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침잠할 것이다. 그건 오랜 세월 나와 함께해 온 깊은 우울감과의 무언의 약속, 혹은 당연한 수순과도 같은 거였다. 마치 당연히 정해져 있는 운명처럼 깊은 어둠은 내 발목을 타고 올라와 어느새 목 밑까지 차올랐다. 아니 내가 스스로 가라앉으려 하는지도. 이 우울감은 항상 불시에 나를 덮쳤다. 순식간에 격류에 휘말리듯, 우울감의 파도는 나를 뒤흔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했다.

우울. 불안. 공포. 분노. 슬픔. 절망. 그리고 결국은 허무.

이 모든 감정이 결국은 허무와 비슷하다는 걸. 그걸 깨달은 지금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 우울도 언젠간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마치 먼지가 털어져 나가듯. 그렇게-. 목까지 차오른 우울을 애써 무시했다.

집을 나섰다. 하늘은 내 우울과는 다르게 맑았다.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상쾌해서 우울을 조금씩 털어내기 시작했다. 파도가 먼지가 되어 떨어져 나간다. 나는 또 웃기게도 이 우울을 떨쳐내어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멍청하게도.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옥상을 찾았다. 하늘은 맑았다.

그리고 나는 떨쳐내어 버린 줄만 알았던 어둠이 다시금 발목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찌 이리도 멍청할까. 우울은 날 놀리듯이 목 밑에서 넘실거린다. 멍청한. 우울은 곧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나의 세계를 어둡게 만들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인 것처럼. 난 죽기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고 싶다. 또 그런데도 불구하고 편해지고 싶고, 또 힘을 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난 지금 일기처럼, 혹은 유서처럼 이렇게 글을 남긴다.

다른 누군가가 혹시 이 글을 본다면, 나와 같은 우울의 격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숨이 막힌다면. 다른 이들은, 당신은.

난 아마 몸을 던질 것이다. 이 우울은 날 그렇게 할 것이다. 기어코 날 그렇게 만들 것이다.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세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기.  (0) 2018.06.07
신념.  (0) 2018.06.07
꽃.  (0) 2018.06.07
같은 자리.  (0) 2018.06.07
편승.  (0) 2018.06.07
Posted by Ralgo :

"날 사랑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꽃을 줘"

처음에 꽃을 사서 너에게 간다는 건 쑥스러웠다. 사실 그렇잖은가? 길가에 꽃을 들고 다니는 남자라니,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네가 좋다면-이라고 생각했다. 넌 꽃과 같았다. 아름다운 겉모습뿐만 아니라 옆에 있을수록 더욱 퍼져나가는 너의 매력은 향기와 같았다. 그래서 넌 꽃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너와 닮아서-너와 같아서.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난 꽃을 사들고 너에게 간다는 게 쑥스럽지 않았다. 꽃을 닮은 너의 미소가, 같이 퍼져나갈 너의 향기가 일종의 기대로 바뀌어 있었다. 천팔백일이 가까워 오는 이 순간에도 넌 여전히 꽃과 같이 아름다웠다.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세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념.  (0) 2018.06.07
우울.  (0) 2018.06.07
같은 자리.  (0) 2018.06.07
편승.  (0) 2018.06.07
일기장.  (0) 2018.06.07
Posted by Ralgo :

도서관에 들어섰다. 항상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왠지 모르게 달라진 그 풍경에 기시감을 느끼며 항상 같은 시간, 같은 내 자리에 앉았다. 책을 읽다 고개를 살짝 들면 그녀가 시야 끝에 걸리는 자리로. 시간이 좀 지나도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뭐-사실 내가 그녀를 걱정하거나 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와 단 한마디도, 어떠한 이야기도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벼운 눈인사라도 하는 그런 사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난 그녀가 계속 신경 쓰였다. 나도 모르는 새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야 들었어?"

옆자리의 남자들이 조용히 입을 놀린다. 그들은 재미난 이야깃거리라도 찾은 듯 눈을 반짝였다. 말을 꺼낸 남성이 턱짓으로 그녀가 항상 앉아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요전번에 뉴스에 나온 그거 있잖아, 학교 앞 놀이터에서-"

"살인사건? 뉴스에 나온"

응응-그 여자래- 그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도서관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그때까지 들리던 작은 소음들은 사라지고 그들의 말소리만이 이 공간을 가득 매웠다. 죽었다는데-죽었다는데-죽었다-.

난 나도 모르게 책상을 쾅치며 일어섰다. 도서관 내의 모든 사람이 날 쳐다본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모를 일이지만, 가십거리가 되어버린 그녀가,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었을 그녀가 서글픈 건 나뿐이었을까. 이름도 모르던 그녀가 가십이 되어버린 게 화가 나는 건 내가 이상한 걸까. 짐을 챙겨 도서관을 나왔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 시야의 한쪽에 걸리던 그녀가 없다는 건 꽤나 불편한 일이 될 것 같았다.

'끄적끄적-. > 불편한 이야기-세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울.  (0) 2018.06.07
꽃.  (0) 2018.06.07
편승.  (0) 2018.06.07
일기장.  (0) 2018.06.07
봄날.  (0) 2018.06.07
Posted by Ral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