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음성을 들었소!"
그는 또 소리치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은 날이라면, 난 당연히 그를 무시하고 지나갔을 거다. 어느 세상이든 저런 또라이 사이비들은 있으니까. 그런 그의 행동을 지금 이렇게 보는 것은 아마 내가 죽기로 결정해서일 거다. 다들 그렇지 않나? 죽기 직전 회개하고 천국을 가기 위해서, 선량한 사람이든 악인이든 부자이든 거지이든 간에 아무런 접점도 없는 사람들이 죽음을 앞에 두면 그렇게들 신을 찾는다. 구원이란 사람을 참 비참하고 비굴하게 만든다. 난 그의 시선이 간신히 머물만한 거리에 걸터앉았다. 겨우 몇 걸음 움직였다고 심장과 폐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는 땅에 머리를 박고는 손을 머리 위로 쳐올렸다. 그 행동은 세계의 유명한 명화나 교회 벽면에 그려져 있을 법한 회개하는 자의 모습이었지만, 그의 남루한 행색이 그를 빛바래게 만들었다. 그는 한참을 중얼거렸다. '신의 음성을 들었소, 신의 음성입니다!' 계속 그 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고개를 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움푹 패인 두 눈이 흡사 죽은 사람의 동공마냥 초점을 잃은 채.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 느릿한 움직임에 나는 오히려 일어서 자리를 피할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내 앞에 서서는 방금 전 교회 앞에서 한 자세를 다시금 취했다.
"신의 음성을 들었소, 신의 음성이란 말입니다"
그는 마치 나에게 되물어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 풀린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말을 걸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끌리듯 입을 열고 말았다.
"신이 무슨 말을 하십니까?"
그는 퍼석거리는 수염을 손으로 거칠게 쓸고는 입을 열었다.
"세상은 종말에 다다랐습니다. 신은 저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을 끝낼 때가 되었으니 모두 그 끝을 대비하라'라고 말이요! 이제 세상은 끝날 때가 되었습니다! 엿새 후 달이 태양을 감추는 그 순간에 말입니다!"
어느 곳에나 있는 흔한 종말론이다. 사실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세상의 종말이건 인류의 종말이건 무슨 상관 이냔 말이다. 난 심드렁해질 수밖에 없었다. 좀 더 회개하라거나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갈 거라거나 그런 류의 이야기가 좀 더 흥미로웠을 터다.
"그래서 종말이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모두 죽습니다. 세상의 끝이란 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 그냥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신은 말하셨습니다. '내 너희를 가엾이 여기며 긴 세월을 보내왔으나 너희의 오만과 실수 거짓된 야욕과 분노, 이기심과 편협함으로 인해 다 끝내기로 하였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천국과 지옥은 없습니다! 세상의 끝인 거란 말입니다!"
난 그 사이비의 말에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죽을 거 망해버리라지. 세상이 어찌 되든 내가 상관할 일 없지 않나. 그냥 망해버리든 끝나버리든.
"최근에 제가 들은 개소리 중 가장 맘에 드는 개소리네요"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땅에 처박고 '신의 음성을 들었소'라는 말 따위를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나는 죽을 거 세상도 같이 끝나버리라지.
'끄적끄적-./불편한 이야기-한달.'에 해당되는 글 31건
너와 나의 관계는 비탈길과 같았다. 넌 위에서 그저 관망하며 날 내려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너의 그 조그마한 관심과, 쓰레기를 버리는 듯한 무심한 감정의 표현들을 받기에 급급했다. 우리의 관계는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기에.
난 끊임없이 너의 관심을 갈구했다. 그게 얼마나 처절한지 내 위에 있는 너의 발끝만 바라보며 한없이 애가 끓었다. 넌 귀찮아하며 짜증을 내며 그리고 조금씩 질려가며 나에게 던져주던 관심은 적어졌다. 내가 너에게 다가가려 비탈을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이윽고 너에게서 떨어진 조그마한 감정은 비탈길을 치달아 나에게 커다란 증오로 떨어져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너의 그런 감정이라도 나에겐 필요했다. 너와 나의 관계는 비탈길과 같았다. 밑으로 치달아 떨어질 것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난 너에게서 떨어질 수 없었다.
