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73건

  1. 2018.06.06 괴리.
  2. 2018.06.06 지금처럼.
  3. 2018.06.06 선택.
  4. 2018.06.06 한 주.
  5. 2018.06.06 줄거리.
  6. 2018.06.06 쓰는 일.
  7. 2018.06.06 조심.
  8. 2018.06.06 고여있다.
  9. 2018.06.06 심연.
  10. 2018.06.06 보다.

난 일평생 이성과 감성의 괴리에서 생기는 내 행동의 일면들에 대하여 고민해왔다. 모순의 골짜기는 조금씩 깊어져 가 결국은 어찌할 도리 없는 크나큰 협곡으로 변해버리었다.

난 어찌하여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여 해결할 수 없는 실마리를 찾으려 하는가. 난 어찌하여 그 고민 끝에 명확한 해답이 있을 거라 믿는가. 결국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음에도.

나는 어떤 사람인가. 키우던 애완동물이 죽었을 때 눈물 흘리는 게 나인가. 알던 사람의 죽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나인가. 사람들에게 보이는 내 일면과 보이지 않는 내 일면의 모습이 괴리가 있는 것은 어떠한 이유인가. 혹자는 그 모습 또한 자신이며, 모든 사람이 그런 일면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지만. 난 왜 이리도 나 자신에 대해 불편하고 마뜩지 않으며 신뢰하지 않는 것인가.

아마도 나 자신을 가장 믿지 못하고 괴이하게 여기는 게 아마 나 자신이 아닐까. 크나큰 모순의 협곡 속에서 나는 더욱더 나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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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그 지옥 같던 밤이 지나고, 아침은 다시 밝아왔다. 난 어제의 흔적을 없애려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어제의 흔적은 흘려보냈지만 기억은 더욱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샤워하고 있어?"

밖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내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마치 어젯밤의 일이 꿈인 것만 같이. 아내는 그렇게 어제의 일을 잊은 듯했다. 너무나도 밝은 목소리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얼른 나와, 아침 먹어야지"

나는 어-라고 대충 대답했다. 나가기 싫다. 뱃속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공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다. 무섭다, 두렵다, 마주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앉아있어, 거의 다 했으니까"

아내는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난 그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무 일 없는 듯이 행동하는 너는 공포와 절망이었다. 의자에 앉았다.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고민했다. 도망갈 수 있을까. 내가 죽일 수 있을까.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아내가 몸을 돌렸다.

테이블 위에 음식이 차려진다. 아내는 나이프를 한 손에 쥔 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에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난 지금이 좋아. 우리 둘이 이렇게 앞으로도 함께 영원히. 지금처럼"

아내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 앞에 놓인 음식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뭐해? 어서 먹어"

아내는 그렇게 말하며 접시에 놓인 음식을 썰기 시작했다. 그 누가 봐도 사람의 손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그것을.

"왜? 먹기 싫어?"

아내는 그렇게 말하며 약지 손가락을 나이프로 잘라 나에게 내밀었다. 반지가 끼워져 있는 약지, 내가 그녀에게 사준 반지.

"왜 그년에게 아직 마음이 남았어?"

아내의 표정이 변했다. 난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발끝을 타고 오르는 공포에 온 몸이 떨렸다. 식은땀이 흐른다.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럼 먹어"

아내의 말에 입을 열었다. 내 입으로 사람의 손이었을 그것이 들어왔다. 그녀의 반지 낀 손이 내 입으로 들어왔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입안의 그것을 뱉어버리고 싶다.

"난 말이야, 우리가 지금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 우리 둘이. 다른 사람 없이 말이야"

아내는 그녀의 손이었던 것을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난 먹지도 그렇다고 뱉지도 못한 채 그 앞에 앉아있었다.

"더 먹을래?"

난 아내의 말에 간신히 고개를 흔들었다. 부엌에 놓인 그녀의 눈이 날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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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그다지 재미없는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굳이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도 좋은 그런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글을 남기는 것은 글쎄... 어쩌면 누군가가 읽어주었으면 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생각이라고 해야 할지... 누군가가 읽어주었으면, 혹은 읽지 말았으면 하는 그런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써본다.

