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씀'에 해당되는 글 174건

  1. 2018.07.26 질투.
  2. 2018.07.26 충동.
  3. 2018.07.19 도망치다.
  4. 2018.07.19 다른 사람.
  5. 2018.07.19 아버지.
  6. 2018.07.18 신뢰.
  7. 2018.07.18 서울.
  8. 2018.07.18 슬럼프.
  9. 2018.07.12 눈길.
  10. 2018.07.12 방황.

아담과 이브, 그리고 에덴. 그 공간에서 아담과 이브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생명체는 필요 외의 존재인 것만 같았다. 완전무결한 존재와 같은-. 신의 사랑을 모두 받은 그들은 찬란하게 빛났고 아름다운 몸짓과 목소리로 얘기했다. 깨끗하디 깨끗한 생각들로 신이 자신들에게 내려준 은총을 찬미하였다. 그리고 뱀은 그들이 싫었다. 아니 정확히는 질투와 시기, 그리고 부러움. 뱀은 끊임없이 그들을 관찰했다. 벰은 그들과 같고 싶었다. 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그들과 똑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그들과 똑같은 몸으로 그들과 같이 생각하고 움직이고 싶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따라 하기로 결심했다.

뱀은 끊임없이 그들의 주위를 배회했다. 그들이 말하는걸 끊임없이 관찰했다. 그들이 말할 때 내는 목소리는 그 어느 동물이 내는 소리보다 감미로웠고 청량했다. 뱀은 밤새 그들의 울음소리를 따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뱀이 열심히 그들의 목소리를 따라 해도, 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저 울음소리일 뿐 그것은 말이 되지 못했다. 뱀은 그들이 웃고 떠들고 노래하며 소곤소곤 거리는 그 모든 말들이 알고 싶었다. 그들과 같이 노래하고 그들과 같이 찬양하며 그들과 같이 신의 은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수많은 밤을 흘려보냈을 쯔음-. 뱀은 깨달았다. 난 앞으로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들의 곁을 끊임없이 맴돌고 그들을 따라 하려 해도 절대 그들과 같을 수 없었다. 절대로!

신은 그들에게 아름다운 모든 것을 주었다. 매끄러운 머릿결과 흠 하나 없이 고운 피부, 온갖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목소리와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신을 찬양하며 춤출 수 있는 팔과 다리. 뱀은 절대 그들과 같을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이 하는 그 어떤 것도, 단 하나의 작은 몸짓도 뱀은 그들을 따라 할 수 없었다. 저들은 어째서 신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을까. 왜 나에겐. 왜 나에겐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은 것일까. 털 한오라기 없는 미끌 거리는 몸뚱이와 사그극 거리는 비늘, 두 갈래로 나누어진 혓바닥과 감기지 않는 눈. 아무리 소리를 내려해도 나오지 않는 목소리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팔다리 또한 없다.

어찌 보면 뱀은 그들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였다. 그들이 온갖 아름다움의 표본이라면 뱀은 추악하고 소름 끼치는 것들의 표본이었다. 신은 어째서 저들에게만 사랑을 주는 것일까. 왜 나에겐. 뱀은 생각했다. 저들과 같아지고 싶다. 아담과 이브, 저들과 같은 존재이고 싶다. 아니, 아담과 이브. 그 자체이고 싶다.

그들과 같은 위치에서 신을 향해 울부짖을 것이다. 그러나 뱀은 그들처럼 될 수 없었다. 그들이 받은 신의 과분한 애정이 뱀에게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뱀은 그들을 끌어내리기로 결정했다.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저 높은 은총이 가득한 땅이 아닌, 습하고 축축한 이 더러운 땅위에서 저 신을 향해 울부짖으리라. 신, 그 고귀한 입을 위하여 준비한 선악과를, 당신의 아들과 딸의 입에 물려주리라.

