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담기 위해 작은 병을 사 왔습니다. 오늘의 후덥지근한 날씨를 기억하려, 오랜 시간 차 안에 방치되어있던 물을 담았습니다. 차 안에서 달궈진 물은 뜨겁게 병을 덥혔습니다. 이 온도는 오래가지 않겠지만 그때의 기억은 병 안에 담기겠지요. 그때의 기억과 뜨거운 그날의 날씨를 담은 채로. 작은 병의 날씨가 선선해질 때가 되어서야 작은 병을 책장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책장의 한 구석엔 그렇게 모은 기억들이 색색을 발하고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 처음 가보았던 푸른 백사장의 모래가 담긴 병을 시작으로, 내 기억들의 단편은 하나둘씩 늘어갑니다.

슬픔이 담긴 병은 시간이 흐르고 눈물은 풍화되고 기억이 흐려져,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되뇔 수 있겠지요. 기쁨이 담긴 병은 시간이 흐르고 험난한 현실에 지쳤을 때 추억이 되어줍니다.

오늘의 슬픈 기억도 이 작은 병에서 언젠가는 흐려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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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폭발음이 들린다. 우현은 철모를 깊게 눌러쓰고 참호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후드득-하는 빗방울 소리가 철모를 때린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시야가 흐리다. 저 멀리서 「죽어 이 개시키들아!!!」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지만, 곧 폭발음에 사라진다. 우현은 자신의 옆에 몸을 숙이고 조용히 앉아있는 이석우 상병을 바라봤다. 아무런 표정 없이 주머니에서 잔뜩 불은 육포 조각을 꺼내 입에 털어놓고 있다.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육포를 건네는 시늉을 한다. 우현이 고개를 가로젓자, 석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남은 육포를 입에 다 털어 넣는다.

"먹어야 사는겨 인마-"

"많이 드십쇼"

석우는 피식 웃는다. 철모를 꾹 눌러쓰고 주변을 살핀다. 폭발음이 멈춘 걸 보니 주변의 아군은 전멸- 혹은 은엄폐. 죽지만 않았으면 좋을 텐데. 우현은 가능성 낮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석우는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줄 알고 있었다. 방금 전 목소리-.

아마 김하사 목소리였을 거다.

이빨이 몇 개 깨져서 발음이 새는 김하사, 그놈의 개시키하는 발음이 귀에 맴돈다. 빌어먹을 폭음 속에서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때부터 속이 너무 허했다. 배고프다. 주변을 살피면서도 주머니에 다른 먹을 게 없나 뒤적거렸다. 시펄-없구먼? 가벼운 욕지기를 내뱉고는 참호를 기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변에 떨어진 주인모를 군장을 뒤적거린다. 곧 손에 건빵 하나가 들려 나왔다.

"에이씨 또 건빵이고"

그러면서도 봉지를 뜯어 입안에 털어 넣는다. 와그작와그작 하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힌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건빵을 씹어 삼킨다. 아마 여기서 살아 돌아가긴 힘들 거다. 빌어먹을, 개죽음이네.

"우현아-"

"예"

"넌 꼭 살어~"

"예"

한동안 석우는 말없이 건빵만 씹었다. 봉지 속의 건빵이 비에 젖어 뭉개질 때쯤 되어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얼굴엔 왠지 모를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철모를 눌러쓰고는 잔뜩 움츠린 우현의 철모를 후려쳤다. 딱-하는 소리에 우현이 석우를 노려본다.

"뭔 짓입니까. 소리가 들리면..."

"가자-. 여서 죽든 저서 죽든 넌 살릴꺼니께"

석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소총을 한발. 타아앙-하는 소리가 사방을 울린다. 다시금 알 수 없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석우는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반대로 뛰그라!!"

우현은 움직이지도, 그렇다고 말리지도 못한 채 멀어지는 석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빗속에서 다시 한번-.

"뛰그라 개자식아!!!"

석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현은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콰앙-하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온다. 땅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몸의 균형을 채 바로잡기도 전에 땅을 뒹군다. 철모가 코를 때리고는 바닥을 뒹군다. 왈칵-하고 피가 쏟아진다.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몸을 일으킨다. 흙을 뒤집어쓴 철모를 다시 눌러쓴다. 죽을 수 없다. 여기서 죽을 수 없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죽어서는 안 된다. 다리를 움직여. 뛰어. 귀를 때리는 폭발 소리에도 선명하게 말소리가 파고들었다.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자. 여서 죽든 저서 죽든 너는 살릴꺼니께]

[먹어야 사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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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나랑 자고 싶어요?"

당돌한 꼬마다. 아니- 꼬마라고 보긴 어려운가? 슬쩍 위아래로 훑어보니, 볼록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이쁜 힙라인이 눈에 들어온다. 꽤나 성숙한 몸이다. 얼굴은 완전 애인데... 내가 잠시 대답이 없자 꼬마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툭 찌른다. 그리고는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짓는다. 초승달처럼 사라지는 눈웃음이 매력적이다. 어딘가 많이 본, 매력적인 얼굴이다. 연예인을 닮았나? 잠시 기억을 뒤적여보지만 딱히 생각나는 배우는 없다.

