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전염되나 봅니다. 제 우울을 누군가에게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감기라고 해야겠지요. 물론 그들은 옮지 않고 나만 그들의 우울에 전염당한다는 게 다른 거지만요. 왜 저는 다른 이들의 우울이 이렇게 쉽게 물드는 걸까요? 다른 모든 이에게는 있는 항체가 저에게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토록 우울한 밤을 지새우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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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에서 일어난 수많은 나쁜 일 중 하나를 꼽으라면 전 중3 때의 일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 되고 말았지요.
전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아주 어릴 적 제가 기억이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말이죠. 사실 이 감정은 어떠한 증오와 가까운 것이라 싫다는 말과 확실히 맞닿아 있는 감정이 아니긴 합니다. 이 증오는 끊임없이 뭉쳐지고 응어리져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술, 그건 어찌 보면 이 모든 증오의 시작이자 아버지 그 자체일 수도 있겠지요. 아주 어릴 적엔 술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가져오는 마법의 물약 같은 건 줄 알았지요.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아주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그건 우리네가 흔히 쓰는 '술만 안 마시면 참 좋은 사람인데 말이야'하는 그따위 것이었습니다.
온 집안을 부수어놓고 심지어 가족들을 폭행하는 쓰레기. 술은 아버지를 망가트리는 것도 모자라 가족을 망쳐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버지의 끊임없는 폭행과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어머니는 견디기 힘드셨겠지요. 그래서 달빛을 가로등 삼아 멀리 도망치셨겠지요.
전 창문에 얼굴을 조금 내밀고 어머니가 사라져 가는 걸 보고만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깰까 봐 이불을 온몸에 두른 채로요.
전 어머니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습니다. '언젠가 해야지- 할 수 있을 거야'하고 다짐해왔던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칼을 손에 쥐고 아버지의 얼굴 맡에 섰습니다. 당장 칼을 휘두르기만 한다면 죽일 수 있을 겁니다.
전 아직도 후회하곤 합니다. 그때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게 제 평생 제일 나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아버린 것을요. 그토록 수많은 나쁜 일이 아버지로 인해 생길 것을 그때 알았다면 죽여버렸을 텐데 말이죠.
난 아주 작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비단 외모뿐만이 아닌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저에게는 저를 이루고 있는 사회조차 아주 작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서로 관계를 맺고 폭넓고 유기적인 사회망을 이루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런 관계망은 저에겐 버거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글쎄요, 외롭냐고 물어보신다면 또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의 작은 사회는 인터넷과 함께니까요. 여기는 굳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곳이니까요. 아아-그렇다고 제 사회가 인터넷 안의 크기만큼 크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전 아주 작은 사람이니까요.
아무도 절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요. 현실과 여기 이 가상공간에서 까지요.
피하지 말아요. 그게 당신과 저의 운명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죽음조차 달게 받아들여하지 않겠어요? 그게 설사 억울한 죽음이라도. 그러니 웃어요, 슬퍼하지 말고. 눈을 돌리지 말아요. 내 죽음이 당신의 동기가 될 수 있다면 피하지 말아요. 머리에 새기고 마음에 새겨서 당신의 입에서 노랫말이 되고 당신의 손에서 그림이 되고 당신의 글에서 이야기가 될 수 있게. 그러니 웃어요, 슬퍼하지 말고. 그게 죽을 수밖에 없는 저의 운명이라면, 그걸 바라볼 수밖에 없는 당신의 운명이라면, 그렇다면 웃어요.
우리의 만남이 서로 사랑한다는 하나의 마음만 있었다면, 그 길이 올곧게 너에게로만 향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아직 괜찮았을까. 괜히 너와의 만남 속에 싹튼 다른 마음들이 우리의 사이를 이렇게 갈라놓았는지도 모른다. 의심과 질투, 분노와 무관심 속에서 우리의 관계는 서서히 벽이 세워진 거겠지. 서로 좋아했던 하나의 마음만이 올바른 길처럼 남아있었다면, 우리는 여러 갈래의 길 속에서 헤매지도 않았을까. 결국 끝이 이런 이별이라면 그건 처음 우리의 선택이 잘못된 걸까. 결국 파국만이 남은 우리의 상황은 이제 다시는 괜찮아질 리 없는 거겠지. 그렇게 되어버린거겠지.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결과를 향해가는 그 과정이 중요하다'
난 저 말을 희대의 개소리라 칭하고 싶다. 세상은 승자의 결과다. 역사라는 것도 결국 승자의 입맛에 맞게 쓰인 게 아니던가! 제멋대로 찢어발기고 재조합하고 다시 부숴버리는 게 승자의 특권 아닌가? 그래서 다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깔아뭉개고 그들의 위에 서려는 것 아닌가? 그저 지기만 한 패배자들이 승자를 시기하여 만든 말이 아닌가 말이다!
승자를 욕하는 것도 결국 그들의 시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들이 올라가지 못한 자리에 대한 욕망으로 인한, 그들은 결국 자기 위에 있을 사람에게 굴복하여 아첨을 하겠지. 결국 승자란 그런 것이다. 패자들은 그저 한탄하고 욕을 하며 불만을 토로하는 종자들 아니던가. 힘을 얻기 위해 그들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남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힘, 그게 현실이다.
승자가 되기 위해 남들을 짓밟고 깔아뭉개는 것도 결국 능력이 아니겠냔 말이다. 패자들이 불만만 토로할 때 위로 올라갈 방법을 모색한 거 아닌가! 그렇게 해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게 그 어떤 더러운 방법일지라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날 욕하더라도 승자가 될 것이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그들을 향해 침을 뱉을 수 있는 그런 승자가 될 것이다.
