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아직 대답 안 했어"
"응"
"대답해"
"미안"
그렇게 소년은 짧은 말만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소녀는 소년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에 살짝 피가 맺힌다. 소녀가 한발 소년에게 다가간다. 그리곤 손을 높게 치켜들고 휘둘렀다. 짝-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소년의 얼굴이 벌겋게 변한다. 소녀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시 손을 치켜든다. 하늘로 향한 손 끝이 파르르 떨린다. 다시금 휘둘러지는 손, 더욱 붉어지는 소년의 얼굴. 소녀는 욱신거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손 끝의 고통이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욱신거리는 고통은 소년의 얼굴을 뿌옇게 보이게 만들었다. 소녀는 그제야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걸 깨달았다. 성질내듯 눈물을 훔쳐낸다. 소년은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소녀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 말 없는 소년의 침묵은 칼이 되어 소녀를 찔렀다.
"대답... 안 할 거야?"
"응"
"왜"
소년은 다시 대답이 없다. 소녀는 다시 때리려는 듯 손을 위로 치켜든다. 하지만 차마 다시금 때리지 못하고 손을 내렸다. 소녀는 왈칵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는다. 소년의 손을 붙잡고, 울컥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아내고. 떨리는 목소리로, 담담한 척 입을 연다.
"가지 마"
"미안"
소년은 소녀를 밀어낸다. 그제야 소녀는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토해낸다. 흘러넘치듯 모든 눈물이 터져 나온다. 소년은 그렇게 울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소녀는 혼자 울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소녀는 소년이 없는 그곳에서 혼자 울었다. 세상 모든 울음을 다 토해낸 것 마냥 다 울고 나서야, 소녀는 집으로 향했다.
침대에 몸을 뉘이자, 멈춘 줄만 알았던 그 눈물이 다시금 쏟아져 내렸다. 배게를 흠뻑 적시고 나서도- 그 이후로도. 소녀는 멈추지 못하고 울음을 계속 흘려냈다.
소녀는 헤어졌다.
속도를 높이는 일은 쾌락을 불러왔다. 계기판의 눈금이 끝에 치다를 수록 발끝은 더욱 깊게 페달을 밟았다. 빨간 숫자가 영혼을 유린한다. 시야는 좁아져 어두운 터널에 잔상을 남긴다. 붉은 선과 노란 선이 어지러이 교차한다. 귀를 때리는 소리는 바람이 되어 스쳐 지나간다. 가속은 손쉽게 쾌락을 유도한다. 더 빠르게 더 아찔하게 더욱더. 나를 비롯한 모든 것들은 속도의 세계에서 빛으로 점멸하며 스쳐 지나간다. 빛은 찰나와 같다. 찰나의 불빛은 선으로 점으로.
속도는 죽음을 향해간다. 이대로 끝으로 저 멀리. 고조되어가는 스릴에 반비례해 정신은 고요와 같이 침잠해간다. 쾌락은 고통과 같았다. 속도와 함께 치솟았던 쾌락은 끝이 보이는 터널과 함께 고통으로 돌아온다. 고통은 현실이었기에 죽음은 곧 직면해 있다. 빠르게 더욱 빠르게, 터질듯한 쿵쾅 소리는 엔진 소리인가 심장의 맥박질인가. 죽음은 점멸하며 눈 앞으로 성큼 뛰어든다. 계기판 눈금의 끝이 파르르 떨려온다.
이대로 저 끝으로 페달을 내리밟는다. 빛은 선으로 어지러이 점멸한다. 저 끝으로, 아무것도 없는 어둠으로.
그대가 날 사랑하는 만큼만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면, 그랬다면 나의 불안이 조금은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저 달이 어둠을 밀어내는 것처럼. 당신이 저 초승달처럼 날 안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면, 우리는 좀 더 오랜 기간 서로를 더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그대와 내가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가리어진 그 날,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난 당신을, 당신은 나를. 어쩌면 우리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서로를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요. 한참 후에, 강산이 변하고 우리의 머리칼도 하얗게 눈이 내릴 때쯤. 그때쯤이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난 아직도 불안함에 휩싸이고는 합니다.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것의 이유가 사라질 때면. 마치 신기루처럼 그대가 사라질까 두려워 잠 못 이루곤 합니다. 초승달을 보고 있노라면, 천천히 그대를 밀어내어 보름달이 되는 게 당연시되는 것 같아 괴롭곤 합니다. 당신이 나의 구름이기를, 나의 태양이기를, 나의 어둠이기를, 나의 추한 본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바라봅니다. 난 우리의 보름달이, 우리의 이별이 되지 않기를, 그대가 날 사랑하는 만큼, 내가 그대에게 온전히 기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우리가 맞잡은 손이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난 뒤에도. 그대가 나에게 주었던 사랑만큼 내가 그대에게 더 많은 사랑을 돌려주었기를, 간절히 아주 간절히 또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