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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6.07 우산.
  2. 2018.06.07 나쁜 소식.
  3. 2018.06.07 과정.
  4. 2018.06.07 복도.
  5. 2018.06.07 빗소리.
  6. 2018.06.07 국경.
  7. 2018.06.07 시간.
  8. 2018.06.07 냉장고.
  9. 2018.06.07 후유증.
  10. 2018.06.07 눈을 뜨면.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쏟아지는 여름날이었다. 본래 그날그날의 날씨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 그날도 우산 없이 학교를 갔던 게 화근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었다.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은 우산을 들고 오실 수 없었음이 당연했고, 이미 십수 년 전의 이야기니 핸드폰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핸드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세상의 신이란 작자는 일이란 꼬일 수 있으면 더욱 꼬아버리곤 하는 괴팍한 심보를 가진 게 틀림없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뒤진 안주머니엔 분명 있어야 할 버스 승차권이 없었다. 이때의 나는 내성적이며 예민했으며 남들과 어울리기 상당히 힘들어하는 성격이었기에(사실은 이 성격은 십수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빗 속을 걸어가기로 했다.

집까지는 대략 중학생 아이의 걸음으로 30분, 참으로 미련하게도 난 그렇게 집으로 걸어갔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온 몸은 젖어들고, 하늘은 어둑어둑해졌다. 참으로 웃긴 건 그때의 그 상황이, 지금 이 시점에서도 그때 느낀 감정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빗방울이 물결을 그리는 웅덩이의 비릿한 물 냄새. 젖은 땅에서 흐릿하게 올라오는 흙냄새. 빗방울에 고개를 떨군 나뭇가지가 그리는 그림자. 구름에 가리어진 햇빛이 슬쩍슬쩍 얼굴을 내미는 그 순간. 이윽고 어둠이 내려온 그 상황에서 나 혼자 서 있는 그 길. 옆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만 시끄럽게 귀를 괴롭히는 그 순간. 어린 마음에 혼자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 서글픔이 아주 조금 눈물처럼 나오던 그 순간.

서글펐던 감정은 그때 단 한순간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서글픔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는 있다. 그래도 그때의 왠지 모를 서글펐던 감정은, 아마 사라지지 않고 마음 속 깊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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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에게 전할 얘기가 있어. 아,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좋은 소식일리 없잖아? 우리가 뭐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응, 그래. 나도 마음 같아선 네 목소리 따위 듣고 싶지 않아. 욕하지 마,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어? 도대체가 넌... 아니야. 응, 만나서 얘기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아니,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 거 같아. 야! 말 이쁘게 하라고, 너랑 말해야 하는 상황이 난 좋은 것 같아? 미친, 야! 너만 욕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다 만나면 또 때리겠다? 야, 그래. 그게 자랑이니? 네가 때렸던 게 자랑이냐고. 찾아오기만 해봐. 미친 새끼, 만날 장소나 정해. 아니, 낮에. 아니, 너 무서워서 어떻게 밤에 보겠어? 낮에 봐. 응, 그때 그 카페, 기억나? 어딘지? 미친, 헤어졌던 거기 말이야. 응. 그래. 욕하지 말랬지? 하~ 지친다. 야, 그냥 전화로 말할게. 야 나 임신했어. 그래, 니 새끼지 쓰레기 새끼야. 응, 지울 거야. 나도 니 새끼 키울 생각 없으니까. 응, 돈은 계좌로 보내. 오늘 중으로 보내, 아니면 회사고 어디고 찾아가서 미친짓 할 테니까. 그래, 당장 보내. 응,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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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점이라면, 그건 아마 자기 자신과의 대면을 통한 고찰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나의 생각이란 수많은 의견을 반영하여 만들어진 커다란 찰흙과 같은 것이라서, 뭉치고 섞여 회색빛으로만 보일 수도 있다. 마치 내가 가진 딱 하나의 생각인 것처럼. 이건 약간의 오만이기도 해서 나의 생각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것이란 착각에서 발로 된 것이기도 하다. 다시 뒤섞인 찰흙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이 찰흙은 회색빛의 단색으로만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고 분리하다 보면 사실 이것은 여러 가지 생각의 복합체라는 걸 알 수 있다. 나의 의견은 나 혼자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글을 쓰다 보면 글이 나의 의지와 생각을 벗어난 채 써 내려가질 때가 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생각과 원하는 방향이 아닐 것일진대, 또 웃기게도 그 이상한 방향의 이야기도 써 내려가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글을 한참 내 의지 같은, 혹은 내 의지 같지 않은 글을 다 써 내려가고 난 뒤에야 한 가지 깨닫게 된다. 사실 이 글의 의지와 생각도 사실 뒤섞여 알아볼 수 없던 찰흙 덩어리였단 걸. 보이지 않았을 뿐 내 안에 있던 생각 중 하나라는 걸.

