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씀'에 해당되는 글 174건

  1. 2018.08.16 밤바다.
  2. 2018.08.16 무심히.
  3. 2018.08.16 기억.
  4. 2018.08.16 숙이(2)
  5. 2018.08.13 헤어짐.
  6. 2018.08.13 속도.
  7. 2018.08.13 한참 후에.
  8. 2018.08.13 도구.
  9. 2018.08.13 찾다.
  10. 2018.08.10 해방감.

어릴 적 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혈기 넘치는 대학생이었고, 여느 대학생이 그렇듯 젊음을 불태울 일을 찾아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태양이 아마 우리를 쪄 죽이리라 생각했던 그 여름날, 친구들과 나는 바다로 향했다. 남자들만 있는 대학 친구들의 바다 여행이란 결국 다 젊음을 허비하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술과 노래와 여자, 모두의 목표는 그것이었고, 그 일을 위해 다들 밤이 되길 기다렸다. 오늘은 드디어 딱지 뗀다는 헛된 기대감과 저질스런 얘기들이 이어졌다. 마치 오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한 것처럼.

밤바다는 어찌 보면 짐승들의 구애 현장과 다를 바 없었다. 공작새는 멋진 꼬리깃을 펼쳐 암컷에게 구애한다. 화려한 생김새는 암컷을 유혹하기 충분했다. 다른 수컷 놈들도 서서히 암컷을 낚아채 제 둥지로 쏙쏙 숨어 들어갔다. 그에 비해 우리는 닭,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볼품없이 옆으로 쓰러지는 빨간 벼슬만 가진채, 있는 것도 없이 목소리만 울려대는 볼품없는 닭들.

우리는 바다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주저앉았다. 그렇게 우리의 젊음을 공쳤다는 생각에 씁쓸함이 몰려왔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끼리 밤바다를 무대 삼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얼큰하게 들어간 술기운은 다시금 맥락 없는 용기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나는 술기운을 벗 삼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친구들은 내 실패를 확신하며 비웃을 준비를 하며 나를 미리 놀려댔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그때의 난 확신에 차 있었다. 혼자 가면 가능할 것이다. 혼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면. 난 무작정 밤바다를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결국 나의 자만이었을 뿐, 난 수많은 퇴짜를 경험했다. 얼큰하게 올랐던 술이 깨어갈 때쯤, 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시도해보기로 했다.

검은 생머리에 붉은 뷔스티에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밤바다의 바다에 발을 담근 채 서 있었다. 검은 생머리가 별빛을 반사시키는 것처럼 반짝였다. 난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아직 돌아가지 않은 술기운을 억지로 붙잡아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서울에서라면 내가 감히 말도 못 붙일 정도의 미인이란 걸. 그리고 마음속 언저리 어딘가에서 말을 걸면 안 된다는 불편한 생각이 두둥실 떠올랐다.

하지만 난 이미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저랑 술이나 한잔 하실래요?"

그녀는 천천히 검은 생머리가 미동도 않을 정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칠흑 같이 어두운 그 눈은 날 가만히 바라보다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빨간 혀가 입술을 핥았다. 저 입술에 입 맞출 수 있다면. 마음속 언저리 어딘가에 있던 불편한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그녀는 가벼이 말하고는 내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맞잡은 채 나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발목에 넘실대는 파도는 어느새 무릎으로, 허벅지를 넘어서 허리를, 가슴을 지나 목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난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목 밑까지 차오른 별빛이 눈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나를 더욱 잡아당겼다.

그리고 난 그때가 되어서야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나보다 작았을 그녀는 아직도 가슴 언저리만 밤바다에 잠긴 채 날 당기고 있었다. 목을 넘어 턱에 넘실거리던 밤바다는 이내 날 집어삼켰다. 내 기억 속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가 허우적 대는걸, 기괴하게 꺾인 목 각도로 똑바로 선차로 웃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다행히도 난 극적으로 친구들에 의해 구해졌다.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난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바다로 바다로 걸어갔다고 한다. 난 술을 많이 마신 걸까? 아니면 귀신에게라도 홀린 것일까. 어찌 됐든 그 날 이후로 난 밤바다에 가지 않는다.