나의 재미없는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아마 그때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될 거다. 아마 내가 6살 때쯤. 그때는 한 살 위의 누나 한 명과 뱃속에 내 남동생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 일이 있던 날은 겨울이었다. 방안에서도 이빨이 덜덜 떨리던 겨울이었다. 그날따라 눈이 몹시도 거세게 내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면서도 희한하게도 달빛이 무척이나 밝았다. 눈발 사이로 보이는 달빛의 은은한 빛이 시골집 마당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우리 집 똘이가(아마 그때 똘이가 10살쯤 됬었을 거다) 유난히도 컹컹거리며 짖어댔다. 왠지 똘이의 짖음에 무서워져 이불을 둘러쓰고 어머니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슬슬 돌아올 때쯤 된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 숨죽이고 있었다. 서러운 똘이 울음소리만 더욱 거세어질 때쯤,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똘이 이놈의 새끼가! 그만 안 짖어!"

몽둥이를 들고 방문을 박차고 나섰다. 빼꼼 고개를 들어 바라본 문 밖에는 누나가 몽둥이를 든 채로 똘이 앞에 서 있었다. 똘이의 울음소리가 더욱 서럽게 들리고, 어머니가 내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아... 아..."

어머니는 몸을 휘청거리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거센 눈발 사이로 누나는 우두커니 서 있고, 똘이는 서럽게 울어댓다. 아버지는 흔들리며 우릴 맞았다. 처맛단의 풍경처럼 매달리신 채로. 아버지는 자살하셨다. 그 이야기를 제대로 듣게 된 건, 또 이해하게 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을 거다. 그때까지는 아버지가 왜 돌아오지 않으시는지, 어머니가 왜 그렇게 서럽게 우셨는지, 똘이의 울음소리가 왜 그리 서글펐는지, 누나가 왜 가만히 서 있었는지. 잘 몰랐었다. 정확히는 이해하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이게 내 재미없는 이야기의 첫 시작이다.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되어버린 이야기다. 그 후로 우리 집은 아버지가 없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만 같았다. 불안 불안했다던 남동생은 무사히 태어났다. 단지 태어나기만. 동생은 장애가 있었다.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걸을 수 없었고,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중증장애. 내가 15살이 되던 무렵-. 우리의 가족의 모든 초점은 동생에게 맞춰져 있었다. 모든 하루가 동생에게 맞춰져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생은 더욱 자신의 상황을 깨닫게 되었고, 난폭해져만 갔다. 그래-. 동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다해 모든 불만을 토로했다. 그것은 때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솔직히 나는 그 무렵까지 동생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몰랐다. 단지 어머니와 누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생은 뜨거운 여름날-.

자살했다.

뒹굴고 기어서 동생은 욕조에 물을 받은 채 자살했다. 동생이 13살이 되던 생일이었다. 삐뚤빼뚤하게 입으로 물고 써 내려간 편지 한 장-. 유서로 봐야 하는 그것이 방 한쪽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죽고 싶어'라는 단 한 단어. 어머니와 누나는 며칠을 울었다. 그렇지만 나는 왠지 울 수 없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냥 약간은 이상하게 변해버린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속 한쪽으론 안도하는 마음도 있었다. 왠지 편안한- 이제 해방이라는 감정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숙이고 웃어버렸다. 난 내 하나뿐인 동생이 죽길 바라왔던 걸까. 어찌 됐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동생에게 맞추던 나날이 끝나던 때였다.

이것은 우리 집의 한 불행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그다지 불행이 아닌지도-. 혹은 가장 기분이 좋았던 날일 수도 있었다. 물론 아버지를 떠나보낸 어머니에겐 더욱 큰 상처가 되는 날이기도 했다.

동생마저 죽어 버리고 나자 우리 집은 점점 더 비정상적으로 변해갔다. 어머니는 집착하기 시작하고 누나는 하루 종일 멍해있는 시간이 늘었다. 특히 누나는 말을 걸어도 제대로 대답하는 일이 적어졌다. 그것은 점점 심해졌고, 어느 날인가부터 누나는 방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나를 노려보는 일이 늘었다. 집착. 그것은 나를 옥죄어왔다. 하나의 해방에서 다시금 하나의 구속으로 변해버렸다. 누나는 가끔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나를 살폈다. 내가 19살이 되던 무렵- 그것은 이미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해지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 누나에게서 합법적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대했다.