이 과정 중에서 느껴지는 그 묘한 생각은 날 불편하게 만들곤 한다. 상충되는 두 가지의 생각은 어떤 관점에서 내가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을 촉구하곤 하는데, 그것은 사실 답을 내릴 수도 내려서도 안 되는 문제가 많은 것이다. 사형과 복지, 신과 인간, 선과 악 그따위 것들 말이다. 그래서 간혹 이 상충되는 생각과 감정을 서로 충돌하게 하곤 한다. 글을 씀으로써 글을 쓰고 난 뒤에야, 나도 몰랐던 그 생각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게 한다.

사실 어린아이 장난 같은 내 글들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보단 내 생각을 정리하는 창구와 같은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내 생각을 공유(혹은 강요라고 할 수도 있다)함으로써 내가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이쪽과 저쪽, 좌와 우의 어느 쪽에서도 받아들여지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사실 이런 태도는 양쪽 모두에게 지탄받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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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복도를 걷는다. 끼익-. 오래된 나무 바닥이 비명을 내지른다. 서서히 식어가는 태양이 붉은 노을을 만든다. 타박-타박. 발걸음 홀로 적막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창밖에서 붉은 노을이 날아든다. 저 멀리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인다. 빛을 삼켜버려 새까만 어둠의 모습으로. 교실 문 앞에 다다랐다. 뒤틀린 나무 문이 신경을 갉아먹는 소음을 만들며 열리었다. 교실은 그때의 그 모습으로 그때의 그 향을 머금은 채 머물러 있다. 난 흐릿한 기억 속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낙서 가득한 책상, 기억 속에선 선명한 낙서들이 여기선 흐려져 있다. 먼지를 손으로 대충 털어내자, 그 흐릿한 낙서 몇 개가 몸을 들어냈다

우리 언제까지나.

네가 새긴 그 낙서는 이제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말이 되었다. 넌 언제고 어느 때고 어느 순간이고 그때처럼 이곳에서 머물러 있겠지만, 더 이상은 널 볼 수 없게 되었다. 붉은 노을이 검게 물들어 갔다. 어둠은 금세 교실을 뒤덮었다. 검은 노을 속으로 사라진 너의 모습은, 이제 흐릿한 기억이 되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을 것만 같다. 이렇게 무너져가는 우리의 추억 속에서 나의 시간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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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비 오는 밤. 우울한 기분. 우울한 노래. 추적추적 흘러내리는 빗소리. 함께 흐르는 음악소리. 떨어져 내리는 달빛. 가리어진 구름.
그 사이로 부서져내리는 별빛. 가라앉은 목소리. 느리게 움직이는 몸짓. 멀리서 들려오는 강아지가 짖는 소리. 슬피 우는 고양이의 울음소리.
순간 세상을 파랗게 물들인 번개. 같이 내리치는 천둥. 노란 가로등불.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 두근거리는 심장. 떨어지는 눈물.
입술로 스며드는 눈물. 흘러나가는 기분. 점점 커져가는 우울함. 그와 함께 깨닫게 되는 무력감.
꺼지지 않는 불안감. 차오르는 기대감. 지나가는 바람소리. 흔들리는 나뭇잎.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춤을 추는 나비 한 마리.
귀를 간질이는 모기 한 마리. 불빛을 향해 날아가는 나방 한 마리. 떨어지는 불빛. 침대로 돌아가 뉘인 몸. 스르륵 스치는 이불.
몸 위로 내리 앉는 우울. 그 안에 스며드는 몸. 토해내지는 울음. 커져가는 소리. 젖어가는 베갯잇.

덮은 이불 위로 짓누르는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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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드디어 판은 시작됬다. 우리는 국경을 넘으려 했다. 우리를 옥죄는 자유로부터 뛰어넘을 그 순간이다. 짓누르는 어둠을 친구 삼아 걸음을 옮긴다. 진창이 되어버린 땅과 우거진 풀들이 우리의 도주를 방해하듯 발목을 잡아끌었다. 땅으로 손을 내민 버드나무 가지가 우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아가야 했다. 한 손에 쥔 칼의 예기가 서늘하게 우리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우리는 말이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우리의 어둠 사이에는 깊은 숨 소리만 메워져 있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충격과 소음에도 깨어져버릴 것만 같은, 우리의 신경을 갉아먹는 침묵이었다. 사각거리며 우리의 지금을 갉아먹는 것만 같은.