지금도 생각나는 그녀의 모습이 날 언젠가 밤바다로 끌고 갈 것 같았기 때문에.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여섯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  (0) 2019.01.28
비오는 날.  (0) 2019.01.28
멀리 있는.  (0) 2018.08.16
무심히.  (0) 2018.08.16
기억.  (0) 2018.08.16
Posted by Ralgo :

모든 일을 무심히 대해보려 노력 중입니다. 잘 되지 않음에 슬픔이 차올라도 내색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슬픔은 눈물을 따라온다고 합니다. 울지 않으면 저 멀리 달아난다고. 웃음은 행복을 불러온다고 합니다. 웃지 않으면 행복은 저 멀리서 관망할 뿐이라고. 무심히 모든 일을 대해보려 합니다. 전 지금 슬프기도 그렇다고 행복하기도 싫기에 모든 일을 관망하며 그냥 그 자리에 있어보려고 합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일이란 사실 별거 아닐지도 모릅니다. 객관화시킨 자신을 보고 있으면 될 일입니다. 찰리 채플린의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말처럼 사실 모든 일은 관점에 따라 달라질지 모릅니다. 별거 없는 일생이란 말처럼. 그렇기에 전 제 삶을 관망해보려 합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나의 삶을 다른 이의 눈으로 관찰하려 합니다. 화내지도 그렇다고 즐거워하지도 않은 채. 그렇지만 어찌 보면 이건 이것 나름대로 재미있을지 모르니, 그건 결국 무심히 관망하는 자세와는 다른 모습이 되긴 하겠지요.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여섯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  (0) 2019.01.28
비오는 날.  (0) 2019.01.28
멀리 있는.  (0) 2018.08.16
밤바다.  (0) 2018.08.16
기억.  (0) 2018.08.16
Posted by Ralgo :

기억의 편린은 깨어진 유리조각과 같았다. 쓸어내고 닦아내어도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 상처를 내고 고통을 남긴다. 빛은 산란하여 편린을 반짝인다. 유리조각은 흩어져 빛을 산란한다. 빛은 보이지 않은 채, 또는 반짝이며 그곳에 있다. 반짝이는 기억이란 결국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아름다운 추억이 빛을 산란하는 것처럼 고통과 슬픔은 예리하게 상처를 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관망하는 것만이 상처입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여섯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  (0) 2019.01.28
비오는 날.  (0) 2019.01.28
멀리 있는.  (0) 2018.08.16
밤바다.  (0) 2018.08.16
무심히.  (0) 2018.08.16
Posted by Ralgo :

병원은 항상 숨통을 조이곤 했다. 턱턱 막혀오는 갑갑한 공기는 경찬을 괴롭게 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이건 익숙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질적인 존재, 경찬은 그곳을 빠져나온 이 후 항상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 왔다. 다른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은 그를 더욱 긴장 상태로 몰아가는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경찬은 담당의를 바라보곤 중얼거렸다. 매끈한 뿔테 안경 속으로 자그마한 실눈이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듯이 자신을 훑고 있음을 느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걸 간신히 참아내며 의자에 앉았다. 오수라 쓰여있는 명패에 반사되는 빛이 껄끄럽게 눈을 간질였다.

"오랜만이시네요, 김경찬 씨"

오수는 고개를 까딱이며 자리에 앉는 경찬을 바라보다 명패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경찬의 눈에 쏟아지던 빛이 조금은 분산되어 벽면을 밝혔다. 오수는 경찬을 바라보며 차트에 글씨를 적어 넣는 척했다. 상담이란 지루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환자와 담당의 간의 숨 막히는 눈치 싸움 끝에 원하는 결과만을 추출해내야 하는 것이다.

오수는 경찬을 살폈다. 유난히도 이 곳을 싫어하는 환자였기에 오수는 섣불리 말을 건네지 않았다. 신뢰, 환자에게서 신임을 얻어내는 방법은 쉽지 않았다. 오수는 차분히 기다렸다. 경찬은 답답한 듯 연신 목 주위를 손으로 매만졌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잔향으로 남아 경찬을 괴롭히고 있었다. 오수는 경찬 외의 환자들을 더듬어 떠올렸다.

"물, 물 좀..."

경찬이 간신히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이 곳에만 오면 입안이 타들어가는 듯한 작열감이 덮쳐오곤 했다. 물을 마신다고 해도 이 통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항상 물을 찾았다. 오수는 준비되어 있던 물병을 경찬에게 건넸다. 경찬은 서둘러 뚜껑을 열어 물을 들이부었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밖에 나가서 얘기할까요?"

오수의 말에 경찬은 서둘러 뒤따라 나섰다. 둘은 병원 밖의 공원 벤치에 걸터앉았다. 밖을 나서니 타는 듯한 고통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목의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쉽사리 사라질 수 없는 증상이다, 경찬은 아마 이 증상들이 평생 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약은 떨어지셨을 테고, 상담은 오래만이고, 그렇죠?"