다시금 겨울이 다가오는 그 시점에 나는 군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글쎄- 몸이 힘든 건 차라리 좋았다. 수많은 갈굼과 욕설, 폭력들도 견딜만했다. 군 시절 겪은 모든 일들이 내가 여태껏 살던 정신적, 육체적 괴로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차라리 여기서 살까-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사회에 다시 내팽개쳐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입원했다. 정신이 맛이 가버렸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누나는 집안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친년처럼 이 거리 저거리 헤매고 다니기 일쑤-. 내가 입대한 뒤로는 집안에만 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누나를 보호하여야 하는 어머니는 모든 괴로움을 다 껴안으셔야 했다. 고통스러운 삶- 하루하루. 죽어버리고만 싶은 기억들. 어머니는 그런 것들 사이에서 살고 계셨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몸의 이상으로 나타났다. 위암 말기. 불과 살 수 있는 날이 3개월도 남지 않은 시한부. 어머니는 곧 죽을 터다. 그리고 나는 공교롭게도 내 전역 날짜와 비슷한 어머니의 입원날짜에 쓴웃음을 흘렸다. 나가서 돈이 되는 일은 뭐라도 해야 했다. 전역하는 날부터 시작된 내 일상은 아침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모두 일 밖에 없었다. 하루하루가 똑같은 쳇바퀴 같은 일상. 그 틈틈이 돌보아야 하는 죽어가는 어머니와, 이미 죽은 것만 같은 누나. 누나는 하루 종일 나가 있거나 하루 종일 집안에만 있었다. 눈 앞에 있는 나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누나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난 이제야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난 혼자 앉아있다. 해방되었다. 지겹고도 끔찍한 일상들 속에서 드디어 난 해방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다. 난 지금 한 가지의 해방을 선택하려 한다. 내 책상 위엔 수백 알의 수면제가 놓여있다. 난 아마 오늘 죽을 거다. 그리고 이게 내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이야기가 될 거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까. 도망가는 걸 비난할까. 날 동정할까. 세상은 아직도 살만하다고 위로할까. 뭐- 어때. 당신의 생각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텐데.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질문.

만약 당신이 나와 같은- 그러니까 아버지가 목을 메달고, 장애아로 태어난 동생이 물에 머리를 처박아 자살하고, 누나는 정신이 나가 정신병원에, 어머니는 암에 걸려 수많은 빚을 남기고 이 세상에서 도망쳐버렸다. 그렇다면 당신의 선택은 어떻게 될까?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까. 자- 끝이다. 이 재미없는 이야기도, 내 선택도, 내 지긋지긋한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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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고단한 한주였다.

월요일, 삐걱대는 몸을 일으켜 회사로 향했다. 조금은 일찍 도착한 사무실은 언제나처럼 삭막했다. 유리문을 밀고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을 때까지 그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물론 나 또한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책상 위엔 조그마한 검은 봉투가 놓여있다. 또 일이군, 요 몇 달간 놀고먹던 게 보기 안 좋았을까. 난 가방을 챙겨 들고 검은 봉투의 목적지로 향했다.

난 검은 봉투의 목적지인 도서관에 도착했다. 사서의 눈이 닿지 않는 곳, 또한 사람들의 눈이 잘 미치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봉투를 다시 펼쳤다. 검은 긴 생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이 도서관의 사서다. 월요일 하루를 그녀를 살피는데 썼다.

화요일, 사무실로 향하지 않고 오픈 시간에 맞춰 도서관으로 향했다. 9시 5분, 그리 늦지도 그리 빠르지도 않은 시간에 다른 사람들과 섞여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자리를 잡고 다시 그녀를 살폈다. 그녀의 행동을 파악해야 일이 수월 할 테니. 전날 그녀의 행동과 특징을 대조하기로 한다.

첫째, 그녀는 검은 생머리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왼손엔 조금은 두꺼운 머리끈을 하고 있다. 저건 왜 하고 있는 거지? 전날 그녀는 퇴근하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머리를 묶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을까? 일단 체크해둔다.
둘째, 그녀는 정확하게 1시간 업무 후 5분 휴식을 취한다. 휴식장소는 옥상, 아무 말 없이 풍경을 바라본다. 이건-. 일단 동선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니 체크.
셋째, 그녀는 웃지 않는다. 일단 지금까지는.