아버지는 꽁꽁 얼어버린 손을 모아 입김을 불었다. 하이얀 입김이 아스라지어 하늘로 흩어졌다. 차가운 물 때문에 두 손이 뻘겋게 변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날 보며 웃어 보였다. '물이 참 차다 그치?' 난 마루에 무릎을 글어모아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양말 두 켤래를 뭐가 그리 소중하다고. 하루 더 신어도 되는데 기어코 손빨래를 하는 아버지는 '아고 춥다 추워. 들어가 있어 감기 걸릴라' 하며 내 걱정을 하기 바빴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콧망울에 콧물이 맺혔다. 소매로 코끝을 훔치니 소매가 반들반들해졌다.
'다됐다!' 아버지는 당장이라도 얼어버릴 것만 같은 양말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아랫목 제일 뜨끈한 곳에 양말을 넣고는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힘들지?"
아버지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살다 보면 말이야 저 밤하늘처럼 어두울 때도 있고, 뼈를 파고드는 냉정하고 비정한 일도 있고, 네 양말처럼 더러워지는 경우도 있어"
아버지의 입김이 먼지처럼 하늘로 사라졌다.
"그래도 말이야. 저 밤하늘엔 반짝이는 별도 있고, 차가워진 손에도 입김처럼 따뜻한 온기를 불어줄 수도 있고, 더러운 양말도 깨끗하게 할 수 있으니까"
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멋쩍게 웃고는 '감기 걸리니까 얼른 들어오렴'이라는 말을 하고는 방에 들어갔다. 난 잠시 그냥 앉아있었다. 어머니의 장례 후 아버지 나름대로 생각한 나를 위로하는 말일 거다. 사실은 자신이 더 힘들 텐데도. 아마 올해 겨울밤은 아버지와 나에게는 유난히도 추울 것만 같다.
"너의 그 태도가 싫은 거야 난"
우리의 싸움은 항상 이런 말로 끝나곤 했다. 넌 말없이 머리를 끌어올려 묶은 후 담배를 물었다. 빨간 립스틱과 담배연기가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보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당당하게 담배를 꺼내 물던 너에게 반했던 게 떠올랐다. 붉은 입술 사이로 땅으로 가라앉듯 나오는 담배연기가 그렇게도 멋져 보였다.
"담배 끊기로 했잖아"
그렇지만 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넌 피식-웃어버리고는 바닥에 담배를 비벼 껐다. 얇고 긴 손가락, 검은 네일. 너에게 참 어울리는 손짓과 색이란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싫어. 계속할 거야 네가 뭐라든"
"넌 나랑 한 약속은 하나도 지킬 생각이 없지?"
너의 입술이 비쭉거렸다. 넌 항상 불만이 있을 때 그런 표정을 지었다. 그게 평소의 당당한 너와는 너무나도 달라서 다른 매력처럼 느껴졌다.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지만.
"약속은 무슨... 너 혼자 말한 거잖아"
너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이제 말할 때도 됐지.
"처음엔 내가 담배 피우는 거 술 먹는 것도 다 좋다며? 이젠 다 싫은 거야? 왜 맨날 그렇게 잔소리만 하는데?"
아니 아직 좋아. 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만할래 이제"
넌 몸을 일으켰다. 난 말을 꺼내는 너의 붉은 입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여전히 너의 붉은 입술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 그만하자 이제. 나도 지친다"
내 말에 넌 약간은 후련한 듯이 몸을 돌렸다. 네가 이제 나에게 질린 건 알고 있었다. 널 붙잡거나 나 자신을 다그쳐 너의 마음을 돌릴 용기는 나에게 없었다. 그저 미적지근한 태도로 네가 나에게 마음 쓰지 않게 보내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나의 글과 나의 본모습은 같은 것일까 생각을 하곤 한다. 흔히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글은 그 사람을 투영하는 것이다'란 말이 있다. 아마 그 사람의 생각과 느낌 평소의 행동과 버릇들이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의 글은 비뚤어진 생각과 욕망, 한없이 찌질한 한 남자의 이야기뿐이다.
그건 내가 비뚤어진 사람이기 때문일까. 겉으론 웃으면서 속으론 주체 못 할 검은 욕망에 들끓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현실의 나는 낙관주의자이자 하루가 행복한 사람일진대, 내 글은 항상 왜 이런 것일까.
