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천지분간 못하던 어린 시절, 그러니까 대략 10살쯤의 이야기다. 난 장난기 넘치는 아이였다. 목에 긴 보자기를 둘러매고 담벼락에서 뛰어내리길 반복하는, 영웅이 되고 싶은 그런 아이였다. 바지 뒷주머니에는 아버지가 어디 시장에서나 사 왔을법한 새총을 들고(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손떼가 덕지덕지 붙은 조잡한 새총이었으니 아버지가 쓰던 것일지도 모른다) 뒷산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해가 뉘역 뉘역 질 무렵이 되어서야 목에 둘렀던 보자기를 풀고 집으로 향하곤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해가 땅으로 떨어질 때쯤,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보자기를 땅에 끌며 집으로 향했다. 길어지는 그림자를 밟으려 노력하며 걸음을 옮길 때, 저 멀리서 낯선 얼굴이 보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그렇다고 10살 아이의 짧은 기억 중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얼굴.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 내 앞에 무릎을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제 집에 가니?"
"네! 근데 아줌마는 누구예요?"
"아줌마... 모르겠니?"
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려할 때 어느샌가 아빠가 다가와 옆에 섰다. 그리고 아줌마와 내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아빠는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였고, 아줌마는 무척이나 슬픈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난 어딘가 익숙한 아줌마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확인하려 아빠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움직였다.
"다시는 눈 앞에 띄지 말랬잖아!"
"한 번만... 한 번만 얘기하게 해줘, 제발. 이제 곧 못 보게 될 텐데 한번 얘기하게 해줄 수 있잖아! 앞으로 안나타 날 테니까..."
"당장 꺼져, 평생 너랑 마주할 일 없으니까"
아빠는 날 잡아끌듯 팔을 낚아챘다. 멀어져 가는 아줌마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빠에게 묻고 싶었지만 슬프면서 화난 그 표정에 물어볼 수 없었다. 아빠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앞으로 저 아줌마가 찾아오면 아는 척도 하면 안 된다. 알았니?
난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증을 속으로 삼켰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와 아빠는 술을 드셨다. 둘이 마주 앉아 커져가는 언성을 줄이지 못한 채. 난 그저 엄마와 아빠가 화가 풀리기를 기도했다. 왜 화났는지 그때는 몰랐던,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25년, 그 일 이후로 25년이 흘렀다. 다른 아버지들보다 조금은 더 나이 드셨던 아버지는 오늘도 술잔을 기울였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술을 드시는 것 같다. 난 조용히 옆에 앉아 비어버린 술잔을 채워드렸다.
"10살 때 기억하니?"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다시 술을 한잔.
"그 여편네, 며칠 전에 찾아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아버지는 비어버린 술잔을 나에게 건네고는 술을 따라주었다.
"친애미는 만나봐야지. 네 엄마도 죽고 나도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난 술잔을 들이켰다. 어느 때인지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내가 부모님의 친아들이 아닌걸. 아버지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쪽지 하나를 꺼내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친어머니의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주소.
"널 버리고 간 애미를 난 만나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네 엄마의 부탁만 아니면..."
아버지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가봐, 멀진 않을게다"
난 고개를 꾸벅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는 다시 한잔 술잔을 비우고는 식탁에 탁-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래도 넌 내 아들이다, 네 엄마의 아들이기도 하고. 다녀와서 술잔 받아라"
"네... 아버지"
난 집을 나섰다.
아침부터 이유 없이 터져 나오는 짜증을 억누르고 웃고 있다. 시발, 말단, 쫄다구, 신입. 시발. 속으로 수없이 터져 나오는 욕설을 한마디도 내뱉지 않는다.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억지로 웃는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다. 눈이 멍하니 다른 곳을 향한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이 짜증을 누구에게 풀지? 하지만 아무에게도 풀 사람은 없다. 속으로 삭힌다. 마음속 한 구석에서 응어리가 생긴다. 욕이 나온다. 괜히 건드는 상대방의 얼굴을 후려갈기고만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난 또 웃는다. 베알꼴리는 사회생활 말단. 웃을 수밖에 없는 위치다. 술도 먹지 않았는데 속이 쓰리다. 위액이 넘어오는 것만 같다. 괜히 타는 속을 달래려 물을 마신다. 입안이 바짝-마르고 씁쓸하다. 시발. 왜일까. 왜 하필 오늘일까. 수 없이 참아온 많은 날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다. 거의 일 년 넘게 나는 스마일맨-. 가족과 친구 그리고 회사에서도 난 화내는 법이 없는 그런 병신. 웃음 뒤에 숨어서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을 한 그런 병신. 사람들은 그저 내가 실없이 쪼개고 다니는 놈으로 보이겠지. 마음속 구멍으로 한없이 슬픔을 쏟아내는데, 그게 하필이면 오늘. 넘쳐버렸는데. 왜 이런 슬픔이 쌓였을 때도 난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누구에게 안길수도 없는 건지. 그동안 내가 쌓아온 이미지가 아까운 건지, 그냥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건지. 이 짜증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커져만 간다. 제발 날 건들지 마. 날 혼자 있게 해줘. 제발. 하지만 그럴 리 없지. 다시금 시작되는 수많은 일거리들. 제발. 제발. 제발. 오늘만큼은...
씨발.
기억해줘 헬렌. 뭘. 모든 것을. 무심코 코 끝이 찡해졌다.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힌다. 모든 것을. 마음 깊숙한 곳, 숨겨두려했던 말. 모든 것을. 기억해줘 헬렌. 가프의 대사가 그렇게 마음을 흔들었다. 기억해줘. 내 모든 것을. 로빈 윌리암스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대사와 그가 남긴 영화의 한 장면들은, 마치 마음을 뒤흔들듯 남아있다. 보지도 않았던 영화의 한 장면, 한 대사. 기억해줘 헬렌. 모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