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불편한 이야기-여섯달.'에 해당되는 글 23건

  1. 2019.02.25 이면.
  2. 2019.02.25 우선.
  3. 2019.02.25 밤 공기.
  4. 2019.02.25 추억.
  5. 2019.02.25 겉보기에.
  6. 2019.02.22 죄책감.
  7. 2019.02.22 스스로에게.
  8. 2019.02.22 잘 자.
  9. 2019.02.22 먼 곳.
  10. 2019.02.22 오후 4시.
끊임없는 충동에 시달렸다. 누군가를 죽이고 목을 베어 그 피를 마시는. 아주 끔찍한 상상은 이윽고 꿈의 세계를 벗어나 정신을 침략하여 제멋대로 날 유린하곤 했다. 난 학살자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목을 자르고 꿈틀거리는 근육에 입을 박아 넣고 꿀렁거리는 피를 빨아 마셨다. 동시에 내 뒤통수는 부서져 하얀 두개골을 땅에 흩뿌리고 피를 뿜어대며 머리통을 다른 누군가에게 빨아 먹히는 것이었다. 끔찍한 꿈, 동시에 어딘가 바라마지 않는 그런 기묘한 감각. 난 꿈에서 깰 때마다 그 감각을 떨쳐내려 노력해야만 했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떨어져 내리는 차가운 물줄기 속에 머리를 한참을 처박곤 했다. 뒤통수가 서늘하다 못해 통증이 온몸을 지배할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그 충동을 떨쳐낼 수 있었다. 언젠가 내가 사람을 죽이고 말 것이라는 공포가 하루하루 커져갔다. 하루하루 그 공포에 천천히 침식되어 가는걸 소름 끼치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난 누군가를 죽일 것이다.

그래서 난 나를 죽이기로 했다. 내가 아직 인간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존엄이 될 것이다. 아니, 인간이기에 선택할 수 있는 존엄이라고 해도 좋다. 모든 일을 정리하기로 했다. 다니던 직장과 부모님, 그리고 친구와 애인에게도 연락을 마쳤다. 당분간 홀로 여행을 떠난다고. 나만의 재충전을 위해서. 모두 아주 손쉽게 날 믿어주었다. 그간 나의 행동이 이상했다는 말과 함께, 피곤할 땐 쉬어야 한다면서. 난 그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날 붙잡지 않아 주어서 고맙다는 게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글쎄. 그래도 난 나의 의연한 죽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친 셈이었다.

오래된 호텔을 찾았다. 며칠을 내가 준비를 마치고 죽음으로 발길을 내딛는 그 순간까지 날 찾지 않을, 아주 조용하고 오래된 호텔. 주인은 며칠이나 묶는 나를 이상하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엔 아무 관광지도 없거니와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그 주인의 의심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주인이 나에게 방을 준 것은 내가 선불로 건넨 숙박비 때문이었다. 주인 입장에서야 알게 뭐란 말인가. 숙박비만 받을 수 있다면, 여기서 누가 죽던 공실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난 요 며칠간 내 죽음에 대해 고찰해왔다. 아니 죽음의 방법에 대해서. 고통 없는 죽음이 무엇이 있으련만, 요즘 나오는 약물들은 처방받기도 힘들뿐더러 치사량까지 먹는 게 고난과 가까웠다. 사실 고민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환영 하나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에, 난 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죽음 중에서도 아주 클래식한 고전적이라 할 수 있는, 난 내 목을 감쌀 밧줄을 손에 들고 눈을 감았다. 거칠 거리는 밧줄이 목젖을 강하게 짓눌렀다.