에덴이 아닌 이 더러운 땅 위에서. 아담과 이브와 동등한 위치에서 당신의 사랑을 갈구한다면, 당신을 향해 울부짖는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이 미천한 나에게도 사랑을 주실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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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0) 2018.07.26
호상.  (0) 2018.07.26
충동.  (0) 2018.07.26
도망치다.  (0) 2018.07.19
다른 사람.  (0) 2018.07.19
Posted by Ralgo :

끊임없이 솟구치는 활화산 같은 충동에 평생을 휘말리며 살아왔다.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누군가 내 격정의 고통과 같은 충동에 휘말려 사는 자가 있다면, 그는 나의 절망과 비참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삶을 유지시키는 것이라곤 몇 방울의 술과 메말라버린 빵 조각 몇 개. 저 어두침침한 구멍 속에서 더듬이를 흔들거리는 바퀴보다 못한 상황, 내 핏줄에 흐르는 더러운 욕정이 눈을 통해 번들거림을 느낀다. 아! 아아! 아아아! 이 충동을 이길 수 없음을 확신한다. 테베의 라이오스 왕은 알았을 것이다. 그 어린것의 순수한 눈망울에도, 미처 숨기지 못한 처절한 욕망의 충동을. 오이디푸스는 알리라 나의 고통을, 나의 충동을, 나의 욕정을!

아아~! 어찌할 수 없는 이 욕망의 충동은 끊임없이 타올라 날 집어삼킬 것이다. 죽음과 욕망 사이에서 날 메말라 죽게 하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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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상.  (0) 2018.07.26
질투.  (0) 2018.07.26
도망치다.  (0) 2018.07.19
다른 사람.  (0) 2018.07.19
아버지.  (0) 2018.07.19
Posted by Ralgo :

난 하루에도 몇 번이고 도망쳐 다녔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불과 같이 뻗쳐오는... 마음속을 천천히 침식시키는... 오늘도 방 안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방 안에서.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귓속에는 적막하다 못해 들려오는 이명이 나를 괴롭혔다. 일정한 것처럼, 또는 일정하지 않은 것처럼 그 삐-거리는 이명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간혹 그 이명은 다르게도 들려와서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게 너무나 소름 끼치게 들려와서 머리를 흔들고 귀를 틀어막지만 이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방구석에 있는 티브이를 켠다. 잠깐 눈을 괴롭히는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지만, 금세 익숙해진다. 아픈 눈을 비비고는 티브이의 볼륨 버튼을 찾아 소리를 키운다. 그러자 귀를 괴롭히던 이명은 억울하다는 듯이 자기도 따라 소리를 올렸다. 이명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할수록 그 이명은 더욱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제야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명이 들려주는 괴상한 말소리에- 굳이 따지자면 말이라기보단 단순한 의미, 느낌이라 해야겠지만... 이명에서 무언가를 전달받았다면 난 이미 미쳐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미친 게 맞을 거다. 아마도.

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천천히 방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는다. 비틀어 당기자 오랫동안 닫혀있던 경첩이 끼익-거리는 소음을 만들어낸다. 이명에 섞여 더욱 기괴한 의미를 나에게 전달한다. 머리를 흔들어 이명을 날려 보내려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에는 이명이 전달하는 의미에 따라 몸을 움직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조용한 거실이 보인다. 내가 문을 열고 나온 일이 놀라운지 부모들이 나를 바라본다. 내가 그들을 노려보자 얼굴을 돌린다. 그래 알아 나도. 당신들이 날 싫어하는걸. 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돌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쏟아지는 눈길이 거북하다.

나조차도 얼마 만에 밖을 나왔는지 가물가물할 정도니까... 잠시 그렇게 생각하자, 주방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보였다. 시발. 밝네...

창에서 눈을 돌려 도마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식칼을 집어 들었다. 이쯤에 이르자 귓속에서 들려오던 이명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들려오던 소리들은 이명에 묻혀버리고, 머리 속에 울리는 이명 때문에 시야마저 어질어질했다. 비틀거리는 시야에 순식간에 어지러움이 엄습했다. 쿵-하는 느낌과 함께 벽에 몸을 부딪혔다. 그 상태 그대로 기대어 서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아직 그들은 나를 못 봤는지 일그러진 시야 속에서도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꼿꼿하게 앉아서-아니. 움직이는 건가... 잘 모르겠다. 이리저리 흔들린다. 걷고 있는 바닥이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가 쓱-사라진다. 이윽고 난 걸음을 계속 옮겨서 그들의 뒤에 섰다.