아직 별다른 사항은 없다. 그녀의 집까지 확인하고 퇴근.

수요일, 그녀는 한가로운 사서 일이 할 게 없을 때 책을 읽곤 했다.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야마다 무네키, 제목이 왜 다 이따위인 거지? 난 두 권의 책을 대 출하기로 한다. 햇빛은 빌어먹게 따뜻하다. 아-퇴근하고 싶다. 오늘도 별다른 사항은 없었다.

목요일, 어젯밤 책을 내리읽었더니 머리가 욱신거리었다. 한 가지 더 깨달은 게 있다. 그녀의 규칙적인 행동 패턴보다 심리를 파악할 필요가 생겼다. 오히려 일이 수월해질지도 모른다. 한 가지 가설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가? 혹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일은 더욱 간단해질 것이다.

금요일, 그녀에 대해서 다시 정리할 것이 생겼다.

첫째, 그녀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 오늘 아침 9시, 그녀는 도서관을 개방하고는 곧바로 알약을 먹었다. 약 봉투에 쓰린 알프람정, 항불안제.
둘째, 그녀는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다. 우연히 책상 모서리에 왼손의 머리끈이 걸렸고, 그 사이로 자해한 흔적이 보였다.
셋째, 그녀는 친구가 없다. 적어도 먼저 연락한다거나 하는 성격은 아닐 것이다. 물론 집에 들어서기 전까지의 상황에 서겠지만.
넷째. 그녀는 아직도 웃질 않고 있다.

결제일은 토요일 오전 12시 05분. 그녀가 점심 먹기 전 마지막 휴식 때. 그때로 하기로 한다. 그녀가 휴식을 취하는 틈을 타, 그녀 책상의 노트 한 권을 챙겨 왔다.

토요일, 눈을 비비며 옥상으로 향했다. 현재 시간 12시 직전, 옥상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사람들이 한둘 자리를 비웠고 이내 옥상은 텅 비었다. 다들 어찌 이리 식사시간들을 잘 지키시는지, 덕분에 일은 더 수월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옥상에 올라왔다. 난간에 기대어선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몸을 난간에 몸을 기대어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일을 하지 않아도 그녀가 알아서 하는 것 아닐까. 난 잠시 고민했지만 생각을 지우기로 했다.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걸어갔다. 내가 그녀의 등을 밀려는 찰나-. 그녀가 난간에 기대어 있던 몸을 펴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아주 잠깐 당혹감이 서렸다가 이내 웃음이 서렸다. 나는 미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그 표정이 뇌리에 박혔다. 그 작은 찰나의 순간 그녀의 입이 옴싹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원망의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난 그녀가 땅에 떨어지기 전 몸을 돌려 최대한 빨리 도서관을 벗어났다.

일요일, 난 아침부터 술을 마셨다. 그동안 수많은 일들을 해왔음에도, 왜 그녀의 얼굴이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 걸까. 차라리 수많은 원망과 분노와 저주가 편했을까. 고단한 한주였다, 월요일 다시 출근해야 하겠지. 또 누군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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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Scene 1

불 꺼진 무대, 중앙에 내려오는 핀 조명

핀 조명 안에 놓인 의자로 사내가 걸어온다. 그는 의자에 앉기 전 헛기침을 하곤 관객들을 둘러본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의자에 걸터앉는다. 끼익-하는 소리. 다리를 꼬고 턱을 매만진다.

"많이 있은 일이죠, 뭐- 사실 살면서 한 번쯤은 밝혀질 거라 생각했어요. 어쩔 수 없잖아요? 평생을 숨기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사내는 웃는 듯 우는 듯한 미소를 짓는다. 머리를 긁적이고 고개를 숙인다.

조명이 꺼진다.

Scene 2

비어있는 무대, 무대 한쪽 끝에서 사내가 손에 술병을 든 채 걸어 나온다. 무대 중앙, 다시 내려오는 핀 조명. 사내는 술을 들이켜고는 관객석을 둘러본다. 수염이 더 자란 상태, 사내는 입에 묻은 술을 대충 문질러 닦는다.

