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시계를 본다. 여섯 시 반. 대충 몸을 추스르고 정신을 차린다. 일곱 시. 옷을 입고 외출 채비를 한다. 일곱 시 반. 잠시 멍하니 시간을 보낸 후, 집을 나선다. 여덟 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를 기다린다. 여덟 시 십분. 늦게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 카드를 찍는다. 삑-하는 무성의한 기계음이 들린다. 아무 창가에나 앉아서 창문을 열고 몸을 기댄다. 여덟 시 이십 분. 목적지가 다가올수록 시계를 바라보는 시간이 잦아진다. 여덟 시 삽십분. 삼십일 분. 삼십이 분. 삼십삼 분. 목적지에 내린다. 여덟 시 삼십오 분. 주위를 한번 살피고 후욱-숨을 내쉰다. 얼마나 올라야 정상을 볼 수 있을까. 오랫동안 굳어있던 몸을 억지로 움직인다. 온갖 관절에서 삐그덕 소리를 내며 산을 오른다. 아홉 시. 아직 정상까진 멀었다. 하지만 이미 한계. 이쯤 할까?라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다시 몸을 움직인다. 언제 또 할 수 있다고. 아홉 시 반. 정상이 코앞이다. 토할 것만 같은 몸을 채찍질해 정상에 다다른다. 정상에 서서 바라본 마을은 아름다웠다.
작고 수수했지만 아름다웠다. 드문드문 보이는 논밭과 푸른 소나무. 슬쩍슬쩍 보이는 사람들. 뛰어노는 어린아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마실 나가는 할머니. 평상 위에 앉아 소나무 그늘을 차양막 삼아 장기 두는 할아버지. 뭐가 그리 신나는 건지 이리저리 뛰어노는 똥개.
아름다웠다. 이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예전부터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꼭 한번 해봐야지. 꼭 한번 해봐야지 했던 것.
"야-아-호-!!!"
있는 힘껏 내지른다. 생각만큼 큰 소리를 내지르지 못했지만 속이 후련했다. 다만 영황에서 보던 것처럼 야호~호~호오~하는 메아리를 듣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열 시 반. 몸을 추스르고 다시 걸음을 재촉해 산을 내려왔다. 드문드문 보이는 등산객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고개를 마주 끄덕이곤 발을 움직인다. 산에서 볼 때는 멀리 있던 다른 세상의 풍경 같던 마을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온다. 커다랗게 눈 앞에 펼쳐진다. 열한 시 반.
꼬르륵-배고픈 소리에 괜히 기분이 좋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약간은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선다. 된장찌개를 시키고 앉아있으려니 입안에 침이 고인다. 잠시 그렇게 있으려니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가 나온다. 수저를 뻗어 한입. 구수하게 퍼지는 된장찌개의 향.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음식의 맛이 이리도 좋았던 거였나. 배가 터질 것처럼 밀어 넣는다. 꺼억-하는 트림 한번. 잠시 배를 두들기며 그렇게 앉아있는다. 몇 분이나 흐른 뒤에야 간신히 몸을 일으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선다. 열두 시 이십 분.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잠시 기다려 지나가는 마을버스에 몸을 싣는다. 열두 시 오십 분. 마지막 줄 바로 앞, 바퀴가 있는 자리 뒤.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없이 휑~하니 펼쳐진 도로. 가끔 보이는 논밭. 스쳐 지나가는 전봇대.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 문뜩 바라본 하늘은 비라도 내릴 것처럼 검은 먹구름이 몰려든다. 나는 몰려드는 졸음을 몰아내려 머리를 흔들고, 시계를 바라본다. 한시 오십 분. 벌써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그리고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구나. 후우-하고 숨을 내쉰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하고 버스에서 내린다. 두시. 주변을 살펴 목욕탕을 찾는다. 꽤나 허름한 목욕탕을 발견하고 문을 열고 들어선다. 삐그덕-하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꽤나 뻑뻑한 문이지만 여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 안에 들어가 카운터에서 돈을 계산한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지폐 몇 장을 꺼내 건넨다. 주인장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마주 끄덕이고는 목욕탕에 들어선다.
