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왜 이다지도 나가는 게 무서울까요.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왜 공포가 되는 것일까요.
'네가 쓰레기라 그런 거야! 덜 떨어진 새끼' 아버지는 항상 그렇게 나에게 말하곤 하셨지요.
'조금만 더 용기를 내보렴, 아빠가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란다' 그 이후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셨지요. 사실 두 분의 말씀은 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요.
나는 덜 떨어진 게 맞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모든 행동이 다 이해가 되니까요. 덜 떨어진 쓰레기에겐 자그마한 용기조차 넘지 못할 커다란 산과 같으니까요. 마치 내 방의 문지방처럼요.
세상은 마치 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게 맞을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잘 못 된 걸까요? 아니면 제가 틀린 걸까요?
밖에 나가는 것조차 못 하는 저는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아버지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는 것 같습니다. 전 아마 계속 이렇게 있을 겁니다. 문지방 너머의 변해가는 세상과는 다르게
다음에. 그건 제 입버릇일지도 모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제일 손쉽게 도망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지요. 그들에게 있어서는 언젠가는 마주칠 것만 같은 기약 없는 흐릿한 약속을. 나에게 있어서는 언제든 잊어버려도 괜찮은 죄책감 없는 약속을. 아마 서로는 서로에게 있어서 '다음에'라는 말을 그렇게 사용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저에게 있어서 이런 상황은 퍽이나 난감한 상황입니다. 이웃집 아이가 강아지를 들고 왔습니다. 갈색의 털이 복슬복슬한, 하지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똥개 그 이상은 아닌 것 같은. 아이는 날 보고는 안고 있던 강아지를 내밀었습니다.
"아파요 병원에 가야 해요"
아이의 말에 난 조금 뒤로 물러섰습니다. 강아지는 힘이 없는지 아이의 팔에 몸을 기댄 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같이 갈 이유가 있을까요. 난 현관문을 열며 도망치듯 말했습니다.
"미안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다음에 가면 안 될까?"
재빨리 문을 닫고 상황을 도피하자 마음이 안정됩니다. 컴퓨터를 켜고 밖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헤드폰을 끼었습니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담배가 다 떨어져 별 수 없이 집을 나서기 위해 문을 열었습니다. 그제야 잠시 기억 저편으로 잊고 있던 아이와 강아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또 퍽이나 난감하게도 아이는 아직 문 밖에 앉아있습니다.
"아파요..."
아이가 내민 강아지의 머리가 힘없이 땅으로 고꾸라집니다.
"아..."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만 다음에란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라면을 끓였다. 밤 열한 시. 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김치 한 종지와 소주 한 병을 같이 꺼내었다. 라면 한 젓가락에 소주 한잔. 김치 한 조각.
홀로 하루를 보내고 마무리하는 의식처럼. 켜지 않은 텔레비전의 검은 화면에 비친, 형광등 불빛을 별빛 삼아 한잔. 메마르게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또 한잔.
열두 시가 되기 전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셨나 보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어머니 홀로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