오래된 책을 꺼냈다. 언제 받았는지 언제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도 않는 그런 오래된 책. 갈색 표지 위로 하얀 먼지를 손으로 대충 털어냈다.
그제야 네가 준 책이란 게 생각났다.
책 안의 사진 한 장이 너와 나의 쓸데없는 미련처럼 남아있다.
무엇이든 꺼낼 수 있는 상자를 주웠습니다. 난 무엇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다 상자에 손을 넣었습니다. 난 몇 달 전 목 메달아 죽은 엄마를 꺼냈습니다. 엄마는 비뚤어진 미소로 날 반겼습니다. 엄마, 우리 엄마.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빠는 기쁜 건지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어... 어...'하는 말을 하는 걸 보니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쁜 걸까요? 엄마는 목을 메달기 전처럼 부엌으로 들어가 요리를 했습니다. 그날 그 저녁처럼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방 안을 채웠습니다.
아빠는 그날과는 다르게 밥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옆에서 담배만 뻑-뻑-피울 뿐이었습니다. 엄마는 생선 살을 발라 내 밥 위에 올려주었습니다. 엄마는 아빠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아마 눈이 마주치면 때리던 아빠를 의식해서일 겁니다.
그 날 저녁은 푹 잠들었습니다.
일어나 보니 엄마가 또 매달려 있습니다. 풍경처럼 흔들흔들. 인형이 된 것 같습니다. 아빠는 내가 확인한 걸 보고는 주섬주섬 엄마를 끌어내렸습니다. 난 한숨을 쉬고 밖을 나섰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난 다시 무엇이든 꺼낼 수 있은 상자에서 엄마를 꺼내었습니다. 엄마는 다시 삐뚤어진 미소로 날 반겼습니다. 엄마의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빠는 박스에 죽은 엄마를 욱여넣다 우리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표정을 보니 퍽이나 기쁜 모양입니다. 난 당황하는 아빠를 보고는 웃어버렸습니다.
이 날도 된장국을 먹고 잠이 들었습니다.
일어나 보니 또 엄마는 매달려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아빠도 같이 그 옆에 매달려 있습니다. 나는 흔들리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고 말았습니다. 이제야 둘 다 죽어버렸습니다.
난 무엇이든 꺼낼 수 있는 상자에 갔습니다. 이번엔 우리 가족이 행복했던 그때의 엄마와 아빠를 꺼냈습니다. 둘은 환한 미소로 날 끌어안았습니다.
난 다시 무엇이든 꺼낼 수 있는 상자에 갔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또 죽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둘이 원한 건 내가 아니라 돈이었나 봅니다. 난 돈을 꺼내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 돈이면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는 평생을 바위처럼 웅크리고 살았다. 그저 조용한 아이로써 학창 시절을 보냈다. 졸업앨범을 펼쳐보았을 때 '이런 애가 있었나?'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는 지금에 와서야 '그때 좀 더 뛰어놀아도 됬었나 봐요'하는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그는 그저 조용한 아이에서 조금 더 자라 내성적인 청년이 되었다. 한국의 남자라면 대다수의 남자가 그러하듯 그도 군대를 가야만 했다. 조용한 그는 선임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수시로 행해지는 폭언과 폭력은 그를 점점 옥죄어 왔다.
그러나 그는 잘 참아내었다. 속 마음을 숨기고 몸을 웅크린 채로 시간을 죽이고 마음을 죽이면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어차피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니까.
시간이 더욱 흘러 그는 군대를 전역하고 조그마한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돈을 번다는 건 사실 자신을 죽이는 것만 같아요' 그는 그런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또한 '군대는 시간이 흐르면 전역이라도 하죠,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까요'라는 말도 꺼내곤 했다.
그를 유난히도 괴롭히는 선배가 있었다. 그는 인터넷의 가십거리만 올라오는 그런 곳에 있을만한 사람이었다. 폭력과 폭언, 상습적인 절도와 성추행. 그는 더욱 웅크렸다.
마음을 죽이면 더욱 작게 웅크린다면 더욱 단단해진다면.
그렇다면 견뎌낼 수 있을 거야.
'견뎌낼 수 있을 줄 알았죠'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사건은 명료하리만치 간단했다. 선배는 언제나처럼 그에게 라면을 끓여오라 시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이어지는 폭언. '쓰레기 새끼, 물 양도 못 맞추는 병신 같은 새끼. 뒤져 이 새끼야' 뭐 그런 말들.
선배는 라면이 들어있던 냄비를 그에게 던졌다. 그는 뜨거운 국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음에도 하나도 아프지 않더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선배의 눈에 찔러 넣었다.
'전 제가 참는다면, 바위처럼 그렇게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다면 안 아플 거라고 생각했었나 봐요.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으면서 말이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조금은 후련한듯한 그런 미소로.
붉은 노을이 땅으로 꺼져갈 때쯤, 우연히 땅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붉은 태양이 점점 땅으로 사라지는 것과 반비례하듯, 그림자는 점점 자신의 몸을 길게 늘였다. 마치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점점 몸을 길게 늘이던 그림자는 빛이 툭-하고 사라짐과 동시에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거기 존재하던 게 거짓말인 신기루처럼.
존재하지 않게 된 그림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눈에 보이진 않게 된 모든 게 신기루 같은 건 아닐 것이다. 떠나간 모든 이가 신기루가 아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