옷을 대충 벗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잔뜩 풀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아-맞다. 다시 일어서서 목욕탕 안에 있는 이발소로 들어선다. 바지 하나 입은 이발사가 머리를 흔들고 일어선다. 찌뿌둥한지 기지개를 켜고 가까이 다가온다.
"머리 하실 거요?"
"아... 예"
이발사가 몸에 가운을 둘러주고, 잠시 이발 준비를 하며 물었다.
"어떻게 해드릴까?"
"깔끔하게 해주세요. 깔끔하게"
...오랜만에 어머님을 뵈러 가는 거니 깔끔하게 해주세요... 뒷말은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이발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침없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가운 위로 잘리어진 흰머리가 떨어져 내린다. 가운 위가 흰 머리칼로 뒤덮인다. 나는 잠시 그렇게 잘려나가는 머리를 보며 있었다. 오랜만에 뵈러 갑니다. 어머니. 나는 머리를 자르는 동안 가만가만 떠오르는 기억들을 추억했다.
"거-. 다 됬수. 계산은 나갈 때 하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가볍게 얘기를 하고 마저 몸을 씻는다. 뜨거운 물에 풀어진 몸을 이끌고 샤워기 앞에 다가선다. 차가운 물을 틀어 몸을 헹군다. 후우- 약간은 멍했던 정신이 다시금 맑아진다. 나는 밖으로 나가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린다. 오랜만에 보는 내 얼굴에 어색한 것도 잠시, 스킨을 얼굴에 펴 바른다. 어디 한 곳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곤 문을 열고 나선다. "아 저기-"하는 소리를 듣고는 아차!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건네어준다. "잘 가십쇼~"하는 소리에 맞춰 삐이걱-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시계를 바라보니 네시. 근처 옷가게를 들어간다. 조그마한 가게였지만 제일 깔끔한 옷을 찾아 입으니, 나 자신도 꽤나 깔끔해 보였다. 아직도 어색하기는 했지만. 또 주섬주섬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선다. 옷 찾는데 꽤나 시간이 들었구나. 다섯 시 반.
다시 산을 타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산이라기보다는 야트마한 언덕 같은 곳이었지만.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납골당이라 쓰인 푯말이 보인다. 여섯 시. 나는 납골당에 들어서기 전, 옆에 주차되어 있는 차에 얼굴을 비춰본다. 숨을 한번 고르고. 긴장을 풀고. 납골당에 들어선다. 수많은 함 들을 지나쳐 어머니의 이름을 찾는다. 그리고 이윽고 어머니의 유골함을 찾았다. 멈추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간신히 한마디 내뱉을 수 있었다. 고개를 가볍게 숙이었다. 왠지 머릿속에서 텅~텅~하는 목탁 치는 소리가 맑게 들려온다. 고개를 들고 몸을 돌린다. 일곱 시 반. 너무나 조금, 그동안 못 찾아뵀던 시간에 비해선 지나치게 짧은 그런 시간만을 어머니와 마주하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고.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시 마을로 내려온다.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 하나를 사고 주변의 강이 보이는 곳을 찾아간다. 강에 도착해 벤치에 앉자 시간은 아홉 시. 벤치에 앉아 사온 맥주를 따고 한입 들이킨다. 오랜만에 마신 맥주의 탄산은 목을 따갑게 한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단축번호를 누른다. 띠-띠-하는 소리와 함께 신호가 가지만 연결이 되지 않는다. 메시지를 눌러 짧게 단어를 입력한다. '그동안 미안했소.' 얼마 만에 쓰는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건강하시구려. 괜히 날 만나 오랜 시간 고생이 많았소. 고마웠소. 사랑하오. 하고 싶은 말은 머릿속에 넘쳐났지만, 저 짧은 텍스트 하나만을 입력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맥주를 들이켜고. 지나간 추억들을 되새긴다. 아이들에게도 짧은 문자를 남길까 하다가 그만뒀다. 시간을 보자 열한 시.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강물에는 별이 내려앉고 달이 떠올랐다. 검은 물 위로 물고기 몇 마리가 뻐끔뻐끔 고개를 내밀었다가 사라진다. 야트마하게 자란 풀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제 곧 다가올 시간에 괜스레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리고 아침까지만 해도 다가올 것 같지 않았던 시간이 다가온다. 열한 시 오십 구분.
그리고 곧.
