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의 일기장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냐이는 나이의 오타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쩐지 냐이라고 하는 것이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같아서 좋았다. 나이를 먹음에 있어서 항상 늙어간다는 슬픈 일만이 아닌, 고양이의 그것과 같이 누군가에겐 기쁨으로 누군가에겐 정감으로 남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냐이라고 하기로 했다.'
참으로 그 아이다운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끄적끄적-./불편한 이야기-여섯달.'에 해당되는 글 23건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통스럽지 않게 죽길 바랬다. 그게 눈을 감은 채로 잠든 것과 같은 죽음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될 터였다. 죽음은 언제나 내 목 밑에서 내 숨통을 조이곤 했다. 턱을 타고 코 끝을 넘실거리는 죽음은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이, 언제나 숨만 간신히 뻐끔거릴 수 있게 숨통을 슬며시 열어주곤 했다. 온몸에 주렁주렁 달린 이 차가운 장치들이 죽음의 물결에서 내 머리칼을 움켜쥐고 간신히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난 언제나 이 차가운 병동 안에서 죽음을 꿈꾸곤 했다. 살기를 바라면서 더욱 오랜 시간 이승에 머물길 바라면서, 그러면서도 아주 초연히 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모든 고통은 배제하고 싶었다.
부지불식간에 날 덮치는 고통은 죽음이란 녀석의 장난질에 불과했다. 언제든 난 그 녀석 안으로 빨려 들어 어둠 속으로 고통밖에 남지 않은 어둠 속에서 저 죽음 밖으로 손 끝 하나라도 뻗어보려 애쓰는 것이다. 죽음은 웃고 있을 터다. 이 병동에서 난 요주의 인물이었다. 비정한 운명 앞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고 죽어 바스러질 몸뚱이, 의사들의 눈은 내 죽음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기적, 그래 그들 눈에는 이만큼이고 살아있는 내가 기적과 다를 바 없었다.
나도 죽고는 싶었다. 휘몰아치는 고통 속에서 내 삶은 더욱 비참한 신세가 될게 뻔함에도 불구하고 난 죽지 못했다. 감정이라곤 하나 없는 이 매정한 줄들은 날 죽지 않게 했다. 나날이 곯아가는 내 몸뚱이가 살아있음은 과학의 산물일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똥밭을 구르는 것과 다를 바 없음에도 난 꾸역꾸역 삶을 하루하루 지내고 있었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고통스럽지 않게 죽고 싶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살아있는 이상, 꾸역꾸역 이 하루를 지새워 노을을 바라보고도 싶었다. 죽음이란 녀석에게 무릎 꿇고 빌더라도.
화염병을 들었다. 언제든지 불을 붙일 수 있게 라이터를 들었다. 태양의 이글거림보다 저 밑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이 더욱 뜨거웠다. 불길은 언제든지 우리를 집어삼킬 것처럼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옆 가게 김 사장은 굵은 땀방울을 닦아내며 계속해서 욕지기를 내뱉었다. 불이 붙은 화염병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온갖 소리가 귀를 어지럽힌다. 모든 것이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는 비디오 같았다. 늘어진 화면으로 모든 소리와 동작과 상황들이 질질 늘어지며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콧 속을 매캐하게 파고드는 향기만이 늘어진 시간과 다르게 강렬했다. 난 늘어진 시선을 김 사장에게서 저 밑에서 물대포를 쏴대는 경찰에게 돌렸다.
어린 저 경찰의 머리 위로 화염병이 떨어져 내린다. 검은 그의 몸뚱이에 불길을 머금은 기름이 흘러내렸다. 갈 곳 없는 분노는 저 어린 경찰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대치하는 우리네의 입장과는 전혀 상관없는 저 어린 경찰의 머리 위로 쓸 데 없는 불길이 치솟았다. 하늘 위로 쏟아졌던 물줄기가 옥상을 적시고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손에 들었던 화염병을 내려놓았다. 손에 들었던 라이터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미 몸은 쏟아지는 물줄기에 젖어 눈물 같은 물줄기를 바닥으로 뚝뚝 떨구고 있었다.
저 바닥이 여기 이 곳보다 높은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우리의 삶은, 불길과 물길에 막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누구네의 대변도 못 할 이 상황은 결국 이렇게 끝날 운명이라 생각 들었다. 옥상 난간은 참으로 저 바닥보다 낮은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바닥으로 더 떨어질 곳이 없는 이 옥상은 불길에 뒤덮여 매캐한 연기만 하늘로 뿜어댔다. 이제 저 바닥으로 불길이 없는 저 바닥으로 뛰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바닥으로 저 바닥으로.
쭉 뻗은 길을 달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는 스트로브 잣나무 군락이 스쳐 지나간다. 도로는 끝없이 이어진다. 일정한 속도로 뻗어가는 아스팔트 도로는 지평선과 맞닿아 끊임없이 토해내 진다. 매정히도 시간은 뜨거운 태양과 맞물려 끝을 향해 달린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떨어져 버리지 않게 계속해서 저 태양 안으로 차를 달린다. 이카루스 마냥 솟아있는 산맥이 눈 앞을 가로막는다.