유서는 쓰지 않기로 했다. 이 삶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무슨 유서란 말인가. 난 단지 며칠 간의 시간만을 원했다. 그저 사람으로 사람답게 죽을 수 있는 아주 짧은 며칠. 나는 호텔을 나와 그나마 가까운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마저도 차를 끌고 족히 10분은 가야 나오는 아주 작은 편의점이었다. 레트로 식품 몇 개와 커피믹스 한 박스를 집어 들었다. 이게 내 마지막 삶을 함께할 식량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계산대에서 담배 한 보루를 같이 계산하고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편의점에서 사 온 레트로 식품으로 대충 배를 채우고 호텔 창가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믹스 커피를 홀짝이며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잠을 자는 것은 다시금 그 충동에 몸을 내맡기는 것과 같았다. 너무나도 선명한 그 꿈의 충동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기를 바랐다. 시간은 느리게, 그러면서도 빨리 흘렀다. 하루의 일과는 단순했다. 욕구 충동 속에서 눈을 뜨고 찬물로 샤워를 했다. 간신히 그 욕구를 잊어버리고 나면 레트로 식품으로 대충 때우고 창가에 앉아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하루는 너무나도 느리게 흘렀지만 내가 죽기로 한 날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날이 되었다. 난 어김없이 충동에 눈을 뜨고 머릿속을 헤집는 그 욕망을 참아내며 밧줄을 천장에 매달았다. 창가가 보이는 그 자리에서 해가 뜨는 걸 보며 목을 메달 것이다. 난 날 죽인다는 그 공포에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려댔다. 그러면서도 그 괴상한 흥분은 아랫도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난 이 기묘한 욕망 속에 의자에 올라 밧줄을 목에 걸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자, 죽을 시간이다. 저 아침해를 바라보며.

난 의자를 발로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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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나랑 약속할 것이 있어요"

그녀는 오른손 검지를 나를 향해 뻗으며 입을 열었다. 난 잠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행동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상당히 당찬 구석이 있었다. 난 그녀의 그런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사라질 듯 웃는 저 눈웃음 사이로, 그녀가 얼마나 대담한 행동을 할 것인지 알기에 난 그녀를 남몰래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확답을 받기 위해서인지 손을 불쑥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약속해요, 나랑 얘기했던 건 다 지키기로"

"그럽시다"

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적당히 따뜻한 그녀의 손이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다짐, 약속, 신뢰? 글쎄.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원하니 그렇게 할 수밖에. 난 그녀의 말에 모두 따르기로 했다. 그로 인해 벌어질 모든 일들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원하니 난 한다, 그저 그뿐. 나에겐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말뿐이라면 얼마든지.

"이전에 했던 얘기들 기억해요?"

물론, 기억 하다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반응에 놀란 것인지 작았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녀는 의자를 끌고 와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자뭇 진지한 얼굴로 -그녀 나름대로 아주 확고하고 신념에 찬 진지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그녀의 그런 행동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이처럼 진지한 표정이 안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고의가 아니었어요, 알았죠? 당신이 잘 못 한건..."

"다 알고 있습니다. 걱정할 거 없어요"

"... 그래요, 믿을게요. 이전에 얘기했던 대로 알겠죠?"

무엇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토끼 같았다. 불안한 눈망울이 날 훑는다. 그래, 이래서 내가 그녀를 믿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눈망울이 날 바라볼 때면 난 죄지은 적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정말 그녀에겐 못 할 짓이지만.

"가요 그러면. 잘해봐요 우리"

"그럽시다"

난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판장은 언제나 그렇듯 지루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선서 어쩌고 하는 시간, 그리고 피해자 증인의 어쩌고. 난 지루한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았다. 변호사 석에 앉은 그녀는 글쎄, 아무래도 그녀가 변호사라는 게 아직도 잘 믿기진 않는다. 처음 봤을 그 순간부터. 피의자를 이렇게 쉽게 믿는 변호사라니. 저 눈망울로 어떻게 이 전쟁터를 이겨낼는지. 난 그녀가 준비해온 자료로 눈을 돌렸다. 어찌 됐던 날 믿어준 사람이다. 아주 미안한 일이지만.

"자 그럼 피의자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열흘 전 세명의 남학생을 죽였습니다. 그 당시..."

어쩌고 저쩌고 묻는 검사의 말이 들린다. 작은 손을 꽉 쥔 그녀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변호사 씨.

"내가 죽였습니다. 일부러 그 시간에 그 새끼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가서 죽였습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재판장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어깨를 눌러 일어나려는 그녀를 막았다.

"열흘 전, 전 그 놈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찾아갔습니다. 한 달 전부터 죽이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날도 그 놈들은 어김없이 여자 한 명을 끌고 와 있더군요. 제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웅성 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 지루한 법정 다툼 이제 끝냅시다, 별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저 빨리, 최대한 빨리.