"그게 큰 잘못은 아니잖아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줍니까? 대답해봐요! 내가 당신들한테 피해를 주냐고!"

사내는 관객석을 향해 술병을 들이대며 소리친다. 관객석의 조명이 노란색으로 변경. 사내는 숨을 몰아쉬며 관객들을 바라본다.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관객석에 다가선다.

"내가 역겹습니까? 더러워요? 내가 괴물처럼 보입니까? 대답해보세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사내가 물어보는 관객에게 빨간색 핀 조명. 무대의 조명이 꺼진다.

Scene 3

무대 가운데 핀 조명이 천천히 들어온다. 사내는 조명 한가운데 쓰러져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성애자인 줄 알았던 둘은 서로를 만나 사랑을 나눴죠. 20년에 걸친 시간 동안"

사내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관객석에 빨간색 핀 조명이 하나 더 내려온다.

"제가 게이란 사실이 당신들에겐 혐오스럽겠죠"

관객석에 빨간색 핀 조명이 조금씩 늘어간다. 많은 자리에 빨간 핀 조명이 보인다.

사내는 관객을 둘러본다. 점점 늘어가는 빨간 핀 조명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인다. 무대 위 사내에게도 빨간 핀 조명이 떨어진다.

조명이 꺼진다.

Sence 4

탕-하는 총성과 함께 무대 중앙 핀 조명이 서서히 들어온다. 사내는 중앙에 쓰러져있다.

조명이 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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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여있다.  (0) 2018.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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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되어 불리지 못한 모든 것들에게.

이름이 없는 너희들에게 내가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알량한 동정심일 것이다. 만약 내가 너희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내 위선일 것이다. 너희는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채 아스라이 사라져 버렸지만, 너희의 존재는 누군가에겐 아픔이 되고 슬픔이 되고 흉터로 되어 남을 것이다.

너희가 사라진 일도, 너희를 사라지게 한 일도, 모두의 사정과 이해가 있을 것이다. 슬퍼말아라. 원망 말아라. 내 아무리 너희에게 말을 해보아도 그건 너희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외침은 그저 허공 속에 흩날려버릴 테니. 이렇게 글을 쓰는 일로 공허 속의 너희가, 이름이 되어 불리지 못한 너희가, 잠시라도 기억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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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두운 방에 들어섰다. 빛 한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손에 들고 있던 후레시 주위만이 그의 시야가 되었다. 터벅하는 발소리에 후레시 주위로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는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애써 참아냈다. 폐 속에서 나오지 못한 먼지는 고통이 되어 그의 목을 긁었다. 숨을 애써 고르고 다시 발을 옮겼다.

오래된 선반. 먼지가 수북이 앉은 탁상시계. 물 대신 먼지가 담긴 물 잔. 언제 찍은 사진인지 모를 가족사진. 모든 것이 지나간 시간 속에 먼지에 파묻혔다. 그는 바닥의 먼지가 비산 하지 않게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뒤틀리고 갈라져버린 나무 바닥이 끽-하는 거친 파열음을 만들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탁상시계를 집어 들었다. 먼지를 털어냈다. 11시 48분, 시간은 아직 그때 그날에 멈춰있었다.

그는 잊을 수 없었다. 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그를 거친 감정의 격류에 밀어 넣곤 했다. 그는 시계를 내려놓고는 사진으로 손을 뻗었다. 이미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사진, 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땀방울이 이마에 맺혔다 턱을 타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사진을 들어 먼지를 닦아냈다. 아- 그래, 이 소녀였구나. 그는 사진 속 작은 소녀를 바라보다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친 빗소리, 몰아채는 바람, 저 멀리서 들려오던 총소리. 그는 그 날로 되돌아갔다. 탕-하는 소리에 옆에 있던 나무가 터져나간다. 숨을 제대로 내쉴 틈 없이 땅을 뒹굴었다. 돌과 나무들이 온몸을 두들기는 것 같았다. 공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폐가 없어질 것만 같다. 근육은 고통을 내질렀다. 그는 그래도 몸을 움직였다. 살고 싶었다. 죽을 수 없었다. 몸을 되는대로 굴려 가시나무 수풀을 지났다.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이 곳이 나타났다. 지금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오래된 나무집, 그는 집으로 들어섰다.