차는 도로를 달린다. 끊김 없는 저 길을 달린다. 수 시간 이어진 고된 운전은 졸음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라디오를 튼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이어지는 말의 연속이 귀를 간질인다. 시간은 차와 같이 이동했다. 저 멀리 수평선 끝으로, 밤이 찾아오는 노을의 시간 틈으로, 기어코 바닥으로 충돌한다. 어둠은 태양의 폭발과 함께 찾아왔다. 스리슬쩍 어둠을 두른 별들은 보이지 않는 대지를 비춘다.
난 여행을 계속한다. 차를 몰아 저 어둠을 달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는 저 스트로브 잣나무 길 사이를 내달린다. 저 지평선 끝 어둠을 두른 별들을 향해 차를 내달린다.
그녀는 깨달았다. 그건 오늘 자신이 죽을 거라는 직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확신.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원리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계속되어온 이 예지와 같은 일들은, 불길하게도 높은 확률로 현실이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났다. 일종의 저주라고나 할까 아니면 신의 저주? 알게 뭐란 말인가. 그녀는 엄습해오는 공포를 억지로 짓눌렀다.
사실 사람의 운명이란 끝이 정해져 있는 게임일지도 몰랐다. 자기 의지로 행하는 모든 것들이 신의 게임판 위에서 차근차근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 끝은 결국 신의 놀음질에 의해 누군가는 빨리, 또 누군가는 오랜 시간 동안 버티고 버티다 절벽으로 쿵-. 그런 것이리라. 그녀는 오랜 시간 반복되어온 그 직감으로 인해 알 수 있었다. 오늘 자신은 죽는다.
그녀에게 죽음이란 멀리 있지 않은 것이었다. 언제나 삶의 옆에서, 외줄 타기의 벼랑처럼 그녀와 함께해 왔다. 주위의 누군가가 죽는 것은 그녀에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오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부모가 죽었을 때도, 또 자신의 아이가 죽었을 때도. 그녀는 그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삶은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든 죽음은 삶으로 삶은 죽음으로 뒤집히는 것이다. 사람의 운명이란 바람에 흩날리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 상황에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직감에서 일어난 공포란 어디서 일어나는 것일까. 죽음, 공포, 삶의 마지막. 그녀는 발바닥을 간질이는 공포가 어느새 온몸을 덮친 걸 느끼고 있었다.
붉은 피가 쏟아질 것이다. 머리 위로 쏟아진 붉은 피는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려 눈 위로, 콧방울을 타고 흘러 턱으로, 그리고 목을 타고 가슴을 적실 것이다. 배를 지나 허벅지를 적신 붉은 피는 땅으로 떨어져 찌걱 거리는 피의 연못을 만들 것이다. 그녀는 처음 느껴보는 죽음의 공포란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것은 다른 이들을 통해서는 느낄 수 없는 삶에 대한 욕망. 불타오르는 뜨거운 열망.
살고자 하는 의지!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생전 처음으로 삶을 향한 욕망을 느꼈다. 복부를 간질이는 그 열망은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살고 싶다. 절실히 살고 싶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직감을 되짚어 죽음의 흔적을 찾았다. 피, 머리칼을 적시는 그 피! 밖은 위험하다. 그녀는 집안에 틀어박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째깍째깍-.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한 시간, 그리고 두 시간. 그녀의 시간은 천천히 자정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열두 시. 댕댕-하는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치밀어 오르는 살고자 했던 열망은 눈물로 터져 나왔다.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댕댕-.
뻐걱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 위로 지붕이 부서져 내렸다. 피, 붉은 피. 그녀의 머리칼이 붉게 물들었다. 댕댕-하는 소리가 또 이어졌다. 아직 시곗바늘은 열두 시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당신의 희망이듯 당신도 나의 희망이었다. 당신의 어둠이 밤하늘의 별을 지우듯, 끝없는 어둠뿐인 당신이라도 당신은 나의 희망이었다. 당신과 함께 걷는 것이 어둠 속에서 어둠으로 한 없이 걸어나가야만 하는 여정이라도, 난 당신의 온도만 있다면 당신과 함께 어둠 속을 걷기로 했다. 내가 당신의 희망이었기에 난 당신의 희망이 되기로 했다. 그대가 그러쥔 내 숨통은 어찌 보면 우리의 빨간 실 일지도 몰랐다. 그대의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나에겐 이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되었다. 당신의 곁에서 당신이 있음으로 당신의 존재로 인해, 난 당신의 희망이 되기로 했다.
외로움과 어둠이, 저주와 같은 고통이 당신을 집어삼켰다. 내가 당신의 희망이기에, 그리고 당신이 나의 희망이기에, 난 당신의 횃불이 되기로 했다. 내 온도가 당신을 그 추운 외로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해주기를. 어두운 추위 아래서 우리 둘이 어깨를 맞대고 있을 수 있기를.
언젠가 당신이 당신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댈 때. 그때에는 별 하나 없는 저 어두운 하늘에 별이 떠 있기를 바랐다. 내가 당신의 희망이기에 난 당신과 이 여정을 비추는 별 빛이 되기를 바랐다.