온갖 환상과도 같은 방해를 무너트리며 우리는 국경에 다다랐다. 길을 나설 때만 해도 우리를 피해 어둠만 비추던 달빛은 찬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른침을 삼켰다. 아마 저 황홀하고도 찬란한 달빛은 우리를 놔주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우리는 몸을 숙여 땅에 찰싹 달라붙었다. 너무나 밝다, 우리가 찾는 자유처럼, 우리를 옥죄는 자유를 향해 너무나 밝은 빛을 뿌려대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위험했다. 서로 손을 맞대고 서로의 죽음을 응원하던 그 순간으로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서로의 죽음을 담보하기로 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진창을 박차고 일어나 뛰었다. 저 달빛이 너무나 밝다. 내 왼편을 달리던 녀석이 땅을 나뒹군다. 오른편의 녀석은 무엇을 밟았는지 몸뚱이가 하늘을 향해 튀어올랐다. 아직 걸음을 옮길 수 있는 녀석들은 멈추지 않았다. 국경을 향해, 저 눈앞에 보이는 철조망을 향해. 저 멀리 소리를 내지르며 뛰던 녀석의 머리가 터져나간다. 그 옆의 녀석은 부수어진 다리를 땅에 끌며 자유를 향해 몸을 굴린다.

아, 우리의 자유가, 우리를 옥죄는 자유가, 우리를 비추는 달빛이, 저 찬란히 빛나던 달빛이.

나를 향해 쏟아진다. 빛은 내 몸을 감싼다. 난 우리를 가로막은 국경을 눈앞에 두고, 우리를 옥죄는 자유를 두고 더 나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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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너와 내가 만난 지 7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조금은 긴 시간, 그러나 너와 나에게는 순식간에 흘러지나 간 시간. 20대였던 너와 30대가 된 너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시간은 벌써 이만 치나 흘렀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로.

넌 그때와 같은 표정. 그때와 같은 목소리, 손짓으로 날 불렀다. 언제나와 같은 여느 때와 같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모습으로. 넌 아무렇지 않은 척 나를 불렀고 그런 너의 행동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아 나도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대답했다. 너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 메마른 목을 따갑게 만드는 침을 삼키고. 메말라 갈라진 입술을 물어뜯으며 애써 웃었다. 무언가 애처로워 보이는 그 모습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우리는 왜 의식하지 못한 채로 이 시간들을 헛되이 달려왔나. 바로잡을 새도 없이.

우리는 식탁에 앉았다. 우리의 돈을 모아 산 낡은 의자가 삐걱-. 7년이란 시간의 흔적과, 방안에 가득 찬 너와 나의 시간들. 너는 잠시 의자를 쓰다듬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언제나처럼 또 다르지 않은 듯이 넌 자작하게 끓고 있는 된장국을 한입 떠먹었다. 그리곤 작은 캬~하는 소리를 내곤, 그리곤 너는 멈추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작은 틈 후에, 너는 어깨를 들썩였다. 숟가락을 쥔 손가락이 빨갛게 변했다. 너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참았다.

난 조용히 숟가락을 들어 밥을 욱여넣었다. 항상 먹던 그 맛의 그 요리들. 그렇지만 내가 느끼기엔 달라져버린 맛들. 물을 입에 넣고 마시듯이 밥을 삼켰다. 내가 도망치듯 밥을 다 먹은 후에도 너는 한참이나 숟가락을 든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듯 식탁의 음식들을 치웠다. 너는 언제나처럼 설거지를 했고, 난 평상시와 다르게 돕지 않았다.

넌 꼼꼼히 설거지를 마치고, 겉옷을 입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나는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고 현관으로 따라나갔다. 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메마른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찰칵-하는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넌 옮겨지지 않는 것 같은 한 발자국을 밖으로 내놓았다. 등 돌려진 너의 모습은 작아져 있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안녕..."

"응 안녕"

우리는 평상시와 같게 인사했다. 그리고 너는 문을 나섰고 우리는 평상시와 다르게 이별했다.

너와 나 사이에 '내일'은 없다. 7년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긴 시간일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순식간에 흘러갔다. 이별하는 지금 이 순간이 7년이란 시간보다 더 길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에게는.

