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릴 수 있는 것. 그것은 내 여태껏 삶의 모든 후회들에 직결되어 있다. 나는 항상 후회하고 절망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실망하고-. 다시 후회하고.
그런 쓸데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런 것들의 연속에 나는 점점 과거를 회상했다.
그때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그때 이렇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때 그런 식으로 했다면. 다른 생각을 했다면! 후회한다. 되돌릴 수 있는 것-. 되돌아 갈 수 없는 과거. 그리고 되돌아가고 싶다는 희망. 헛된 희망. 그것은 내 맘을 조금씩 무너트렸다. 좀벌레처럼-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나는 썩어 들어가고 있다. 붕괴되어가는 마음을 다시 붙이려 해보았자- 후회는 더욱 커졌다. 자신의 그림자를 더욱 넓히고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 좀먹고 있다.
되돌릴 수 있는 것-. 그것. 되돌릴 수 있다면- 만약. 아주 만약. 되돌릴 수 있는 것이 하나만 주어진다면. 그렇다면. 난. 뭘. 어떻게. 무엇을. 바꿔야 할까. 제일 뒤틀려버린 무엇. 끊어져버린 그것. 생각났다.
나의 꿈. 나의 모든 꿈. 내가 어렸을 적 꾸었던 꿈. 내 이상. 나의 미래. 그것은 내 전부였던 후회. 그래 꿈이었다. 되돌릴 수 있을까. 되돌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붙잡을 수 있을까. 다시 할 수 있을까. 너무-
늦진 않았나.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되돌릴 수 있을까.
"넌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남성의 물음에 여성은 한참을 대답이 없다. 그저 가만히 컵 속의 물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자신의 얼굴을 살피듯. 빨대를 들고 있는 검지 손가락이 툭툭-. 물 잔에 물결을 일으킨다. 남성도 딱히 여성의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던 것인지, 자신의 물음에 대해서 답을 갈구하지 않는다. 손에 들린 핸드폰을 무의미하게 만지작거린다.
"글쎄... 너는?"
"응?"
여성의 대답은 갑작스레 튀어나왔다. 남성은 순간 반응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어느새 여성의 눈은 남성을 향해있다. 하지만 물 잔에 물결을 만드는 그 무의미한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남성의 대답이 늦어질수록 여성의 검지 손가락은 빠르게 움직였다. 물결이 더욱 빠르게 생겨난다.
"아마... 꿈"
남성의 대답에 여성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무의미한 물결 만들기를 그만뒀다. 몸을 의자에 파묻듯이 기대어 앉고는 다시 남성을 쳐다본다. 무료한 표정-. 남성은 여성을 쳐다보지 않는다. 핸드폰을 만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핸드폰... 재밌어?"
"안 궁금해?"
여성의 물음에 남성은 생뚱맞은 질문을 해온다. 하지만 여성은 곧 질문의 의미를 깨닫고 눈을 돌린다.
"응"
여성은 대답을 하고는 기지개를 켠다. 지루하다. 지금 이 자와 있는 시간 모두. 무료한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가자"
"진짜 안 궁금해?"
다시금 남성이 질문한다. 여성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빨대를 집는다. 또다시 물결을 만든다. 거센 물결이 물컵 속을 요동친다.
"그래, 말해봐"
여성의 대답에 남성은 잠시 숨을 고른다. 왠지 입술이 마른다. 계속해서 만지던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여성과 눈을 맞춘다. 둘은 눈을 피하지도 않고 서로 바라보고 있다. 시간이 조금 흐른다. 여성은 따분한 듯 하품을 한다. 지루한 하품 소리가 조용히 퍼져나간다. 남성은 그제야 마음을 굳힌 듯 마른 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연다. 긴장한 것인지 조금은 갈라진 쇳소리가 흘러나온다. 큼 큼-거리는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연다.
"넌 나한테 꿈같은 사람이니까. 내가 어릴 적 꿈꾸던 사람이니까"
남성은 자신의 말에 쑥스러운지 뺨을 긁는다. 여성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가자"
"으, 응?"
"가자고"
여성이 핸드백을 들고 일어선다. 남성은 어정쩡한 자세로 따라 일어나며 다시 입을 연다.
"저... 아무렇지 않아?"
"뭐가?"
"내가 한 말..."
남성은 여성의 눈치를 살핀다. 여성은 그런 남성을 신경 쓰지도 않고 핸드백을 어깨에 걸쳐 맨다. 몸을 돌린다.
"갈게"
여성은 남성을 떠났다.
여성은 지금까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 여성은 그런 여자였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아무도 사랑할 것 같지 않은 여자였다. 여성은 저만치 멀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남성은 허둥지둥 뒤쫓아 따라나섰다.
그저 너는 울고 있었다.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그걸 난 그저 아무 말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난 차마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그 말을 억지로 억눌렀다. 왠지 모를 환희와 왠지 모를 안도감. 그리고 그 뒤에 밀려오는 죄책감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저 그렇게 너를 바라보면서 난 기쁘다는 표정을 가식적으로 지은채, 항상 짓눌리는 무거운 마음을 없애려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죄인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멍이라도 든 것처럼. 하지만 이건 단순히 내 죄의식이 부족해서일까. 혹은 그만 걱정해도 된다는 안도감일까. 난 지금. 이 순간. 너와 함께 있는 이 공간에서. 분명하고도. 그리고 확실하게. 난.
기뻐하고 있었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억누르고 해방되었다는 안도감이 무기력할 정도로 온 몸을 휘감았다. 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울고 있는 너를 보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이 기쁨을 억누르는 게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난 가식적으로 너를 끌어안았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는 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용히 쓰다듬었다. 너는 한참을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너는 울다 지쳐 내 품에서 잠들었다. 나는 너의 곁을 지키고-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시선을 피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는 너를 부축하며 건물을 나섰다. 그 순간까지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던 죄책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오로지 해방이라는 그 감정만 남았다.
오늘 난 뱃속의 아이를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