그대가 나의 희망이기에 난 그대의 절망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에 괴로워했는지도 모른다. 난 매일매일이 눈 덮인 산을 맨발로 걷는 기분이었다. 발바닥을 차고 오르는 것 같은 괴로운 고통은 날 점점 차갑게 파묻고 있었다. 크레바스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난 나만의 골짜기 틈에서 괴로워했다. 그대가 내 눈에 보이지 않음에 절망하며 그대가 나타나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절망은 혼자의 힘으로 올라갈 수 없는 거대한 얼음 벽과 같았다. 추위는 외로움을 만들었다. 외로움은 나의 마음을 얼렸다. 난 보이지 않는 그대에게 욕을 퍼부으며 날 구원해주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그건 나의 이기심으로 발로 된 희망이었다.
그대는 나의 희망으로 인해 거대한 크레바스 밑으로 끌려내려왔다. 내가 없었으면 한다는 생각은 행동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올 수 없었다. 난 간신히 드러난 당신의 발목이라도 그러쥐고 있어야 살 수 있었다. 그대가 발을 휘둘러 날 떨궈내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난 그대를 놓을 수 없었다. 그대가 내 희망이었기에 그대를 끌어내렸다. 그러쥔 발목을 놓지 않고. 그렇기에 난 그대의 절망이었다.
의지란 참으로 박약했다. 그대를 놓을 수 없음에 난 절망으로 더욱 떨어졌고, 그것은 결국 그대가 내 희망이 되게 했다. 미안함은 없었다.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기에, 더욱 외롭고 추운 저 크레바스 밑으로 밑으로 그대와 같이 얼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과정은 결과에 첨착 된다. 결과는 과정에 의해 결론지어진다. 그렇다면 과정과 결론은 서로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선은 악으로 인해 존재한다. 악은 선으로 인해 조명된다. 그러하니 악과 선은 동일시돼야 하는 것 아닌가. 행동은 말에 의해 의미를 갖는다. 말은 행동에 의해 가치가 성립된다. 행동과 말은 서로에게 상관관계가 있는가.
움직이는 것은 삶을 영위한다. 영위하는 것은 의지를 갖는다. 따라서 의지를 갖는 것은 움직인다. 삶은 복합적이다. 복합적인 것은 혼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혼돈은 복합적인가. 그렇다면 단순한 것은 안정적이라 할 수 있는가. 움직이는 것은 복합적인가 안정적인가. 의지란 것은 복합체의 연속일 테니 복합적인가. 그렇다면 움직이는 것은 혼돈인가. 그렇다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안정적이라 할 수 있나.
혼돈은 악인가. 그렇다면 악은 복합적이다. 선은 안정적이기에 단순한가. 사람은 복합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혼돈이며 악인가. 생각은 부유한다. 부유하는 것은 흩어진다. 그렇다면 생각은 흩어지는가. 흩어지는 게 생각이라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 되는가. 결국 생각은 이렇듯 부유하며 흩어지는 게 당연한 것인가.
또 비가 쏟아졌다. 난 어느샌가 저 비에 맞춰 노란 우산을 들고 오는 너를 기다리게 됐다. 그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노란 우산을 쓰고, 편의점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널.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된 것은 널 만나고 난 이후였다. 여느 때처럼 비 오는 날이면 노란 우산을 들고 다시금 네가 나타날 테니까. 난 두근 거리는 마음을 붙잡으며 비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편의점이란 참 지루한 공간이었다. 마치 늘어진 테이프처럼 시간도 소리도 공기마저도 모든 것이 지루하고 느리게 흐르곤 했다. 편의점 앞에서 노란 우산을 쓰고 입에 문 담배를 한참이나 피우고 나서도 넌 들어오지 않았다. 난 네가 손을 휘저으며 담배 연기를 없애는 그 모습이 좋았다. 투박한 두 손이 연기를 휘저어 빗줄기로 사라지는 그 순간이 좋았다. 네가 딸랑 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좋았다. 너와 함께 들어오는 흙냄새와 옅어진 담배냄새가 좋았다. 나에게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하는 너의 모습이 좋았다.
여느 때처럼 넌 담배를 사고 다시 그 빗줄기로 사라질 터였다. 시간이란 참 야속하게도 편의점에 너와 나 단 둘이 있는 이 시간은 찰나와 같이 흘렀다. 시간은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넌 여느 때처럼 담배를 사고 문을 열었다. 난 또 빗속으로 사라지는 너의 등을 바라보았다. 잡을 용기도 그렇다고 말을 걸 용기도 없어서, 노란 우산이 반쯤 걸쳐진 너의 그 등을 쳐다보았다. 네가 저 빗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멀리 떠난 내 님이여, 이 밤이 지나면 돌아올까.
애끓는 마음으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한 채, 내 님이여.
멀리 떠난 내 님이여, 꿈은 이리도 선명한데
내 님이여 굽이굽이 돌아오나, 이제라도 돌아오나.
언제까지 그 멀리서, 이 긴 밤이 지나면 돌아올까.
멀리 있는 내 님이여, 언제라도 돌아올까.
멀리멀리 저 멀리 떠난 내 님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