열두 시.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키자마자 시야가 어두워진다. 밤하늘 별이 떠 있던 강물이 어두워지어 사라지고,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두운 틈으로 어둠보다 더 어두운 사내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 사내는 너무나도 느긋하게 걸어와 내 앞에 선다.
"하루는 괜찮았습니까?"
"고맙습니다. 내 생애 가장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나는 나에게 손을 내미는 사내의 손을 보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웃을 수 있었다, 마지막 하루. 십 년을 넘게 식물인간으로 살던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하루. 내가 쓰러진 뒤로 날 찾지 않던 아이들보다... 내 머릿속에 항상 살고 계시던 어머님.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승사자 양반"
"말씀하십시오"
"나중에- 우리 마누라 오면... 거...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겠다고 좀 전해주세요"
내 말에 사내는 잠시 멈칫하나 싶더니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사내의 행동에 웃었다.
마지막 하루는 끝나버렸지만 웃을 수 있었다. 행복하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의자에 앉아 책 하나 손에 들고. 가끔은 구름 그늘에 가리어 몸을 식히고, 약간은 김이 빠진 콜라를 한입 입에 머금고. 집을 찾아가는 강아지 한 마리 내 발 밑을 스쳐지나고. 작은 참새 한 마리 짹짹 거리며 내 옆에 날개를 접어 쉬며. 아무런 생각도. 어젯밤 싸웠던 친구의 일 따윈 모두 잊고. 두 귀에 꽂은 이어폰에선 약간은 신나는 그런 음악이 흘러나온다. 문득 여기가 하와이, 혹은 열대지방의 어느 섬. 바닷가라고 생각하고. 흘러가는 구름에서 모양 찾기 놀이를 하듯 여러 가지 동물을 끄집어낸다. 토끼. 고양이. 강아지. 방금 하늘로 날아간 참새의 어미. 쌍둥이 아가. 허리를 숙인 노파. 수많은 그림들을 찾아내고서야 햇빛이 얼굴을 빼꼼-. 뜨거운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져내린다. 뜨거운 햇살에 눈이 찌푸려지고,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머리 위로 들어 햇빛을 가리고, 옅게 생긴 그늘 밑으로 태양을 훔쳐본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햇빛의 갈기. 이리저리 흩날리는 메두사의 머리처럼. 잠시 보고 있자니 눈이 아파와 다시 옅은 그늘에 머리를 감춘다. 시간의 흐름은 오직 구름의 흐름만으로, 태양의 기울기로만 느낀다. 내가 아는 모든 동물 모양의 구름을 다 찾았을 때. 태양이 슬슬 머리를 땅속으로 집어넣고 있는 때가 돼서야 엄마가 돌아온다. 양손에 먹을거리가 가득 든 비닐봉지 두 개. 출렁거리는 봉투 사이로 보이는 내가 좋아하는 먹을거리. 입에 웃음이 걸린다. 두 팔 벌려 엄마를 안는다.
그건 작은 피노키오의 꿈이었어요. 사람이 되는 것. 거칠은 나뭇결의 몸이 아닌 부드러운 피부를 갖는 것.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관절이 아닌 부드러운 움직임의 관절을 갖는 것. 거짓말을 할 때마다 늘어나는 코가 아닌, 늘어나지 않는 코를 갖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어요. 처음 생각을 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꿈꿔왔던 일. 사람이 되어서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것. 제페토 할아버지의 진짜 손주가 되고 싶다는 것.
하지만 꿈은 언제나 꿈일 뿐이었죠. 이루어질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날이 갈수록 삶에 희망이 없어지고. 잔뜩 해왔던 재밌던 일도 이제는 슬슬 질려가고 있었어요. 매일 조금씩 자라나는 자신의 피부결을 대패로 밀며 생각했어요. 내가 사람이 될 방법만 있다면, 그 어떤 힘든 일도 해낼 수 있을 텐데.