그때서야 그들은 다시 날 본 건지 놀란 얼굴로 쳐다본다. 일그러진 시야에 비친 일그러진 얼굴. 끔찍하리만치 이상해야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본래 이들의 원래 표정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일그러진 입이 열리며 붉은 혓바닥이 날름 거린다. 왠지 모를 뜨거운 입김이 뺨에 와 닿는 것만 같다. 손을 들어 뺨을 문지르곤 웃었다.

"미안- 안녕"

손을 그대로 휘둘러 목에 칼을 꽂아 넣는다. 이명은 더욱더 커지고- 얼굴에 튀어 오른 핏물은 사방으로 흘러내린다. 옆으로 도망치는 얼굴을 향해서 다시 칼을 휘두른다. 쓰윽-하고 무언가 잘리는 느낌이 들려온다. 다시금 몸을 움직여 확실히 목에 칼을 휘두른다. 핏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이제야 삐-거리던 이명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내가 칼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몸에 칼을 꽂아 넣을수록 이명은 잦아들었다. 이윽고 이명이 사라지고 났을 때에는 내 주위는 붉게 얼룩져있었다.
하아...

"이제 살겠다..."

이제 이명이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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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0) 2018.07.19
신뢰.  (0) 2018.07.18
Posted by Ralgo :

이번엔 너와 나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아마 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혹은 그냥 그저 그런 글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네가 볼 일 없는 이런 공간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는 게 참 어이없는 상황이겠지만. 아마도 언젠가 네가 내 글을 읽고 나에게 다시 연락이 왔으면 하는 그런 마음, 그런 기분으로 이 글을 쓴다.

너와 난 사귀는 동안 참 많이도 싸웠다. 별 다른 이유 없이, 별로 화낼 일이 아닌 것에도 화를 내곤 했다. 서로의 마음을 믿지 못하고, 서로의 기분보단 나 자신의 기분만 신경 썼던 것 같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 테니까. 그런 되지도 않는 생각으로 널 힘들게 했다. 알고 있었다. 네가 많이 힘들어한다는 걸. 하지만 그건 그저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니까-. 그러니까. 그걸로 용서될 거라고 생각했다.

기억할까? 언젠가 네가 나에게 같이 살자고 했던 그날. 말로는 퉁명스럽게 싫다고, 무슨 동거냐고. 그렇게 까칠하게 내뱉었던걸. 사실 속으로는 너와 함께 보낼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에, 내가 좋아했던 너의 품에 더 오래 안겨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내심 기뻤었다. 그리고 너의 그 당돌함에 널 더 좋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난 네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집착하고, 화내고, 너를 소유하려는 욕심이 커졌다. 너는 내 거. 그러니 어디도 가면 안돼. 그런 마음이 샘솟았다. 참 어리석은-. 그게 너와 나의 이별을 앞당겼던걸, 네가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떠날 거란 걸. 네가 다른 남자에게 가게 된 이유란 걸. 그때는 몰랐다.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것도 아주 어렴풋이 깨달았을 뿐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도 넌 내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 잊을 수 없었다. 네가 해주었던 사소한 것들- 악필인 글씨체로 삐뚤빼뚤 써주었던 편지, 밥 굶지 말라고 싸주었던 도시락, 생일 때 만들어주었던 케이크. 넌 나에게 사소한 기억들을- 추억들을 남겨주었다.

그에 반해서 내가 너에게 해준 것은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해준 것은 없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를 굴려서 떠올려보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주저리주저리 글을 써 내려가곤 있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거 하나인 것 같다.

미안하다.

