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을 무심히 대해보려 노력 중입니다. 잘 되지 않음에 슬픔이 차올라도 내색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슬픔은 눈물을 따라온다고 합니다. 울지 않으면 저 멀리 달아난다고. 웃음은 행복을 불러온다고 합니다. 웃지 않으면 행복은 저 멀리서 관망할 뿐이라고. 무심히 모든 일을 대해보려 합니다. 전 지금 슬프기도 그렇다고 행복하기도 싫기에 모든 일을 관망하며 그냥 그 자리에 있어보려고 합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일이란 사실 별거 아닐지도 모릅니다. 객관화시킨 자신을 보고 있으면 될 일입니다. 찰리 채플린의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말처럼 사실 모든 일은 관점에 따라 달라질지 모릅니다. 별거 없는 일생이란 말처럼. 그렇기에 전 제 삶을 관망해보려 합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나의 삶을 다른 이의 눈으로 관찰하려 합니다. 화내지도 그렇다고 즐거워하지도 않은 채. 그렇지만 어찌 보면 이건 이것 나름대로 재미있을지 모르니, 그건 결국 무심히 관망하는 자세와는 다른 모습이 되긴 하겠지요.
기억의 편린은 깨어진 유리조각과 같았다. 쓸어내고 닦아내어도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 상처를 내고 고통을 남긴다. 빛은 산란하여 편린을 반짝인다. 유리조각은 흩어져 빛을 산란한다. 빛은 보이지 않은 채, 또는 반짝이며 그곳에 있다. 반짝이는 기억이란 결국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아름다운 추억이 빛을 산란하는 것처럼 고통과 슬픔은 예리하게 상처를 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관망하는 것만이 상처입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병원은 항상 숨통을 조이곤 했다. 턱턱 막혀오는 갑갑한 공기는 경찬을 괴롭게 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이건 익숙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질적인 존재, 경찬은 그곳을 빠져나온 이 후 항상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 왔다. 다른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은 그를 더욱 긴장 상태로 몰아가는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경찬은 담당의를 바라보곤 중얼거렸다. 매끈한 뿔테 안경 속으로 자그마한 실눈이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듯이 자신을 훑고 있음을 느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걸 간신히 참아내며 의자에 앉았다. 오수라 쓰여있는 명패에 반사되는 빛이 껄끄럽게 눈을 간질였다.
"오랜만이시네요, 김경찬 씨"
오수는 고개를 까딱이며 자리에 앉는 경찬을 바라보다 명패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경찬의 눈에 쏟아지던 빛이 조금은 분산되어 벽면을 밝혔다. 오수는 경찬을 바라보며 차트에 글씨를 적어 넣는 척했다. 상담이란 지루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환자와 담당의 간의 숨 막히는 눈치 싸움 끝에 원하는 결과만을 추출해내야 하는 것이다.
오수는 경찬을 살폈다. 유난히도 이 곳을 싫어하는 환자였기에 오수는 섣불리 말을 건네지 않았다. 신뢰, 환자에게서 신임을 얻어내는 방법은 쉽지 않았다. 오수는 차분히 기다렸다. 경찬은 답답한 듯 연신 목 주위를 손으로 매만졌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잔향으로 남아 경찬을 괴롭히고 있었다. 오수는 경찬 외의 환자들을 더듬어 떠올렸다.
"물, 물 좀..."
경찬이 간신히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이 곳에만 오면 입안이 타들어가는 듯한 작열감이 덮쳐오곤 했다. 물을 마신다고 해도 이 통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항상 물을 찾았다. 오수는 준비되어 있던 물병을 경찬에게 건넸다. 경찬은 서둘러 뚜껑을 열어 물을 들이부었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밖에 나가서 얘기할까요?"
오수의 말에 경찬은 서둘러 뒤따라 나섰다. 둘은 병원 밖의 공원 벤치에 걸터앉았다. 밖을 나서니 타는 듯한 고통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목의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쉽사리 사라질 수 없는 증상이다, 경찬은 아마 이 증상들이 평생 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약은 떨어지셨을 테고, 상담은 오래만이고, 그렇죠?"
경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찬은 가방에 손을 넣어 캠코더를 매만졌다. 투박한 캠코더에서 느껴지는 거칠거칠한 손때가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 같았다. 경찬은 오수를 바라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 필요합니다"
아주 작은 목소리, 오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들리지 않은 앞의 말보단 경찬이 무언갈 요구한 건 처음이었다. 인형과 같이 아무런 욕구 없이, 작은 감정이라도 속으로 숨기며 드러내지 않는 짐승처럼. 오수가 대답을 하지 않자 경찬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피해자들, 정보가 필요해요"
빌어먹을 그 기억 속으로 다가가기 위해선 자기 혼자론 안된다. 경찬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누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의 시간, 공간, 기억들이 무섭게 몸을 훑었다. 경찬은 눈을 가만히 감은채 캠코더를 매만졌다. 서늘한 기억과 고통들이 캠코더를 타고 손을 통해 감정을 억눌렀다.
지속되는 기억은 고통을 만들었다. 일상이 이어지지 않고 쉼 없이 균열이 커져가며 경찬을 갉아먹었다. 기억은 곰팡이처럼 스멀스멀 온몸을 덮었다. 눅진한 기억은 그대로 모든 기억에 들러붙어 끊임없는 고통을 퍼트렸다. 탁주와의 만남이 시발점은 아니었다. 짧은 고민이 아니었다. 마주치기 어려운 기억에 회피하고 있었을 뿐, 언젠가 맞닥트려야 할 문제란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손 끝의 악몽을 열어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안됩니다. 모든 환자 개인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어요"
오수의 단호한 말에 경찬은 고개를 숙였다. 알 수 없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떤 모습인지. 살아는 있는지 나 외에 사람이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는 있는지. 인터넷엔 그들의 생활을 찾을 수 없었다. 꽤나 많은 사람이 나왔을 텐데도, 이상하리만치 그곳의 사람들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경찬의 실망한 표정에 오수는 손가락을 두들겼다. 우연이었다, 자신이 그 사람들을 받게 된 건. 우연히도 이 곳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또 우연히도 당직자가 자신이었을 뿐이다. 정체를 숨기고 찾아온 그들은 저마다 간절한 비밀을 요구하며 그를 찾았다. 그들은 정보였다. 그들이 겪은 내용은 가십거리에 미친 기자들에게 먹음직한 먹잇감이었다. 오수에게 정보는 돈이었다. 그들이 싸들고 온 그때의 모든 기억들은 돈이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제 서서히 그들의 이야기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대중은 자극을 원했다. 자극이 커질수록 그들의 요구는 더욱 커져갔다. 이제는 이야기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웃기게도 경찬이 찾아왔다. 끌어안고 다니는 오래된 캠코더를 들고서. 이 얼마나 달콤한 먹이인가. 저 캠코더엔 분명 더 달콤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안 될까요?"
경찬의 물음에 오수가 자뭇 고민하는 척 턱을 쓰다듬었다. 너무 성급하지는 않을까. 이 제안은.
"좋습니다, 단 제안이 있습니다. 그걸 들어주신다면 한명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오수는 경찬의 가방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캠코더, 알려드리는 대신 그 캠코더를 보고 싶습니다"
'조금 긴 끄적임-. > 백린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숙이(1) (0) | 2018.08.08 |
---|---|
1999년 (0) | 2018.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