그때였어요. 펑-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땅딸막한 요정이 나타났어요. 요정은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을 애써 정리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요리조리 흔들었어요. 요술봉 끝에서 보라색 불빛이 이리저리 글씨를 만들었어요. 요정은 잠시 에헴-하는 작은 헛기침을 하고는 피노키오의 코 앞으로 쑤욱- 다가왔어요. 그리고는 수염에 가리어진 입을 씨익-. 금 색깔 이빨이 드문드문 밝은 빛을 발했어요. 피노키오는 갑작스레 앞에 나타난 요정에 잠시 몸을 움츠렸어요. 자신의 몸을 대패로 밀고 있는 건 그 누구라고 해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심지어 자신을 만들어주신 제페토 할아버지조차도. 피노키오는 손에 들고 있던 대패를 뒤로 슬쩍 감추고는 다른 손으로는 요정을 살짝 밀쳐내었어요. 요정은 등에 달린 작은 날개로 뒤로 쓰윽-날아올라 다시금 요술봉을 흔들었어요. 땅딸보 요정은 다시 한번 에헴-. 작은 헛기침을 하곤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요술봉을 뻗어 피노키오를 가르켰어요.
"너 말이야,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땅딸보 요정의 말에 피노키오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어요. 이 땅딸보 요정에겐 말을 쉽사리 할 수 없었어요. 왠지 어려웠어요. 턱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어요.
"내가 말이야, 단순한 나무인형한테 말이야, 응? 그니까, 응. 내가 움직이게도 해주고 말이야, 이렇게 착하게 살라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이야, 응. 거짓말할 때마다 코도 늘어나게 하고 말이야. 응? 그렇게 해줬는데 말이야. 응? 욕심이 너무 지나치면 안되는거야! 알아 응? 욕심도 적당히 부려야지 말이야"
"... 그래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말이야! 응! 니 놈이 하는 생각이 계속 귓가를 웅웅- 울 린단 말이야! 얼마나 신경 쓰이는 줄 알아!?"
"전 그냥 사람이 되고 싶어요. 피부를 갖고 싶어요.... 늘어나는 코 같은 거 필요 없어요. 매일 이렇게 대패질하는 것도 지쳤어요"
"이게... 아고... 내가 진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 자고 말이야. 착하게 살겠다고... 하이고-"
땅딸보 요정은 한숨을 계속 내쉬었어요. 한참을 그렇게 요술봉을 이리저리 흔들던 땅딸보 요정은 생각을 정리한 건지, 여태껏 흔들고 있던 요술봉을 손에 탁탁 내려쳤어요. 그리곤 씩-다시 그 웃음을 지었어요.
"진짜 사람이 되고 싶냐?"
"예, 되고 싶어요"
"그러면 말이야-"
이후로 땅딸보 요정은 피노키오에게 한참을 이야기하였어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요. 땅딸보 요정을 말을 들을수록 피노키오는 마음속에 담고 잇던 자신의 꿈이 꿈틀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드디어 될 수 있어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한참을 되뇌었어요. 잊어먹지 않으려고 조그마한 조각칼을 들어 자신의 팔에 방법을 새겨 넣기 시작했어요.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 사람이 되려면 바다도 건너고 산도 넘어야 하고 많은 어려움이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되고 싶었어요. 피노키오는 생각했어요. 사람이 된다면 제페토 할아버지와 같이 목욕을 하자고. 제페토 할아버지의 진짜 손주가 되자. 제페토 할아버지를 꽉 끌어안고.
여행을 떠난 피노키오는 산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는 와중에, 작은 여우를 만났답니다. 작은 여우는 큰 눈을 똘망똘망 거리며 피노키오의 다리에 자신의 몸을 비비었어요. 피노키오는 몸을 숙여 작은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답니다. 그러자 작은 여우가 깽깽-거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었어요.
"나무인형아. 넌 혼자 어딜 가니?"
피노키오는 너무나 놀랐답니다. 여우가 말을 하다니요!?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고는 자신에게 말을 건 여우를 바라보았어요. 여우는 고개를 갸우뚱.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여행 중이란다"
"사람이 되기 위해서?"
피노키오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작은 여우는 피노키오의 행동을 보고 잠시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어요. 며칠 전 보았던 놀라운 광경에 대해서 말이죠.
"혹시... 그 방법을 내가 알지도 몰라"
"응!? 어떻게!? 진짜!?"
