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앞에는 붉은 전망대가 있습니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전망대라고 하기에도 조금 민망한 그런 것입니다만. 그 붉은 전망대는 이제는 운영하지 않는, 폐건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밤바다의 길을 비추는 등대 였다고도 합니다만 세월의 흐름 속에 더 이상 밤바다를 비출 필요가 없어진 등대는 밤바다에 빛나는 전망대가 되었습니다.

전 이 전망대에 아주 몰래 오르곤 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이 전망대를 싫어하셨습니다. 저 붉은 전망대를 보고 있노라면, 밤바다에 멀뚱히 서서 노란빛을 발하는 저 붉은 전망대를 보고 있노라면. 어머니는 저 바다에 가라앉은 영혼들이 모여드는 것만 같다고 했습니다. 밤바다에 죽은 영혼들이 붉은 원한을 가지고 영혼을 불태운다고 말이지요.

그렇게 따지자면 전 참 말을 안 듣는 아이였습니다. 전 시시때때로 이 전망대에 올라 밤바다에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검기만 한 바다 위에 전망대에서 떨어져 내리는 빛이 조금 비추는 그 순간이 좋았습니다. 저 멀리서 통통배가 어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 배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안정감마저 느끼곤 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이 밤바다가 주는 선물 같은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밤바다에 마음을 뺏긴 채 돌아온 뒤에는 항상 어머니께 혼이 났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는 몰라도. 그 후로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어머니가 그 전망대를 싫어하시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죽게 만든 등대, 밤바다에 가라앉힌 등대였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아직도 저 붉은 전망대에 오릅니다. 마치 밤바다에 영혼을 뺏긴 것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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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멈춤, 정지, 그만. 사실 우리네의 인생이란 어떠한 일을 중지하는 일의 연속일 것이다. 모든 행위에 있어서 중단하고 포기해가는 과정 속에 다른 어떠한 행위로 떠밀리듯 밀려나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따지고 본다면 우리네의 자유의지란 어찌나 빈약한지 알 수 있다. 나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닌 포기해 가는 과정, 양손에 과자를 들고 다른 것을 더 받을 수 없을 때, 아이의 선택이란 어떠한 것의 포기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일 거다. 굳이 따지자면 진화의 과정도 포기가 아니던가. 살아남기 위해, 종족의 번식을 위해, 포기해가는 것은 자연의 섭리와도 같을 것이다.

일어설 수 없는 새끼를 버리고 가는 초원의 말처럼, 사냥을 하지 못하는 늙어버린 사자가 버려지는 것처럼, 나무 둥지의 새끼들을 밀어 떨어트리는 저 새들처럼. 모든 것은 포기와 같았다. 우리네의 인생사에 저들의 생사를 대입해보자면 포기란 멈추는 것과 같았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 우리네의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길 멈추면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게. 대학도, 취직도, 하다못해 결혼과 아이와, 그리고 삶에서 있어서까지. 그것은 중지하는 일의 연속일 것이고 종래에는 결국 삶도 멈추는 것과 동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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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사람은 아마 악하게 태어날 것이라 믿는다. 누군가의 괴로움, 혹은 슬픔. 고통과 불행을 주제로 한 비극이란 극의 장르를 봐도 그렇다. 누군가가 괴로워하면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 과정을 지켜봄으로써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그것은 아마 인간이 악하게 태어난 증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이 사람답게(여기서 사람답게란 흔히 선한, 도덕과 규범을 잘 지키는 따위다) 살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 또한 비극의 범주에서 자신은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교육과 법으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걸 최소화하기 위한 일 따위가 아닐까. 자신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당하는 게 싫은. 그렇다면 사람운 태어남 자체로 악한가? 악하게 태어났으니 그들은 갱생의 여지가 없나? 그렇다면 성인은 왜 만들어지는 것이고 왜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인가.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아까 말했던 비극이란 장르에 기대어 다시 한번 설명할 수 있다. 성인, 그들은 그들의 비극에 심취한 사람들이다. 난 단연코 그렇게 믿고 있다. 자신을 비극으로 조금씩 차근차근 몰아넣음으로써 그들은 거기서 느껴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카타르시스로 보상받는 것이다. 그건 마치 어떠한 중독과도 같은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비극, 자신의 희생에 대한 카타르시스. 그것에 중독되어버린 자들의 행위라는 것이다.

나비의 날개를 찢고 개미의 몸에 불을 붙이는 아이의 순수함이란, 그저 남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자신은 그 비극의 뒤에 숨어서 웃을 수 있은 그런 악함이 아닐까. 사실 비극을 즐기는 모든 이가, 세상의 모든 비극이 아이의 순수함과 같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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