"위아래로 훑어보지만 말고 말해봐요"

아-. 훑어보는 게 티 났나?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꼬마는 그 반응을 보더니 잠시 고개를 까딱까딱. 그러고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펴더니 쭉-내밀었다. 그리고는 장난치듯 손을 쥐었다폇다하며 눈앞에서 흔들어댄다. 내가 그 손을 잡고 끌어내리자 다시 씩-웃는다.

"어때요? 이렇게 싸게 하는 곳도 없고, 솔직히 아저씨 생긴 게 괜찮은 편이라 나도 싸게 해주는 거예요. 아무래도 나도 조금이라도 잘생긴 남자랑 하는 게 좋으니까, 어때요?"

잠시 그녀의 말에 피식 웃었다. 뭐 그래도 상관없겠지. 다섯 장이면 엄청 싼 편이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꼬마는 '낙찰-'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손바닥을 짝-소리 나게 부딪혔다.

"저기요 저 가기 전에 술 좀 사줘요"

그렇게 말하고는 편의점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안주거리 몇 개를 집어 들고는 나에게 건넨다. 나는 어정쩡한 폼으로 안주를 안고, 소주 몇 병을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간단한 신분증 검사-는 개뿔. 사십 대의 남자에게 신분증 검사를 하는 놈이 미친놈일 테지. 카드를 건네어 계산을 마치고는 편의점을 나간다. 꼬마는 앞에서 걸어가며 이 얘기 저 얘기 조잘거린다. 보통 이 일을 하는 여자애들과는 다른 면이 많다.

나는 꼬마에게 손짓을 하곤 근처의 골목으로 들어선다.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모텔로 들어선다. 주인 여자가 잠시 껄끄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하지만 딱히 제재할 생각은 없는 듯, 내가 건넨 카드를 받아 조용히 계산한다. 쓱 밀어준 키를 건내어받고 방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텔 특유의 라벤더 향이 풍긴다.

"후아-먼저 씻을래요? 아니면 내가? 아니면 같이 씻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며 윗옷을 훌훌 벗어던진다. 아직 덜 여문 매끄러운 살결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약간은 단단한듯하지만 부드러운 가슴을 어루만진다. 꼬마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내 손을 자연스레 떨쳐낸다.

"씻고 와요 씻고-!"

그렇게 말하며 내 등을 밀어 욕실로 밀어 넣는다. 샤워기를 틀고 몸을 서둘러 씻는다. 그동안에도 잠시 잠깐 만졌던 꼬마의 가슴이 아른거린다. 잠시 후 안을 꼬마의 덜 여문 몸이 계속해서 생각난다. 나는 물기도 다 닦지 않은 채 욕실을 나왔다.

알싸한 알코올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꼬마는 침대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술병을 입에 가져간다. 그리곤 나를 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내민다.

"마셔요"

나는 옆에 앉아 술병을 받아 든다. 찰랑거리는 가벼운 소리가 들린다. 그대로 입에 가져가 삼킨다. 술병을 내려놓고 손을 뻗는다. 하얀 피부, 매끄러운 살결, 적당히 오른 살집. 손을 움직여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아저씨, 좋아요?"

"응?"

"나... 좋아요?"

꼬마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끌어 자신에게 더욱 밀착시켰다. 따뜻한 숨결이 잠시 뺨에 와 닿는다. 아직 여린 교성이 귀를 간지럽힌다. 손끝에 닿은 얇은 천조각 너머로 꼬마의 체온이 느껴진다. 손을 움직이려 하자 꼬마가 힘을 주어 움켜쥔다. 불그레해진 얼굴로 꼬마는 계속 물었다.

"나 어때요? 좋아요?"

"응"

난 급한 마음에 대충 대답하고 꼬마를 끌어안았다. 여린 교성이 귀에 울리고, 덜 여문 몸을 거칠게 끌어안는다. 내 품으로 작은 젖가슴이 와 닿는다. 쿵쿵거리는 심장의 뜀이 몸 전체로 울려 퍼진다. 더 이상 꼬마가 하는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꼬마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술에 취한 건지 단순히 몸을 뒤섞어서 붉어진 것인지 얼굴이 새빨갛다. 거칠게 턱을 돌려 입을 맞춘다. 입술을 벌리고 혀를 얽는다. 왠지 모를 달콤한 입술에 더욱 거칠게 몸을 밀어붙인다. 우리의 교성은 조금씩 더 커져가고 몸은 뒤엉킨 채 떨어지지 않는다. 덜 여문 젖가슴에 얼굴을 박는다.

몇 시간이나-몇 번이나- 나는 그렇게 꼬마의 몸을 탐했다. 지쳐 쓰러져 잠들 때까지. 시끄럽게 울리는 체크아웃 알람 전화에 깨어나서 주위를 둘러봤다. 꼬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찾았다. 훔쳐가진 않았군. 다행이란 생각이 들고나서야 몸이 끈 적하 단 걸 깨달았다. 아침에 한번 더 안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할 수 없지. 전날 밤의 후유증인지, 욱신 거리는 허리를 붙잡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튼다.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정신이 좀 맑아지고 나서야 거울에 빨갛게 쓰인 글씨가 보였다.

[날 잊지 말아요. 아빠]

다시 따르릉-하는 체크아웃 전화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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