"응. 거기서는 사자가 사람으로 바뀌고, 다시 사람이 사자로 바뀌기도 해. 곰이 사람처럼 걸어 다니기도 하고, 사람들의 몸이 조각조각 찢기기도 하지만, 반대로 붙기도 하지. 그곳이라면 네가 사람이 되는 방법도 알 수 있을 거야! 분명히! 서커스단으로 가자! 서커스단이야!"
작은 여우의 말에 피노키오는 들떴어요. 사람이 될 수 있다니! 피노키오는 땅딸보 요정이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리기 위해 팔을 바라보았어요. 하지만 흐릿해진 팔에는 '···으로 가라'라는 말만 쓰여있다. 뭐였지? 잠시 고개를 갸웃. 옆에서 작은 여우가 계속 '서커스단으로 가자!'라고 외치는 것을 들었어요. 그래- 거긴 가보다. 피노키오는 작은 여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쫓아가기 시작하였어요
두 명의 사람이 아닌 것들은 금세 서커스단에 도착했어요. 곧이어 피노키오를 본 단장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뛰쳐나왔답니다. 허리에 찬 벨트 위로 두툼한 뱃살이 출렁 튀어나왔어요. 단장은 피노키오의 몸을 이리저리 만지며 씩-웃었어요. 금이빨이 반짝. 피노키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내었어요.
"좋-아. 사람이 되는 방법 말이지? 크하하. 좋아. 알려주지. 알려주고말고"
단장의 말에 피노키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어요. 자기도 모르게 단장의 손을 움켜쥐었어요. 방금 전까지 그렇게 껄끄러웠던 상대였는데 말이에요. 단장은 피노키오의 손을 조심스레 떨쳐낸 후 검지 손가락을 펼쳐 들고 피노키오의 앞으로 내밀었어요.
"단. 여기서 일 년간 일을 해야 해. 너에겐 중간의 작은 막을 맡기지. 그렇게 한다면 일 년 뒤에 너에게 사람이 되는 법을 알려주겠어"
"좋아요! 할게요! 하겠어요!"
피노키오는 잠시도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어요. 단장이 적어준 계약서에 사인을 하였어요. 잠시 지나자 어떤 말이 쓰여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일 년만 지나면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사람이. 피노키오는 자신의 꿈이 눈 앞에 성큼 다가온 것만 같아 너무나 기뻤어요.
그 계약을 한 일 년 뒤, 피노키오에겐 많은 일이 있었어요. 드디어 계약이 만료되고, 사람이 되는 법을 듣는 날, 피노키오는 어두운 골방에 웅크리고 앉아 움이지 않았어요.
수많은 일이 있었어요. 서커스단의 중간 막을 맡은 피노키오는, 뒤에 있을 공연들을 위해서 분위기를 띄워야 했어요. 처음엔 거짓말을 했어요. 코가 늘어나고 관객들은 즐거워했어요. 하지만 그건 얼마 가지 않았어요.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해서 늘어난 코를 잘랐어요. 텅-하며 잘려나가는 코를 보며 사람들이 즐거워했어요. 시간이 지나고, 피노키오는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코에 불을 붙였어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부숴나갔어요. 하나하나. 피노키오는 자신의 몸이 부서져 나갈 때마다 웃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어요. 코가 잘려나가자 자지러지게 웃는 여자부터, 팔을 타고 올라오는 불꽃을 보며 박장대소하는 남자. 다리가 꺾이자 비웃는 아이들, 늘어난 코를 지팡이로 써야겠다며 잘라가는 노인들.
피노키오는 만신창이가 되어 어두운 골방에 앉아있어요. 그을린 팔다리, 몇 번이고 갈아 끼운 몸뚱이. 피노키오가 움직이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있을 때, 단장이 두툼한 뱃살을 흔들며 나타났어요. 금이빨이 씨익-.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요.
"피노키오? 어때. 사회 구경은 잘했나? 내가 말이야-응? 힘 좀 썼지, 응."
단장은 요술봉을 흔들면서 그렇게 말했어요. 땅딸보 단장은 요술봉으로 힘껏 피노키오의 머리를 내려쳤어요. 피노키오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피노키오에게 물었어요.
"어때, 피노키오. 아직도 사람이 되고 싶나?"
피노키오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자신을 바라보던 관객들의 웃음이 떠올라요.
"예. 되고 싶어요"
피노키오의 코가 쭈욱-. 늘어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