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하늘 아래로 검은 해가 빛을 뿌리고 있다. 땅 위로 뻗어있는 노오란 나무들. 잎사귀 끝에 걸린 동그랗고 붉은 열매가 땅을 향해 떨어진다. 파아란 땅에 붉은 열매가 떨어진다. 붉은 열매는 몇 번이고 꿈틀꿈틀, 살아있는 것마냥 움직이더니 이윽고 붉은 껍질을 깨고 녹색 손을 내뻗는다. 작은 아이의 손. 너무나도 작은 그 아이의 손은 붉은색 껍질을 깨어내고, 이윽고 파란 땅에 발을 내딛는다. 소년- 혹은 소녀. 성을 알 수 없는 그 아이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하나 싶더니, 이윽고 달리기 시작했다. 검은 햇빛을 받으며 아이는 달리었다. 달릴수록 아이의 다리는 자라고, 몸은 커지었으며 팔은 길어졌다.
민둥민둥했던 머리는 어느새 하이얀 머리가 허리춤까지 자라났다. 아이는 자신의 몸이 변화했다는 것을 느끼자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리곤 자신의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힘이 세진 것이 느껴진다. 몸이 방금 전과는 다르게 움직이기 쉽다는 것을 느꼈다. 언제 어디고 어느 곳까지, 자신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아이는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하늘을 향해 뜀박질한다. 곧이어 다가오는 통증- 아니 희열. 순간순간 오가는 감각에 아이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다시 뛰어오른다. 하늘을 향해 몸을 날린다. 에메랄드빛 날개가 등에서 솟아오르고 아이는 보랏빛 하늘을 가로지른다. 하늘색 구름을 가로지르고 검은 태양빛에 눈을 가리며. 아이는 생각했다. 나는 누구지? 난 누굴까? 나는 왜 태어난 걸까? 아이는 날갯짓을 멈추고 땅을 살핀다. 파란 하늘 위로 솟아오른 갖가지 꽃들, 나무들, 그리고 그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작은 동물들. 아이는 파란 땅에 있는 작은 동물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작은 동물아, 넌 누구니?"
"나? 나는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이지"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땅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이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두 개의 머리를 끄덕거렸다. 한쪽에만 달린 눈이 빙긋 웃는다.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아. 넌 누구니?"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은 등에 달린 입을 오물거렸다.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세 개의 손으로 두 개의 머리를 긁적거린다. 한 개의 눈이 이리저리 대답할 말을 생각해낸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여섯 개의 다리로 땅을 굴렀다. 땅이 비명을 지르듯 쿠구구구구궁-하는 소리를 만들어낸다.
"나는 여섯 개의 다리로 땅을 달려 세상이 넓다는 것을 증명할 거고, 세 개의 손으로 많은 물건을 쥘 테지. 두 개의 머리로 사고하며, 등에 달린 입으로 남에게 보이지 않는 말을 하겠지"
대답이 되지 않아. 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는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을 뒤로하고 날개를 움직였다.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동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다시 날갯짓을 멈추고 물었다.
"저기 앉아있는 동물아, 넌 누구니?"
"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동물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동물은 그저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동물도 대답이 되지 않아. 이 세상에서 나는 왜 태어난 걸까? 나는 무슨 이유로, 어떤 존재가치로 이 곳에 있는 것일까. 나는... 아이는 날개를 퍼덕였다. 에메랄드 빛 날개 하나가 파란 땅을 향해 떨어지고 파란 땅위의 수많은 동물들은 아이의 날개를 향해 몸을 옮겼다. 아이는 잠시 멈추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간의 다툼, 소란 이윽고 아이의 날개를 손에 쥔 작은 동물 하나가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아이야, 넌 누구니?"
"나? 나는 하늘을 나는 아이지"
"그래, 하늘을 나는 아이야. 너는 누구니?"
다시 들려온 그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이얀 머리를 손으로 긁는다. 녹색 얼굴이 잠깐 찌푸려진다.
"나는 하늘을 날며 나를 찾는 아이야"
"그래, 하늘을 날며 너를 찾는 아이야. 넌 누구지?"
"하늘을 날며 나를 찾고 세상에서 내가 있을 곳을 찾는 아이야"
"그래. 하늘을 날며 너를 찾고 세상에서 네가 있을 곳을 찾는 아이야. 넌 누구야?"
아이는 대답하기에 지쳤다. 밑에서 들려오는 끊임없는 똑같은 질문, 대답. 그리고 이어지는 의문. 아이는 생각했다. 나는 누구지? 나는 하늘을 나는 아이. 나는 누구지? 하늘을 날며 나를 찾는 아이. 나는 누구지? 하늘을 날며 나를 찾고, 세상에서 자신이 있을 것을 찾는 아이. 난 누구지? 난 누구지? 난 누구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는 한 가지 점점 깨달아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지? 나는 나. 나는 누구지? 하늘을 나는 나. 나는 누구지? 자신을 찾는 나. 나는 누구지? 내가 있을 곳을 찾는 나. 모두 다 나, 자신. 아이는 검은 하늘을 향해 몸을 날린다. 보랏빛 하늘에 녹색 섬광이 스치고- 검은빛이 내리쬔다. 나는 나다. 아이는 아이다. 쉼 없이 고민해도 쉼 없이 자신을 찾으려 해도 자신은 모두 다 같은 자신. 그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아이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일터다.