우리의 7년이 흘렀고, 더 이상 그때와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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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있다. 무언가 넋이 나간 듯이 보였다. 간혹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상을 두들기기도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몇 시간째더라-? 오늘은 당직도 아닌데 얼떨결에 이 녀석을 맡아버렸다. 집에 돌아가서 마누라가 끓여주는 김치찌개를 먹고 곤히 자고 있는 딸내미의 볼에 뽀뽀 한번 해주고 컴퓨터 좀 해볼까 했었다. 아니면 마누라랑 함께 티브이를 틀어놓고 영화라도 보려고 했다. 시발-. 근데 이게 뭐야.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긴다. 그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바짝 메마른 입술이 무언가 말할 것처럼 옴싹 거 린다. 한참을 그렇게 망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뭐? 말해봐"

"무... 물 좀..."

이 개새끼가 진짜... 잠시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정수기로 다가가 천천히 물을 떠다 주었다. 이 새끼 지 목마른 건 참기 힘든 건가 보지? 그 녀석은 받아 든 물컵을 덜덜 떨며 입으로 가져갔다. 손 끝에 발라져 있는 노란색 매니큐어가 반짝거린다. 덜덜 떨리는 손끝 때문인지 노란색 손톱이 잔상을 남기듯이 흔들린다. 녀석은 물을 다 마시고는 탁자 위에 천천히 올려놓았다. 그 행동이 너무도 불안하고 느려서, 보고 있으면 없던 짜증도 생길 판이었다. 그 녀석은 또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약간은 총기가 돌아왔다. 촉촉이 젖은 붉은 입술 위로 혓바닥이 날름.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저기요... 저희 집엔 먹을게 많아요..."

"그래. 계속 말해봐"

"냉장고예요, 냉장고에 말이죠. 과일도 있고 고기도 있고... 먹을게 많아요 히히히. 그러니까 전 그게, 그러니까 먹을게 떨어지면 말이죠. 그러니까- 그... 그 뭐라 그러더라. 아아- 그래, 불안해져요. 방금 밥을 먹어서 배부른데도, 냉장고에 먹을 게 없으면 불안해져요. 많이요. 엄청. 히히히... 그래서요 전 항상 먹을게 떨어지기 전에 먹을걸 구해와요. 잔뜩 구해온 먹을걸 냉장고에 그득그득 채워 놓고 나면 괜히 마음이 편안해요. 경찰님도 그렇지 않아요? 든든할 거예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아아-. 그리고 말이죠 전, 사 오는 것도 좋아하지만 직접 구해오는 것도 좋아해요. 의외로 먹을게 도시나 한적한 시골길에 많거든요. 멧돼지라든가 사슴이라던가-. 혹은 고양이도 그래... 그래, 고양이도 먹을만했어요. 사람들이 왜 그걸 안 먹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죠. 아아-특히 개고기는 말이죠, 일단 개를 잡잖아요? 그럼 죽을 때까지 패야 돼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물고 할퀴어도 말이죠. 발로 밟고 몽둥이로 후려치고- 뭐 그런 것도 좋지만 말이죠, 진짜 좋은 건 죽어갈 때쯤에, 그러니까 숨이 간당간당할 때 있잖아요? 그때 칼로 목을 스윽- 긋는 거예요. 그럼 붉은 피가 줄줄 흐른단 말이죠. 근데 그게 또 별미예요. 항상 개새끼를 잡고 나면 저도 모르게 목에 입을 대고 피를 빨고 있더라니까요? 그게 드라큘라나 뭐 이런 거 보면 잘 나올 거 같죠? 아니에요-아니라고요. 그게 더럽게 안 나와요. 씨발 그 맛있는 게 말이죠. 핥아재낄때마다 굳어서 다시 칼로 후벼야 된다니까요?"

녀석은 자랑이라도 하듯 말을 계속 지껄였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표정을 관리한 채 타자를 두들겼다. 타다닥-거리는 타자 소리와 녀석의 말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피를 그렇게 다 쳐 먹고 나면 말이죠, 그때서야 고기가 생각나요. 근데 그게 씨발 진짜... 무거워요. 진짜. 너무 무거워서 질질 끌고 가다가도 열 받아서 그냥 쑤셔버리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 사냥한 뒤로는 캐리어 가방을 가지고 다녀요. 조금씩 썰어서 구겨 넣으면 어떻게든 들어가더라고요. 그 아까운 고기를 놓고 갈 순 없잖아요? 근데 씨발 진짜... 아-제가 원래 욕하고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때 개고생 한 것만 생각하면 진짜.... 저, 진짜 주위에서 사람들이 다 착하다고 그래요. 진짜예요. 중학생 때는 반장도 했고, 고등학교 땐 전교 부회장도 했었어요. 아아- 진짜..."

