시간은 흐른다. 반딧불이의 춤과 함께 점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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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날 닮은 것들에 대해서 까닭 모를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그것은 나 자신의 유일성에 기반한 것이 아닌, 나와 동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에 가깝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불쾌한 상념과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인간이란 얼마나 피곤한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증상은 완화되지 않고 예리하게 벼려진 바늘 끝처럼 점점 날카로워져만 간다. 한없이 날카로워져 누군가를 찔러 상처를 입히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것처럼.

고슴도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세운다. 아주 수동적인 형태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그마저도 통하지 않으면 몸을 튕기어 의지를 피력한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상처 입히기 위해 가시를 세운다. 호저처럼, 저 산미치광이라 불리는 녀석들처럼 더러운 엉덩이를 그들에게 향한 채 살을 뚫고 뼈를 뚫을 가시를 들이미는 것이다. 그들의 안위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오롯이 내 예민함으로 비롯하여.

세상에 문제를 돌리고 쏟아지는 비난의 포화 속에서 더 예민하게 더 날카롭게. 문제를 해결할 의지는 없이 더욱 남들에게 상처를 입혀가며. 그들이 고통으로 찡그리고 자리를 피해야만 나의 안전을 확보한 것처럼. 그 가시가 결국 자신을 향해 있는지도 모른 채. 너무 날카로워진 바늘은 결국 부러지고 말 것임을 알지 못한 채.

그래서 난 나와 닮은 것들에 대해서 까닭 모를 불편함을 느낀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체취는 나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고 혐오하게 만든다. 그들과 같은 체취가 나는 것은 깨닫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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