"전 그 놈들을 죽였습니다. 죄책감? 있을리가요. 사람을 죽여야 죄책감을 느끼지 짐승 새끼 대가리 깬다고 죄책감이 느껴지십니까? 자기 자식을 뜯어먹은 짐승 새끼들한테? 자, 끝냅시다. 전 저 나름대로 벌 받을 테니 그쪽 자식들은 지옥을 가던지, 당신네들의 속이 찢어지든지 말든지. 전혀 상관없으니 빨리 판결 내리고 갑시다, 재판장"

짐승 새끼들의 부모가 소리치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 울부짖고 원망하고 분노해라. 내가 네놈들의 새끼들한테 그랬던 것처럼. 문득 바라본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 마음 약해서야 여기서 어떻게 뭘 하겠다고...

"거-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난 손을 뻗어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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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조용한 골목으로 찾아들어갔다. 어두운 골목 한 귀퉁이에 박스를 움직여 그 사이에 몸을 누였다. 이 차가운 겨울밤 바람을 박스가 막아주길 바라면서. 밤은 길었다, 빌어먹게도 나날이 날씨는 추워져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로선 알턱이 있나, 추운 겨울의 밤이란 끝날 줄 모르는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언제나와 다름없이 오늘도 수확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에선 굶주린 배를 채우기엔 턱없이 모자란 양의 먹을 것들 뿐이었다. 굶주린 배를 애써 잊으려 박스 안으로 몸을 더욱 욱여넣었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도 나날이 늙어가고 있었다. 먹을 것을 구하려 밤거리를 쏘다니던 체력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터다. 더군다나 이 추위 앞에서야.

이 밤거리에서 상념은 좋은 버릇은 아니었다. 살아있음을 유지시키는 건 결국 먹을 것과 안정된 수면. 이따위 얕은 상념은 결국 모든 것을 망칠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저 골목길 끝으로 보이는 화려한 땅의 별빛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물론 이 상념의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추위와 함께 갈수록 길어지는 이 시간을 어찌 됐든 무료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추위와 함께 사람들의 얇은 옷은 두꺼워져만 갔다. 바닥까지 끌릴 것만 같은 긴 옷들을 주렁주렁. 그들은 몸에 두를 수 있는 박스를 걸치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사람이란 참으로 눈을 뗄 수 없는 존재였다. 어둠만이 가득한 이 으슥한 골목에서 그들의 행위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 자리 잡은 시간 동안, 저들이 다니는 밤은 낮보다 더 밝아졌고, 저 위의 하늘보다 별이 많게 되었다. 반짝거리는 그것들이 저마다의 색으로 반짝거리며 사람들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온기가 부서지듯 땅 위의 별들을 가리곤 했다. 마치 안개처럼 흩어지며 또는 부서지며 그 온기는 별들을 가리며, 그리고 서로의 얼굴에 스치며 사라져 갔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서로의 온기를 전해주는 것만 같았다. 물론 내 입에서도 이 하얀 온기가 뿜어져 나오곤 있었지만, 글쎄 그건 이 골목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은 없었다. 적어도 나에겐.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것이라곤 따뜻함 없는 맹렬한 추위뿐이었다.

난 항상 어둠이 깊어갈수록 그들에게서 눈을 떼는 것이 힘들어져 가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몸이 안 좋아져서 일까. 아니면 그저 외로움 때문일까. 여기 이곳에 있는 친구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그 하얀 온기를 나도 느끼고 싶은 것일까. 박스에 몸을 더욱 기댔다. 차가운 바람이 조금은 나를 피해 가기를 바라면서 눈을 감았다. 어찌 됐던 내일도 살아가기 위해선 찬란한 땅의 별들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조금이라도 자야 했다.

"야, 여기봐바"

눈을 감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난 조심스레 눈을 떠서 소리를 낸 사람을 찾았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와 무릎을 낮추고 손을 내밀었다.

"안녕? 여기 춥지 않니?"

난 몸을 일으켜고 눈을 비볐다. 사람들이란, 가끔 이렇게 다가와 먹을 것을 주기도 한다. 그게 선의이든 그저 동정이든. 아이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머리 위로 아이의 하얀 온기가 뿜어져 내렸다. 땅의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 너무나도 선명히 하얀 온기가 보였다.