경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찬은 가방에 손을 넣어 캠코더를 매만졌다. 투박한 캠코더에서 느껴지는 거칠거칠한 손때가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 같았다. 경찬은 오수를 바라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 필요합니다"

아주 작은 목소리, 오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들리지 않은 앞의 말보단 경찬이 무언갈 요구한 건 처음이었다. 인형과 같이 아무런 욕구 없이, 작은 감정이라도 속으로 숨기며 드러내지 않는 짐승처럼. 오수가 대답을 하지 않자 경찬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피해자들, 정보가 필요해요"

빌어먹을 그 기억 속으로 다가가기 위해선 자기 혼자론 안된다. 경찬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누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의 시간, 공간, 기억들이 무섭게 몸을 훑었다. 경찬은 눈을 가만히 감은채 캠코더를 매만졌다. 서늘한 기억과 고통들이 캠코더를 타고 손을 통해 감정을 억눌렀다.

지속되는 기억은 고통을 만들었다. 일상이 이어지지 않고 쉼 없이 균열이 커져가며 경찬을 갉아먹었다. 기억은 곰팡이처럼 스멀스멀 온몸을 덮었다. 눅진한 기억은 그대로 모든 기억에 들러붙어 끊임없는 고통을 퍼트렸다. 탁주와의 만남이 시발점은 아니었다. 짧은 고민이 아니었다. 마주치기 어려운 기억에 회피하고 있었을 뿐, 언젠가 맞닥트려야 할 문제란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손 끝의 악몽을 열어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안됩니다. 모든 환자 개인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어요"

오수의 단호한 말에 경찬은 고개를 숙였다. 알 수 없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떤 모습인지. 살아는 있는지 나 외에 사람이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는 있는지. 인터넷엔 그들의 생활을 찾을 수 없었다. 꽤나 많은 사람이 나왔을 텐데도, 이상하리만치 그곳의 사람들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경찬의 실망한 표정에 오수는 손가락을 두들겼다. 우연이었다, 자신이 그 사람들을 받게 된 건. 우연히도 이 곳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또 우연히도 당직자가 자신이었을 뿐이다. 정체를 숨기고 찾아온 그들은 저마다 간절한 비밀을 요구하며 그를 찾았다. 그들은 정보였다. 그들이 겪은 내용은 가십거리에 미친 기자들에게 먹음직한 먹잇감이었다. 오수에게 정보는 돈이었다. 그들이 싸들고 온 그때의 모든 기억들은 돈이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제 서서히 그들의 이야기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대중은 자극을 원했다. 자극이 커질수록 그들의 요구는 더욱 커져갔다. 이제는 이야기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웃기게도 경찬이 찾아왔다. 끌어안고 다니는 오래된 캠코더를 들고서. 이 얼마나 달콤한 먹이인가. 저 캠코더엔 분명 더 달콤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안 될까요?"

경찬의 물음에 오수가 자뭇 고민하는 척 턱을 쓰다듬었다. 너무 성급하지는 않을까. 이 제안은.

"좋습니다, 단 제안이 있습니다. 그걸 들어주신다면 한명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오수는 경찬의 가방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캠코더, 알려드리는 대신 그 캠코더를 보고 싶습니다"

'조금 긴 끄적임-. > 백린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숙이(1)  (0) 2018.08.08
1999년  (0) 2018.08.01
Posted by Ralgo :

"너 아직 대답 안 했어"

"응"

"대답해"

"미안"

그렇게 소년은 짧은 말만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소녀는 소년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에 살짝 피가 맺힌다. 소녀가 한발 소년에게 다가간다. 그리곤 손을 높게 치켜들고 휘둘렀다. 짝-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소년의 얼굴이 벌겋게 변한다. 소녀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시 손을 치켜든다. 하늘로 향한 손 끝이 파르르 떨린다. 다시금 휘둘러지는 손, 더욱 붉어지는 소년의 얼굴. 소녀는 욱신거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손 끝의 고통이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욱신거리는 고통은 소년의 얼굴을 뿌옇게 보이게 만들었다. 소녀는 그제야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걸 깨달았다. 성질내듯 눈물을 훔쳐낸다. 소년은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소녀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 말 없는 소년의 침묵은 칼이 되어 소녀를 찔렀다.

"대답... 안 할 거야?"

"응"

"왜"

소년은 다시 대답이 없다. 소녀는 다시 때리려는 듯 손을 위로 치켜든다. 하지만 차마 다시금 때리지 못하고 손을 내렸다. 소녀는 왈칵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는다. 소년의 손을 붙잡고, 울컥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아내고. 떨리는 목소리로, 담담한 척 입을 연다.