이 말이 너무 하고 싶었다. 이만 네가 볼 일 없는 이 편지를 끝마친다. 언젠가 네가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또 영원히 볼 일이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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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0) 2018.07.18
서울.  (0) 2018.07.18
Posted by Ralgo :

거친 손을 내밀며 미소 짓는다. 등 뒤에 떠오른 햇빛에 눈이 부신다. 그 모습이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아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손을 내밀어 그 거친 손을 잡는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거친 손. 움켜쥐듯이 나의 손을 쥐고는 잡아끌어 일으킨다. 나는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낸다. 아버지는 내 머리에 손을 올려 한번 쓰다듬고는 등을 돌린다. 별 다른 말은 없다. 넓은 어깨, 커다란 등. 듬직한 아버지. 나의 아버지. 말이 없는 과묵한 나의 아버지. 따뜻한 미소로 웃어주는 나의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다. 삼촌의 말을 들어보면, 어머니가 나를 낳다 돌아가셨을 때부터라고 하셨다. 항상 과묵한 아버지. 그러나 어디서나 열심히 일하시는 아버지. 무심코 찾아간 아버지의 직장, 공사판. 흔히 말하는 노가다의 인부. 아버지는 무거운 회색 벽돌을 어깨에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고 계셨다. 노란 철모 밑으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까맣게 타버린, 거칠어져 버린 피부 위로 땀방울이 흘렀다. 아버지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나 하나를 키우기 위해 아버지는 힘이 들면 안 되었다. 아프면 안 되었다. 언제나 똑같이, 성실히 일하셔야 했다. 힘든 집안, 죽을 둥 살 둥 벌어도, 새어나가는 돈들. 빌어먹을 돈. 돈돈돈. 언제나 우리의 목을 죄어오는 돈. 아버지의 입을 더욱 굳게 다물게 했던 돈. 아버지는 말이 더욱 없어지셨다. 하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일을 나가셨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독감에 걸린 몸으로, 펄펄 열이 끓는 몸으로 벽돌을 옮기셨다. 내가 다리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할 때도, 아버지는 그 크고 거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뿐이었다. 단 한마디 말씀 없이 아버지는 또 일을 하러 나가셨다. 덜덜 떨리는 손발로 벽돌을 옮기고 치밀어 오르는 거친 숨을 골라야 하셨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나의 우상. 나의 위인. 나의 단 하나뿐인 영웅, 아버지. 말이 없으신 나의 아버지.

나는 성공해야 했다. 아버지를 위해서. 나의 하나뿐인 영웅을 위해서. 미친 듯이 공부했다. 다른 친구들과 놀 시간 따위는 없었다. 공부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 코피를 쏟고 몸살이 나도 책을 놓지 않았다. 나에겐 공부뿐이었다. 아버지의 희망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난, 성공했다. 성공? 그래, 아마 성공했었다. 나는 대기업에 들어갔고, 어느 동창 부럽지 않게 돈을 벌었다. 20대 중반이 안된 젊은 나이에 외제차에 집까지 있었다. 난 그때나 돼서야 내가 먼저 거칠고 주름진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는 그저 웃으셨다.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이젠 힘들게 일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에도 아버지는 고개만 저었다. 아버지는 내가 대기업에 들어간 뒤에도 공사판을 나가셨다. 언제나처럼 노란 철모에 벽돌을 짊어지고.

그리고 나는 내 젊은 성공에 방심했다. 친구에게-그나마 몇 되지 않는 친구였지만- 서준 보증. 순식간에 내 목을 다시 죄어오는 돈. 사방에서 날아드는 붉은 딱지. 피를 말리는 붉은 딱지. 사방을 물들이는 붉은 딱지. 붉은 돈. 아버지는 온통 빨갛게 물들어버린 방안에서, 그 거친 손으로 붉은 딱지 하나를 메만지셨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서 계셨다. 나는 차마 아버지를 제대로 볼 수 조차 없어서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친 아버지의 숨소리, 심장을 욱신거리게 하는 거친 한숨소리. 아버지는 터벅-거리는 메마른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어떻게 얻은 돈인데, 아버지께 자랑하고 싶었던 내 모습이었는데.