"나비야,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난 아이의 손에 머리를 부볐다.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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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가을바람이 낙엽을 쓸어내자, 네가 망친 내 추억이 그리움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도 괴로워하며 슬퍼하며 네가 나에게 주었던 모든 상처들이 가벼운 가을바람을 타고 무겁게 나를 내리눌렀다. 넌 그렇게 날 떠났지만, 난 그 상처와 함께 널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이가 들면 사랑에 눈물 흘리지 않는다는 말은, 정말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의 헛소리에 불과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정말이지 틀린 이야기였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감에도. 그 시절 네가 남긴 상처는 아직도 날 눈물짓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너를 그리워했다. 미련한 감정은 네가 남긴 상처를 추억으로 뒤덮어, 그리워해선 안될 널 그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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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넌 겉보기엔 괜찮아 보였다. 그렇기에 넌 가슴 깊숙한 곳부터 썩어 어그러져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널 판단했다. 네가 하는 행동 하나, 말하는 토씨 하나, 일하는 모습, 움직이는 일상, 삶을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의 틀에 널 끼워 넣었다. 그게 네가 살아가려 함으로써 하는 지극히 괜찮은 척하는 모습이란 걸, 지옥과도 같았던 경험은 기억 속 어딘가로 묻어두려 노력이었단 걸.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너의 상처를 후벼 파고 있었다. 가슴을 도려내고 후벼내어 너의 눈물을 봐야만 너의 상처를 이해하는 척할 수 있었기에. 피해자는 피해자답게, 우리의 잣대로 너의 괜찮은 모습은 정의가 아니었다.

네가 울고 화내며 분노하고 절망하며 슬퍼하고 울분을 토해내길 바랐다. 피해자인 너에게 웃음은 있을 리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너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널 위한다는 핑계로 널 죽여가고 있었다. 너의 상황은 신경 쓰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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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의 그 악의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너의 악의가 주는 희열이 죄책감의 송곳으로 변해 심장을 찔러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너의 악의에 일종의 경외감을 가진 채, 순수한 악의, 분노를 뿜어대는 널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모공을 쭈뼛하게 만드는 그 난데없는 악의는 너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너를 두려워함과 동시에 애정 할 수밖에 없었다. 너의 그 악의는 순수하리만치 섬뜩하여 내 죄책감을 짖뭉게는 것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희열을 선사했다. 그래서 난 너를 욕하며 미워하며 분노하면서도, 너를 기다리며 그리워하며 바라고 있었다. 너의 악의에 진저리 치면서도 그 악의에 열광했다. 너의 악의란 나에게 그런 것이었다.

죄책감으로 말미암은 카타르시스는 날 너의 악의에 동조하게 만들었다. 인격적으로 도의적으로와 같은 말 따위는 집어치운 채 순수한 너의 그 악의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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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게 가혹한 것은 어찌 보면 자신에게 하는 일종의 화풀이와 같았다. 혹은 가학, 스스로에게 행하는 DV. 아니, 자신에게 하는 것이니 자해라고 해야 할까. 자기 자신의 이상점에 자신을 비교하여 내리는 스스로의 형벌. 그것과 같이 내리워진 모든 자기부정. 마음속의 아이언 메이든에 내 정신을 욱여넣고 꼬챙이에 꿰뚫려 추악한 속내를 흘려댔다.

마조히스트라 부르는 게 맞을 것만 같은 지독한 자기 검열, 부정, 그리고 혐오. 그것은 다른 이에게 나를 맞추기 위한 과정이었고, 또 그들과 다름없이 그들 틈에 섞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보여주기 위한 과장. 난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자존감은 땅으로 떨어져 내렸고, 자애심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틈이 필요했다. 아주 작은 틈, 아이언 메이든의 아주 작은 미약한 틈 사이라도. 숨 쉴 수 있는 아주 작은 틈. 헐떡이는 숨이라도 쉬게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그런 미세한 틈.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은 끝날 수 없었다. 죽기 전에는. 살기 위해선 아주 작은 숨이라도 헐떡이기 위해선 나에겐 아주 작은 틈이라도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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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

꺼지는 불 빛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의 방에서 내 목소리가 들릴 리 없음을 알지만 난 항상 이렇게 말을 건넸다. 가로등 불빛이 들지 않은 벽에 기대서서 난 네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밤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네가 집으로 올라간 뒤에도 한참을, 불이 꺼지기까지 또 한참을. 난 밤공기에 흐려진 너의 뒷모습을 생각하며 시간을 흘렸다.