내 글의 화자는 비뚫어진 '나'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난 희대의 쓰레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게 원래의 나인데 현실의 내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누군가에게 분노하거나, 그런 감정을 남몰래 속으로 숨겨둔 채 글로써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써놓고 보니 확실 한 건 찌질한 화자는 내 모습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흔하디 흔한 말이었다. "널 사랑해" 여느 연인이 그러듯 가장 일반적으로 하는 그런 흔한 말. 이제 막 시작한 풋풋한 연인이든, 같이 지내온 세월이 긴 부부든. 그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그런 흔한 말.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흔하디 흔한 말로 우리의 비 끌어져 가는 관계를 가리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내가 널 생각하는 마음이 변해 감에 따라 말할 수 있는 표현이 다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네가 나에게 얼마나 질렸었는지 알 수 있었다면, 너의 갑작스러운 이별에 난 마음 아프지 않았을까.
미움이 손톱처럼 자라났다. 아무리 잘라내고 잘라내어도 끊임없이 자라났다. 제발 없어지길 바라며 자르고 잘라내어도 그렇게 미움은 끊임없이 자라났다. 지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마음을 독하게 먹고 미움을 잘라내니 상처가 나고 말았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다시금 손톱마냥 자라났다. 손톱 밑의 검붉은 상처가 남듯 내 마음에도 상처가 남았다.
미움을 잘라내고 잘라내어도 없앨 수 없는 건, 아마 내가 너무나도 작은 사람이어서겠지. 미움마저도 손톱마냥 예쁘게 가꾸어내 숨길 수 없는 사람이어서겠지. 내 마음속 미움은 손톱마냥 계속 자라났다.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발을 내딛는 동작, 팔을 흔드는 각도, 몸을 세우거나 숙이는지, 땅을 보고 걷거나 하늘을 보고 걷는다던가. 어쩜 이렇게 모두 다른 모습을 하며 걷고 있을까요?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요? 그들의 걸음걸이가 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것을요. 저마다의 생각과 행동을 닮고 있다는 것을요. 전 다른 이들에게 어떤 걸음걸이로 보일까요?
우울은 전염되나 봅니다. 제 우울을 누군가에게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감기라고 해야겠지요. 물론 그들은 옮지 않고 나만 그들의 우울에 전염당한다는 게 다른 거지만요. 왜 저는 다른 이들의 우울이 이렇게 쉽게 물드는 걸까요? 다른 모든 이에게는 있는 항체가 저에게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토록 우울한 밤을 지새우는 거겠지요.
제 인생에서 일어난 수많은 나쁜 일 중 하나를 꼽으라면 전 중3 때의 일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 되고 말았지요.
전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아주 어릴 적 제가 기억이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말이죠. 사실 이 감정은 어떠한 증오와 가까운 것이라 싫다는 말과 확실히 맞닿아 있는 감정이 아니긴 합니다. 이 증오는 끊임없이 뭉쳐지고 응어리져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술, 그건 어찌 보면 이 모든 증오의 시작이자 아버지 그 자체일 수도 있겠지요. 아주 어릴 적엔 술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가져오는 마법의 물약 같은 건 줄 알았지요.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아주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그건 우리네가 흔히 쓰는 '술만 안 마시면 참 좋은 사람인데 말이야'하는 그따위 것이었습니다.
온 집안을 부수어놓고 심지어 가족들을 폭행하는 쓰레기. 술은 아버지를 망가트리는 것도 모자라 가족을 망쳐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버지의 끊임없는 폭행과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어머니는 견디기 힘드셨겠지요. 그래서 달빛을 가로등 삼아 멀리 도망치셨겠지요.
전 창문에 얼굴을 조금 내밀고 어머니가 사라져 가는 걸 보고만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깰까 봐 이불을 온몸에 두른 채로요.
전 어머니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습니다. '언젠가 해야지- 할 수 있을 거야'하고 다짐해왔던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칼을 손에 쥐고 아버지의 얼굴 맡에 섰습니다. 당장 칼을 휘두르기만 한다면 죽일 수 있을 겁니다.
전 아직도 후회하곤 합니다. 그때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게 제 평생 제일 나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아버린 것을요. 그토록 수많은 나쁜 일이 아버지로 인해 생길 것을 그때 알았다면 죽여버렸을 텐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