나는 집을 나섰다. 검은 하늘, 조그맣게 떠오른 별들 몇 개. 한참을 걸었다. 몇 시간을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멓던 하늘은 어느새 옅어지고 있었다. 세상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다리가 아파왔다. 근처 놀이공원의 바닥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동이 터오는 하늘, 주변에서 짹짹거리는 참새 몇 마리. 멀리서 들려오는 가정집들의 알람 소리. 그리고 내 눈앞에 드리워진 그림자.

아버지,

"일어나라, 가자"

거친 손을 내밀며 미소 짓는다. 언제나 그렇듯 타박하지 않고 별다른 이야기 없이 손을 내민다. 밤새 그리워진 아버지의 눈 밑엔 아직 눈물 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채 반달 눈웃음을 그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다시 날 위해 먹먹한 웃음을 터트렸다. 등 뒤로 떠오른 햇빛에 눈이 부시다. 거친 손이 내 손을 잡는다.

아버지, 나의 영웅의 웃음에 일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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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  (0) 2018.07.18
Posted by Ralgo :

나에게 신뢰란 매미의 허물과도 같다. 일평생 고이 간직해오다 일순간, 어떤 상황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점에 벗어던져져 땅에 바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너무나 허무하게 여름날 땅에 바스러져 발에 밟히고 바람에 흩날려 먼지가 되어 하늘을 부유하듯.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매미처럼 사라진 신뢰를 버리고 울음을 터트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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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0) 2018.07.12
Posted by Ralgo :

"서울은 모든 사람이 바빠"

그렇게 말하며 넌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난 잠시 너의 말에 끊기어진 전화만 잠시 바라보았다. 마치 바쁜 서울 사람들 틈에서 나만 동떨어진 채 느리고 게으르며 무료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느껴진다. 전화를 땅에 내려놓았다. 해가 지고 있다. 나의 아침은 해가 정오를 넘어서 땅거미에 가까울 즈음에 시작하여, 해가 떠오를 때에 밤이 되곤 했다. 이 사이클은 웃기게도 고착화되어서 이제는 이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난 너의 질타 섞인 목소리에 오늘도 텄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술 한잔 얻어먹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각박한 서울이라지만 점점 더 숨통을 메어오는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 지내는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빛 조차 들지 않는 답답한 고시원에서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난 점점 나와 쥐를 동일시했다. 어둠 속에 숨어서, 조그만 굴 방 안에서, 누군가가 흘린 부스러기만을 도둑처럼 몰래 먹어대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거북한 존재감만을 내뿜는 그런 존재. 난 점점 서울의 지박령처럼, 더러운 악취만을 내뿜게 되는 그런 쥐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나도 성공을 바랄 때가 있었다. 이 어둠에 스스로를 처 밀어 넣고 작은 독방에 날 가둔지 1년. 곯아가는 육신을 다그치며 또다시 1년. 이번엔 될 거야 이번만은 성공하겠지 헛된 희망 속에 1년. 난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퇴실 소식은 어떨 때는 나도 그들처럼 될 거라는 희망을, 어떤 때는 나도 그들처럼 그늘로 숨어드는 쥐처럼 될 거라는 절망을 주곤 했다. 난 담배를 손에 든 채 옥상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서울은 하늘에 별이 없다. 빌어먹게도 길거리의 조명들이 별빛을 대신에 깜빡거리고 있다. 고개를 들면 어둠이 고개를 숙이면 빛이 반겨준다. 서울 이곳에선 고개를 숙여야만 빛이라도 볼 수 있다. 저 바닥의 불빛들은 죄다 서둘러 점멸하며 서둘러 발길을 움직인다. 난 땅을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빨간 담뱃불은 바닥으로 떨어져 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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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닥터, 나에게도 슬럼프가 왔나 봐"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평소와 같은 한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에 가득 찬 당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파우치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나에게 내밀었다. 난 한숨을 쉬고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붙여주었다.