검은 태양에 닿은 손이 하얀 손으로 변한다. 하늘은 파래지고, 땅은 푸르러지며, 녹색 잎들이 자라난다. 아이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 세상은 다시금 원래의 빛깔을 찾는다. 아이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하늘을 날며 자신을 찾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울고, 너에게 너희들에게 모두에게 보일 수 있는 얼굴로. 가면을 갈아치우듯이 얼굴을 바꾸고, 표정을 바꾸며 사람을 상대하고. 사람과 얘기하며 사람과의 소통을 이어간다. 언제나 나는 내 얼굴을 감춘채-. 진짜 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너와 너희들과 모두에게 미움받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적당히 조용히 무리에 섞여 들어갈 수 있게. 쉽게 말하면 이건 게임이다. 각 사람 한 명은 하나의 문제가 되고, 난 그 문제에 맞는 답- 표정을 지으면 된다. 그것은 생각보다 쉬운 작업이라서 이것만 잘해준다면 모든 문제를 풀고 승리할 수 있다. 게임에서 나는 이길 수 있다. 언제나처럼 이길 수 있어야 했다.
"거짓~말."
"응?"
"네가 하는 말 거짓말이란 거 알고 있어. 어차피 지키지 않을 약속 하지 마"
답을 틀렸다. 나는 처음 겪는 상황에 잠시 곤혹스러웠다. 내 앞에 있는 이 녀석이, 별 것 아닌 이 녀석이. 내가 승리해오던 게임을 멈추었다. 잠시 스코어는 0:1. 정답률은 99%. 1포인트 하락했습니다. 경고 경고- 수많은 알림음, 띵띵-하는 비프음이 머릿속을 울린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나는 언제나처럼 다른 녀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녀석에게도 승리할 수 있어야 했다. 이건 내가 이기는 게임이고, 나만이 승리자고,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 머릿속을 뒤흔드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승자일 수밖에 없는 이 게임에서 나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한 녀석. 나는 잠시 멍-한 채로 녀석을 노려본다.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한발, 몸을 들이밀었다. 얼굴을 둘러싸고 있는 가면에 지지직- 금 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기는 게임인데. 분명히. 나의 표정을 바라보던 녀석이 씩-웃는다. 그리곤 손을 뻗어 가슴을 밀친다. 탁-하는 가벼운 소리. 그와 함께 후드득- 떨어지는 나의 가면. 나의 표정. 내 얼굴'들'. 바닥에 유리조각처럼 떨어진 표정들은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깨진 채로 날 노려본다. 화난 눈이 날 노려보고, 웃는 눈이 비실비실 웃고 있다. 하품하는 입이 혓바닥을 내보이고. 잔뜩 일그러진 입술에서 짜증이 샘솟는다. 이리저리 갈라진 얼굴들 날 바라보는 표정들. 깨져버린 내 표정들은 날 쳐다보고 있다. 나는 머리를 털어내 애써 내 표정들을 지워낸다. 간신히 생각해낸 얼굴 표정 하나를 억지로 지어낸다.
눈은 웃자. 반달 모양으로. 실눈으로 사라지게. 그래. 입은 그래.입꼬리를살짝.조금만더?조금더?아니.너무올린건가?내릴까.그래-내리자.코는찡긋.아니아닌가.그래그럼가만히있을까.고개는갸웃?아니그냥있자아니움직일까아니움직이는게좋을까어떻게하지.
문득 앞을 바라보자 녀석이 내 표정을 따라 하는지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모든 근육들이 따로 움직이는 듯한 녀석의 얼굴에. 나도 똑같이 표정을 짓는다.
거울 속 나는 기괴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너와 단 둘이 앉아 얼굴을 마주 보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너의 목소리에 취해서. 카페에 단둘이 앉아, 가끔은 알아들을 수 없는 팝송을 흥얼거려보기도 하고, 때로는 달달한 노래가 마치 우리 노래인냥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고 싶다. 너의 숨결이 내 뺨에 와 닿고, 내 붉어진 뺨에 너의 입술이 닿고. 당황한 내 얼굴에 너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가끔은 서로만 알아들을 수 있는 암호를 풀어내며, 다른 사람 몰래 사랑을 나누고 싶다. 아무런 것도 하지 않고 서로 눈을 맞추고, 음료수 하나에 빨대 두 개. 너 몰래 바람을 불어넣어 거품을 만들고. 너도 반달 눈웃음으로 거품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너와 있고 싶다.
달빛 부서지는 옥상에 앉아, 반짝이는 별들을 조명삼아. 꿈을 꾸는 달빛요정이 우리의 위에 내려앉고. 포근한 달빛을 이불 삼아 잠에 들고.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너와 잠들고 싶다. 창가에 아기 햇살 내려앉고, 짹짹거리는 참새 소리에 잠에서 깨고. 내 옆에 누워있는 너의 얼굴을 보며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쓸어내리고 발그레한 너의 뺨에 입맞춤하고, 너는 잠에서 깨어 입을 맞추고 싶다. 아침을 그렇게 너와 마주하고 싶다. 일어나기 싫어 앙탈 부리는 너를 끌어안고. 내 가슴에 안긴 너의 심장소리를 듣고. 두근거리는 소리에 다시 너와 나는 잠에 들고.
그렇게 하루를 너와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