녀석은 회상에라도 빠진 듯 잠시 눈이 몽롱해졌다. 야이 개새끼야 하던 얘기나 계속해 씨발...

"하던 얘기나 계속해봐"

"아아-예. 그렇죠. 그러니까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아- 맞다. 그러니까 씨발 잘리기는 어찌나 안 잘리는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 조각내 놓고 캐리어에 넣어서 질질 끌고 가서 저희 집 냉장고에 떠억~하니 넣어둔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때서야 마음이 안정되는 거예요. 그게 먹지도 않은 고기들이 냉장고 안에 쌓여서 있는데 히야- 이게 얼마나 마음 뿌듯한지 몰라요. 그리고 그렇게 사냥을 한 날에는 뭐- 먹을까 고민할 것 없이 제일 싱싱한 고기를 꺼내서 요리해 먹는 거예요. 뼈는 대충 발라서 버리고 국도 끓여먹고- 구워서도 먹고- 히히히. 그러니까 매일 육식이라니까요? 제가 육식동물도 아니고- 근데 말이죠. 이 고기가 사람들이 진짜 맛있다고 자기들도 달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몇 명 건네줬더니 좋~다고 가져가고 히히히히히-. 아 진짜 그때가 제일 뿌듯하더라고요. 뭔가 남을 위해 헌신했다~이런 느낌? 어때요 경찰님도 하나 드릴..."

"야이 씨발새꺄"

나는 옆에 있던 연필꽂이를 녀석을 향해 던졌다. 빠악-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뒤로 나동그라지고, 나는 그제야 아 씨바-하는 생각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빌어먹을 씨발 좆같은 국가. 범죄자도 인권 찾는 개 같은 법이 어딨어 씨발.

나는 컴퓨터 옆에 놓인 사진을 바라봤다. 사진 속의 냉장고에는 조각조각난 시체가 가득히 차 있었다.

땅에 쓰러진 녀석이 버둥거리며 일어나 '그러니까 고기가 말이죠...'하는 소리가 무섭게 몸을 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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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이별이란 지독한 후유증을 남겼다. 비극과도 같은 후유증은 날 천천히 좀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목을 옥죄는 듯한 고통은 실제로 날 죽이는 것만 같았다. 아찔해져 가는 심장의 통증들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건 아마 네가 남기고 간 마지막 저주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너에게 준 상처만큼 네가 나에게 주는 저주라고. 날 천천히 죽여가는 아주 고통스러운 저주라고.

이 고통스러운 후유증을 견뎌내고 잠에 들 때쯤이면, 지쳐 쓰러져, 더 이상 네가 남긴 저주와 같은 고통을 잊어버리고 잠에 들 때면. 난 드디어 네 얼굴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 떠나버린 네가, 기억해내려 애쓰고 심장을 억죄는 고통 속에서 너를 잊으려 할 때에도, 흐릿한 잔상처럼 남아있던 네 얼굴이 잠들 때에서야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건 마치 나에게 내리는 마지막 악몽과도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떠올랐던 네 얼굴은 아침이 되면 다시 흐려질 것을 알았기에.

넌 나에게 지독한 후유증만을 남기고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다시는 볼 수 없음에 나날이 흐려져가는 네 얼굴이 난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후유증은 내가 죽기 전까지 계속 날 괴롭힐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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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아침이 밝아 눈을 뜨면 그는 결정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뜨거운 불길에 자신을 밀어 넣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 그는 굳은살 베긴 손으로, 미싱사들을 다독이던 손으로 불길 속을 뛰며 소리를 질렀다. 기계가 아니라던 그의 외침은 타들어가는 그의 육신에서 평화시장을 가득 메웠다. 밤을 새워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읽어나가며, 눈을 뜨면 고사리 손으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위하여. 그는 그렇게 자신을 고난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루 16시간의 고된 노동을 겪어가면서도, 배고픔을, 굶주린 배를 움켜쥐어야만 했던,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은 없었다. 자기 몸집 불리기에 바빴던 돼지들에게, 빨갱이가 되어버린 그의 선택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의 몸을 불태워가며 노동자들의 인권을 혼자 짊어지며. 그는 그렇게 배를 굶주린 채 불길에 몸을 던졌다. 그는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야만 했다. 마음의 고향으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죽이고, 자신이 돌보지 않으면 안 될 나약한 생명들을 위해, 그는 외치었다. 불타는 심신으로 그는 외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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