"잘 안되니까 재미가 없더라구, 닥터는 그런 적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흠-하는 콧소리를 내고는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담배부터 끊어요, 될 일도 안될 거 같은데"

"흥, 이 아이 없으면 아마 진작에 때려치웠을 거야"

"이젠 그 아이가 놓아주지 않겠죠"

내 말에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맞네 맞아, 이제는 이 녀석이 내 목줄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을걸?"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다시금 담배를 빨아들인다. 사실 나도 그녀가 끊으리란 생각은 없다. 몸에 딱 달라붙는 빨간 원피스, 하얀 살결. 그녀는 마치 장난처럼 자신의 몸을 과시했다. 자신에게 눈을 뗄 수 없게,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에게 눈을 돌릴 수 없도록. 그녀가 몸을 기울여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한다. 깊숙이 파인 원피스 사이로 그녀의 가슴골이 눈 앞으로 들이닥치는 기분이다. 난 애써 눈을 돌렸다.

"귀엽다니까, 닥터는"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곤 다시 차트를 살폈다. 십여 년간 지속적인 상승세를 그리던 그녀의 인기는 최근 들어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대기업이라 불리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몹시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등 뒤로 스치는 절망과도 같은 감정이 진료실을 가득 채웠다.

"이제 그만하려구, 위에 있어야 재밌잖아? 아냐 닥터, 당신 탓은 아니니까. 이만 갈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걸친 코트를 집어 들고 진료실을 나섰다. 난 그녀의 처방전을 미처 작성을 다하지 못한 채 앉아있었다. 그녀 다운 당당한 표정과 행동 뒤로 드리워진 어두운 감정에, 의사로서 그러면 안되면서도 그녀의 말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건 어찌 보면 거부할 수 없는 암흑과 같았다. 어떤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면서도 난 그 어둠을 놓아주고 말았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를 뒤덮었던 어둠은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슬럼프와 어울리진 않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정상에서 고고하게 바라보는 게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난 어쩐지 그녀의 죽음에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매료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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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간밤에 눈이 내렸다. 아직 해가 뜨기 전,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바라본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눈길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가만히 바라보다 얇은 점퍼 하나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간다. 뽀드득-하는 소리가 쓸쓸하게 골목길을 메아리친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 그 위에 내 발자국을 남긴다. 내가 처음이라는 사실에 괜히 기분이 설렌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서 내가 만든 발자국. 노란 입김이 이리저리 퍼진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너와 같이 걸었던 그날인 것만 같다.

이리저리 장난치듯 걸은 발자국 하나하나가- 너와 있던 그날인 것만 같다.

그 날인 것만 같아서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흐른다. 너와 있던 눈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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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보라색 하늘 아래로 검은 해가 빛을 뿌리고 있다. 땅 위로 뻗어있는 노오란 나무들. 잎사귀 끝에 걸린 동그랗고 붉은 열매가 땅을 향해 떨어진다. 파아란 땅에 붉은 열매가 떨어진다. 붉은 열매는 몇 번이고 꿈틀꿈틀, 살아있는 것마냥 움직이더니 이윽고 붉은 껍질을 깨고 녹색 손을 내뻗는다. 작은 아이의 손. 너무나도 작은 그 아이의 손은 붉은색 껍질을 깨어내고, 이윽고 파란 땅에 발을 내딛는다. 소년- 혹은 소녀. 성을 알 수 없는 그 아이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하나 싶더니, 이윽고 달리기 시작했다. 검은 햇빛을 받으며 아이는 달리었다. 달릴수록 아이의 다리는 자라고, 몸은 커지었으며 팔은 길어졌다.

민둥민둥했던 머리는 어느새 하이얀 머리가 허리춤까지 자라났다. 아이는 자신의 몸이 변화했다는 것을 느끼자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리곤 자신의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힘이 세진 것이 느껴진다. 몸이 방금 전과는 다르게 움직이기 쉽다는 것을 느꼈다. 언제 어디고 어느 곳까지, 자신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아이는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하늘을 향해 뜀박질한다. 곧이어 다가오는 통증- 아니 희열. 순간순간 오가는 감각에 아이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다시 뛰어오른다. 하늘을 향해 몸을 날린다. 에메랄드빛 날개가 등에서 솟아오르고 아이는 보랏빛 하늘을 가로지른다. 하늘색 구름을 가로지르고 검은 태양빛에 눈을 가리며. 아이는 생각했다. 나는 누구지? 난 누굴까? 나는 왜 태어난 걸까? 아이는 날갯짓을 멈추고 땅을 살핀다. 파란 하늘 위로 솟아오른 갖가지 꽃들, 나무들, 그리고 그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작은 동물들. 아이는 파란 땅에 있는 작은 동물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작은 동물아, 넌 누구니?"