"가지 마"

"미안"

소년은 소녀를 밀어낸다. 그제야 소녀는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토해낸다. 흘러넘치듯 모든 눈물이 터져 나온다. 소년은 그렇게 울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소녀는 혼자 울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소녀는 소년이 없는 그곳에서 혼자 울었다. 세상 모든 울음을 다 토해낸 것 마냥 다 울고 나서야, 소녀는 집으로 향했다.

침대에 몸을 뉘이자, 멈춘 줄만 알았던 그 눈물이 다시금 쏟아져 내렸다. 배게를 흠뻑 적시고 나서도- 그 이후로도. 소녀는 멈추지 못하고 울음을 계속 흘려냈다.

소녀는 헤어졌다.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다섯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도.  (0) 2018.08.13
한참 후에.  (0) 2018.08.13
도구.  (0) 2018.08.13
찾다.  (0) 2018.08.13
해방감.  (0) 2018.08.10
Posted by Ralgo :

속도를 높이는 일은 쾌락을 불러왔다. 계기판의 눈금이 끝에 치다를 수록 발끝은 더욱 깊게 페달을 밟았다. 빨간 숫자가 영혼을 유린한다. 시야는 좁아져 어두운 터널에 잔상을 남긴다. 붉은 선과 노란 선이 어지러이 교차한다. 귀를 때리는 소리는 바람이 되어 스쳐 지나간다. 가속은 손쉽게 쾌락을 유도한다. 더 빠르게 더 아찔하게 더욱더. 나를 비롯한 모든 것들은 속도의 세계에서 빛으로 점멸하며 스쳐 지나간다. 빛은 찰나와 같다. 찰나의 불빛은 선으로 점으로.

속도는 죽음을 향해간다. 이대로 끝으로 저 멀리. 고조되어가는 스릴에 반비례해 정신은 고요와 같이 침잠해간다. 쾌락은 고통과 같았다. 속도와 함께 치솟았던 쾌락은 끝이 보이는 터널과 함께 고통으로 돌아온다. 고통은 현실이었기에 죽음은 곧 직면해 있다. 빠르게 더욱 빠르게, 터질듯한 쿵쾅 소리는 엔진 소리인가 심장의 맥박질인가. 죽음은 점멸하며 눈 앞으로 성큼 뛰어든다. 계기판 눈금의 끝이 파르르 떨려온다.

이대로 저 끝으로 페달을 내리밟는다. 빛은 선으로 어지러이 점멸한다. 저 끝으로, 아무것도 없는 어둠으로.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다섯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어짐.  (0) 2018.08.13
한참 후에.  (0) 2018.08.13
도구.  (0) 2018.08.13
찾다.  (0) 2018.08.13
해방감.  (0) 2018.08.10
Posted by Ralgo :

그대가 날 사랑하는 만큼만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면, 그랬다면 나의 불안이 조금은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저 달이 어둠을 밀어내는 것처럼. 당신이 저 초승달처럼 날 안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면, 우리는 좀 더 오랜 기간 서로를 더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그대와 내가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가리어진 그 날,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난 당신을, 당신은 나를. 어쩌면 우리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서로를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요. 한참 후에, 강산이 변하고 우리의 머리칼도 하얗게 눈이 내릴 때쯤. 그때쯤이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난 아직도 불안함에 휩싸이고는 합니다.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것의 이유가 사라질 때면. 마치 신기루처럼 그대가 사라질까 두려워 잠 못 이루곤 합니다. 초승달을 보고 있노라면, 천천히 그대를 밀어내어 보름달이 되는 게 당연시되는 것 같아 괴롭곤 합니다. 당신이 나의 구름이기를, 나의 태양이기를, 나의 어둠이기를, 나의 추한 본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바라봅니다. 난 우리의 보름달이, 우리의 이별이 되지 않기를, 그대가 날 사랑하는 만큼, 내가 그대에게 온전히 기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우리가 맞잡은 손이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난 뒤에도. 그대가 나에게 주었던 사랑만큼 내가 그대에게 더 많은 사랑을 돌려주었기를, 간절히 아주 간절히 또 바라봅니다.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다섯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어짐.  (0) 2018.08.13
속도.  (0) 2018.08.13
도구.  (0) 2018.08.13
찾다.  (0) 2018.08.13
해방감.  (0) 2018.08.10
Posted by Ralgo :

