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 서 있다. 아무도 없다. 내 주위엔 조용한- 적막한 분위기만 흐른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보지 않는다. 아니-,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주위는 금세 어두워졌다. 그제야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소리인가? 아니. 나는 눈을 뜬다. 잠시 잠깐 들려왔던 소리는 금세 사라진다. 손을 뻗는다. 아무것도 손에 걸리지 않는다. 나는 손을 움켜쥔다. 손 안의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손을 펴 바라본다. 역시 아무것도 없다. 방금 느낀 것은 착각인가? 잠시 숨을 고른다. 다시 나는 혼자 서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 나는 앞으로 한 발 내딛는다. 무언가 퍼석-하는 메마른 소리가 들린다. 발 밑을 바라본다. 역시 발 밑에는 차가운 무기질의 바닥뿐, 아무것도 없다. 발을 들어서 살핀다. 나는 다시 발을 내려놓고 한발 내딛는다. 몸의 움직임이 거북스럽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만 같다. 아니 언제는 내 몸이었나. 나는 눈을 감으며 한 발을 내딛는다. 내 주위는 금세 고공의 외나무다리로 바뀐다. 당장이라도 삐그덕 거릴 것 같은 거북한 소리가 귀에 들린다. 온몸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이 흔들거린다. 눈을 뜬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몸의 균형을 바로잡고 한발 내딛는다. 다시 눈을 감는다. 또 한 발을 내딛자 땅은 당장이라도 갈라질 듯이 쩍쩍 입을 벌린다. 나는 벌어진 틈을 피해 발을 내딛는다. 퍼서석- 하고 땅이 부서져 내린다. 나는 놀라서 얼른 눈을 뜨고 발을 옮긴다. 하지만 주변은 너무나도 멀쩡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난 후우-하고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쿵쿵거린다. 적막하던 귀에 쿵쿵하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나는 혼자 있다. 눈을 뜨고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주변이 우그러진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혹은 내 망상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젠 눈을 감지 않아도 땅은 깊은 늪지가 되고, 공기는 탁해지며, 지나가는 바람이 손에 잡힌다. 이젠 눈을 감지 않아도 나는 움직일 수 없다. 한 발 내딛기가 두렵다.
길을 지나다 우연히 죽은 고양이를 보았다. 우연히 눈에 걸린 그 싸늘한 몸에 차마 가까이 가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못한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머뭇머뭇 땅에 무겁게 이끌리는 다리를 억지로 잡아끌어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렇게나 꺾이어진 다리, 움직이지 않는 몸. 이상하리만치 푸석해 보이는-혹은 기름져 보이는 털들 사이로 녀석은 날 노려보고 있었다.
또 한참을 머뭇거리다 주변의 나뭇가지 하나와 종이박스를 찾아들었다. 천천히 박스 위로 몸을 올린다. 혹여나 손에 닿을까 잔뜩 긴장한 채로. 갑자기 몸을 움직여 내 손을 쥘까 하는 공포감에 식은땀이 흐른다. 조심스레- 혹은 무서워하며 나는 녀석을 종이 박스에 올리었다.
때마침 힘 없이 떨구어진 녀석의 머리와, 그 틈으로 마주친 녀석의 눈에 화들짝 놀라 박스를 떨어트렸다. '왜 날 죽였어?'하고 묻는 것만 같다. 초점 잃은 눈으로 나를 책망한다. 눈을 피하기가 어렵다. 애써 침을 꿀꺽 삼키고 녀석의 눈이 보이지 않게 박스를 돌린다. 다시금 박스를 집어 들어 주변의 수풀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왜 날 죽였어, 왜 죽인 거야' 메아리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외면하고, 우거진 수풀 아래 박스를 뒤집는다. 탁-하며 떨어진 녀석의 몸뚱이. 수풀 사이로 발 하나가 뻗어 나왔다. 난 재빨리 몸을 돌려 여기를 벗어난다. 무거워진 다리 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란 감정이 매달려온다.
그리고 그 뒤로 '왜 날 죽였어'하는 울음소리가 끌려온다.
[내 소원을 정말 들으시는 거라면 한 번만 대답해주세요. 신, 그대에게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난 어릴 적부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신은 존재할까? 그것이 내가 가진 딱 한 가지 궁금증이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지요. 제가 당신이 존재한다고 믿게 된 건 무슨 사실, 혹은 종교에 의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전 단지 새로 생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그 본질인 당신을 인정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궁금증은 당신이 존재해야만 성립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신, 당신은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까?
그래요, 난 이 질문이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의 모든 인류를 딱 두 가지로 정의하게 했습니다. 자신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믿는 자는 어떤 사람이든지 포용하고 믿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이던지 배척하라.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과는 참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당신이 정의해버리게 된 두 가지의 사람들은 사실 세부적으로 수 많이 갈리게 됩니다. 당신도 보고 있다면 알고 계시겠지요.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악행을. 그리고 그들이 벌인 추잡한 짓거리들을. 물론,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제 질문에 답해주셔야 합니다. 답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악행을 저지른 자신의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포용하는 겁니까? 살인을 저지르고, 강간을 하고, 폭행, 절도, 간음. 그런 것들도 당신을 믿기만 한다면 모두 용서가 되는 것입니까? 아니 용서가 되지 않더라도. 그들이 당신을 믿지 않는 착한 사람들과 같은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까? 당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그렇게 큰 죄악인 것입니까? 이것이 제 질문입니다. 제 궁금증입니다. 당신을 믿지 않던 제가 당신을 인정하게 된 이유입니다. 오로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하여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몇 번의 질문인지 몇십 번의 호소인지. 당신의 대답을 간절하게 기다립니다.
저는 제 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야만 합니다. 전 당신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의 방에 있던 편지의 전문입니다."
여성은 얼굴을 찌푸린 채 손에 들려있던 종이를 책상에 내려놨다. 커다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던 남성은, 종이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몇 년 전인가부터 시작된 그의 기행도 이 편지로써 끝이 나게 되었다.
이 편지의 주인은 죽었다. 남성은 종이를 다시금 여성을 향해 내밀었다.
"파일에 넣어놔"
"예"
여성은 손에 들린 파일에 종이를 끼워 넣고는 방문을 나섰다.
여성의 손에 들린 파일 안에는 편지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성의 프로필이 적혀있었다.
강철웅 43세. 살인 및 강간, 납치.
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