"나? 나는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이지"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땅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이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두 개의 머리를 끄덕거렸다. 한쪽에만 달린 눈이 빙긋 웃는다.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아. 넌 누구니?"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은 등에 달린 입을 오물거렸다.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세 개의 손으로 두 개의 머리를 긁적거린다. 한 개의 눈이 이리저리 대답할 말을 생각해낸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여섯 개의 다리로 땅을 굴렀다. 땅이 비명을 지르듯 쿠구구구구궁-하는 소리를 만들어낸다.

"나는 여섯 개의 다리로 땅을 달려 세상이 넓다는 것을 증명할 거고, 세 개의 손으로 많은 물건을 쥘 테지. 두 개의 머리로 사고하며, 등에 달린 입으로 남에게 보이지 않는 말을 하겠지"

대답이 되지 않아. 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는 손은 세 개에 다리는 여섯 개. 머리는 두 개이며 눈은 한 개. 입은 등에 달린 동물을 뒤로하고 날개를 움직였다.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동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다시 날갯짓을 멈추고 물었다.

"저기 앉아있는 동물아, 넌 누구니?"

"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동물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동물은 그저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동물도 대답이 되지 않아. 이 세상에서 나는 왜 태어난 걸까? 나는 무슨 이유로, 어떤 존재가치로 이 곳에 있는 것일까. 나는... 아이는 날개를 퍼덕였다. 에메랄드 빛 날개 하나가 파란 땅을 향해 떨어지고 파란 땅위의 수많은 동물들은 아이의 날개를 향해 몸을 옮겼다. 아이는 잠시 멈추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간의 다툼, 소란 이윽고 아이의 날개를 손에 쥔 작은 동물 하나가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아이야, 넌 누구니?"

"나? 나는 하늘을 나는 아이지"

"그래, 하늘을 나는 아이야. 너는 누구니?"

다시 들려온 그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이얀 머리를 손으로 긁는다. 녹색 얼굴이 잠깐 찌푸려진다.

"나는 하늘을 날며 나를 찾는 아이야"

"그래, 하늘을 날며 너를 찾는 아이야. 넌 누구지?"

"하늘을 날며 나를 찾고 세상에서 내가 있을 곳을 찾는 아이야"

"그래. 하늘을 날며 너를 찾고 세상에서 네가 있을 곳을 찾는 아이야. 넌 누구야?"

아이는 대답하기에 지쳤다. 밑에서 들려오는 끊임없는 똑같은 질문, 대답. 그리고 이어지는 의문. 아이는 생각했다. 나는 누구지? 나는 하늘을 나는 아이. 나는 누구지? 하늘을 날며 나를 찾는 아이. 나는 누구지? 하늘을 날며 나를 찾고, 세상에서 자신이 있을 것을 찾는 아이. 난 누구지? 난 누구지? 난 누구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는 한 가지 점점 깨달아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지? 나는 나. 나는 누구지? 하늘을 나는 나. 나는 누구지? 자신을 찾는 나. 나는 누구지? 내가 있을 곳을 찾는 나. 모두 다 나, 자신. 아이는 검은 하늘을 향해 몸을 날린다. 보랏빛 하늘에 녹색 섬광이 스치고- 검은빛이 내리쬔다. 나는 나다. 아이는 아이다. 쉼 없이 고민해도 쉼 없이 자신을 찾으려 해도 자신은 모두 다 같은 자신. 그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아이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일터다.

검은 태양에 닿은 손이 하얀 손으로 변한다. 하늘은 파래지고, 땅은 푸르러지며, 녹색 잎들이 자라난다. 아이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 세상은 다시금 원래의 빛깔을 찾는다. 아이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하늘을 날며 자신을 찾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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