나는 나의 감정을 도구로 삼지 않았나. 그 헛된 감정과 거짓된 상심을 도구 삼아 거짓된 글을 적고 있진 않았나. 가면이라 생각했던 게 내 본 얼굴이라면, 본모습이라 생각했던 게 가면이 되는 것인가. 아니, 두꺼운 낯짝을 뒤집어 거죽을 떨궈낸다면 그건 내 얼굴인가. 피를 땅에 뚝뚝 떨궈내며 비곗덩이 출렁이는 몸뚱이는 언제나 거짓을 고하고만 있는가. 나에겐 결국 거짓만 도구로 남아 감정을 속이고만 있는 게 아닌가.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다섯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도.  (0) 2018.08.13
한참 후에.  (0) 2018.08.13
찾다.  (0) 2018.08.13
해방감.  (0) 2018.08.10
권위.  (0) 2018.08.10
Posted by Ralgo :

"'탕'은 제 강아지예요. 아니, 가족이에요"

조그만 소년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는 왠지 모르게 슬픔이 가득 묻어있어서 차마 뭐라고 대꾸하지 못했다. 나는 옛날부터 강아지가 자신의 가족이라느니, 자신의 분신이라느니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년의 절박함에는 쉽사리 그렇게 모질게 말할 수 없었다. 소년은 조그마한 손을 주머니에 넣어 뒤적거리더니 동전 몇 개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릴 적 보았던 '장화 신은 고양이'와 같은 모습이라 눈을 돌리기가 어렵다. 내 표정을 본 소년은 잔뜩 얼굴을 구기더니 주머니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유희왕 카드도 올려놓고, 주사위, 작은 배지, 오락실에서 주워온 듯한 장난감 몇 개. 조막만 한 손이 쉼 없이 움직인다. 소년은 그렇게 주머니에 모든 걸 꺼내놓더니 다시 입술을 옴싹 거렸다. 말을 하고 싶은데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찾아... 주세요"

"꼬마야... 그게..."

"찾아... 달라고요"

"그러니까..."

하아-. 어떻게 말을 해야 하지? 차마 찾을 수 없다고 말을 할 수가 없다.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소년은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인다. 나는 그렇게 감사인사를 하던 소년이 몸을 돌려 나가기 전에 멈춰 세웠다.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잡동사니를 쓸어 담아 소년에게 건네어주고, 그중에서 아주 작은 배지 하나만을 손에 들었다. 소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눈높이를 맞춘다.

"수고비는 이걸로 할게. 그러니 집에 가서 기다릴래?"

"... 예!"

소년은 눈물을 손등으로 닦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몸을 돌려 집으로 뛰어간다. 나는 뛰어가는 소년을 보며 머리를 긁적인다. 하아-이걸 어쩐다? 몸을 돌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끼잉-끼잉-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간혹 멍멍거리는 소리도 시끄럽게 들려온다. 나는 바닥에 있던 파이프 하나를 들어 벽에 휘두른다. 까앙-하는 소리와 함께 일순간 시끄럽던 소리가 사라진다. 나는 방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개를 바라본다. 발끝으로 밀어 고개를 돌리자 목걸이가 드러난다. '탕'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은빛 목걸이. 그걸 보고 있으려니 소년의 그 눈망울이 계속 떠오른다. 하아- 이걸 어쩐다.

"시발. 지네 부모가 와서 팔아넘겼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미 뒈져버렸다고 할 수 도 없고...

손에 들고 있던 배지를 엄지로 튕긴다. 타앙~탕~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튕기더니 하수구로 쓱 빨려 들어가 버린다.

"이걸 어째...?"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다섯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참 후에.  (0) 2018.08.13
도구.  (0) 2018.08.13
해방감.  (0) 2018.08.10
권위.  (0) 2018.08.10
오늘처럼.  (0) 2018.08.08
Posted by Ralgo :

모두들 미친 거라 생각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은 항상 절 밖으로 이끌고 맙니다. 코트에 몸을 감싸고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그들의 놀라는 표정을 볼 때면, 터질 것만 같은 욕구가 치솟아 오릅니다. 해방감, 그리고 자유. 맨 몸에 닿아 흩어지는 차가운 바람 살결을 스치고 땅에 떨어져 내리는 옷가지. 아아~! 발끝부터 저릿저릿 올라오는 이 흥분과 해방감! 당신들은 모를 겁니다, 이 황홀한 느낌을! 겪어보지 않은 당신들은 알 수 없겠지요, 한번 경험해 본다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겁니다. 사회 규범 도덕 따윈 다 잊어버리고 태초의 모습으로! 아아~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다섯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구.  (0) 2018.08.13
찾다.  (0) 2018.08.13
권위.  (0) 2018.08.10
오늘처럼.  (0) 2018.08.08
반딧불이.  (0) 2018.07.27
Posted by Ral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