오늘은 이만, 너에게 들릴 리 없는 마지막 말을 하고 걸음을 옮겼다. 널 알게 된지 며칠, 몇 달, 그리고 몇 년. 계절이 바뀌고 같은 계절이 오기를 몇 번. 난 언제나 널 바라보았고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생각을 하며 널 배웅했다. 나만 알고 있는 너의 행동을 난 매번 같이 반복하며, 머리 속에 널 그렸다.

너의 검은 머릿결, 하얀 피부, 붉은 입술, 가늘고 긴 손가락, 치마 밑의 부드러운 허벅지, 작은 발. 머리 속에 널 그린다. 난 너를 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잘 자, 내 사랑"

너에게 들릴 리도 없고 네가 날 알리도 없지만. 오늘도 또 불 꺼진 너의 방을 바라보며, 너에게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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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이.  (0) 2019.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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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 어딘가 그 어딘가에 당신이 살아있을 거라 믿습니다. 내 목소리도, 내 몸짓도, 내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그 먼 곳에 당신이 살아있을 거라 믿습니다. 아주 멀고 멀어서 당신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먼 곳에 있으리라 믿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삶을 꾸리고, 당신의 언어로 말을 하고, 당신의 몸짓으로 다른 이들과 삶을 꾸려가리라 믿습니다. 내가 없는 그곳에서 당신이 분명히 살아있으리라 믿습니다. 말도 몸짓도 우리의 추억도 없지마는, 당신이 살아있으리라 믿습니다.

당신이 날 찾아오지 않는 것이 그저 내가 싫증이 나서, 나라는 사람을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기를, 내가 미워서, 혹은 나와의 추억이 악몽과 같아서. 그래서 당신이 나를 찾지 않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당신이 내가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에 살아있으리라 간절히 또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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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이.  (0) 2019.01.29
어차피.  (0) 2019.01.29
Posted by Ralgo :
시간은 내 의지와 다르게 천천히 흘렀다.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가 늘어진 테이프 소리처럼 들렸다. 손톱을 물어뜯었다. 손톱 거스러미를 따라 쭉 뜯겨 올라가는 살덩이에 피가 흘러나왔다. 손톱을 따라 핏방울이 뚝. 시계는 오후 네시를 넘어 흐르고 있다. 또각 거리며 손톱을 물어뜯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고통이 시간의 흐름을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고통이 강하면 강할수록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손톱 끝에 가 있는 것처럼. 또각 또각. 잘게 뜯긴 손톱 조각들이 입안을 거칠 거리며 돌아다녔다. 침을 모아 바닥에 손톱과 같이 뱉어버렸다.

노을의 끝자락은 유난히도 길었다. 입안을 맴도는 핏방울이 비릿했다. 또각-. 더 이상 고통으로 정신을 붙들어 매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야, 시간은 여섯 시로 다다랐다. 몸속 어딘가에 불안함을 생산해내는 공장이 있어서, 불안한을 미친 듯이 생성해 나가는 것만 같았다. 손 끝이 욱신거리었다. 입안에 맴도는 피맛이 묘하게 선명했다. 노을이 사라져 어둠만 남을 때쯤, 집 앞에 도착했다.

난 또 손톱을 물어뜯었다. 또각또각또각또각. 내 의지란 참으로 박약해서 저 작은 금속 문고리 조차 돌리질 못하고 있었다. 비릿한 피맛이 불안함을 가려주는 약인 것처럼 계속해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열 손가락이 모두 뻘겋게 물들고 나서야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 문고리가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차가운 적막은 불안함을 증폭시켰다. 간신히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적막이 폐부 깊숙이 들어차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간신히 문고리를 돌렸다. 끼익 하는 소리 이후, 역시나 예상하듯 그 차가운 적막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난 차마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채 간절히 눈을 굴렸다.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아니 익숙해지지 않기를. 내 눈이 이 어둠을 가려낼 수 없기를. 언제나 내 희망은 현실과 어긋나 있었다. 이젠 또각거릴 수도 없는 손톱을 입으로 가져갔다. 비릿한 피맛이 정신을 일깨웠다. 어둠 속 어머니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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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