그는 소녀의 사진에서 눈을 돌려 그때의 자신을 쫓았다. 자신은 긴장했으며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총을 들어 방 한쪽으로 향했다. 오지 마, 오면 안 돼. 오지 마. 그는 소리쳤으나 기억 속의 자신은 천천히 이쪽을 향했다. 그리고 끼익-. 방 한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총을 돌려 갈겼다. 나무 벽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비가 멎었다. 그리고 광기에 휩싸인 것만 같았던 그의 총질도 멈추었다. 그는 침을 삼키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엔 소녀가 쓰러져있다. 머리가 박살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소녀가, 뼛조각이 바닥에 굴러다닌다. 피가 바닥을 타고 점점 퍼져간다.

안돼, 안돼. 그는 기억 속의 자신에게 소리쳤다. 안돼 안돼... 얼굴을 알아볼 수 없던 소녀의 얼굴이 보인다. 지난 십여 년간 머릿속을 헤집던 얼굴 없는 소녀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소녀를 보며 계속해서 되뇌었다. 미안해, 미안해. 난 무서웠어. 미안해, 미안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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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갠 다음 날, 집 앞에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보곤 합니다. 흙과 뒤섞여 적당히 갈색빛을 띠는 구정물은 아지랑이를 피워내듯 이리저리 흙을 일렁거립니다. 그건 마치 살아있는 생명과도 같아서 이리저리 섞이고 흩어지고 뭉쳤다가 부서지곤 합니다. 침전물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해 맑은 물이 상층으로 올라오고 나면 바닥은 한없이 고요해집니다. 그리고 마치 다른 세상으로 연결해주는 터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가라앉은 흙을 뚫고 들어간다면 다른 세상이 확 펼쳐질 것만 같다고도 생각합니다. 나니야 연대기의 옷장이나 해리포터의 9와 3/4 플랫폼처럼. 이 곳을 뚫고 들어간다면 모험이 펼쳐질 거란 생각에 손을 넣어봅니다. 당연하게도 새로운 세상으로의 모험은 없습니다. 가라앉은 침전물이 이리저리 섞이고 흩어지고 뭉쳤다가 부서집니다. 마치 모험이 없는 이 곳의 인간군상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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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울적해 집을 나섰습니다. 간혹 가슴속 저 깊숙한 어딘가에서 훅 하고 무언가 치달아 오르곤 합니다. 집안의 퀘퀘한 곰팡이 냄새와 눅진한 공기는 몸에 들러붙는 것만 같습니다. 바다로 향했습니다. 저에게 바다는 일종의 쓰레기통이었습니다, 감정의 쓰레기통. 바닷바람을 맞으며 치밀어 오른 감정을 바다에 쏟아내면, 마치 저 바다의 끝, 빛이 한 줌 닿지 않은 심연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둠이 더욱 깊어지고 빛이 점점 사라질수록 제 감정도 그렇게 저곳으로 빨려 들어가길. 저 바다의 깊은 곳으로 끊임없이 가라앉기를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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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기운이 없어진 너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참 야속하기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와 지낸 지 십여 년의 시간 동안 넌 그저 나에게 사랑을 주기에 바빴다. 난 너의 머리를 쓰다듬고 너의 눈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총기가 사라지는 네가, 이제 곧 나를 못 알아볼 것만 같아 두려웠다.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게 쓰라린 고통이었다. 나는 너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넌 지난한 고통을 견디고 있겠지. 너와 나의 시간이 다름에, 기필코 올 수밖에 없던 이별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푸석해진 털과 힘없이 흔드는 꼬리가 너와의 이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너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나를 보는 너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넌 언제나 첫 만남 속에서 한없이 뛰어놀던 작은 아기 같았다. 너에게 고통을 참아내고 조금만 더 살아달라는 부탁을 하는 건, 그저 나의 이기심일 것이다. 텅 빈 집안을 바라보고 있는 고통을 견뎌야 할 내가 무서운, 그런 이기심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기적인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단 일 년이라도, 한 달이라도, 하루라도. 아니면 단 몇 시간만이라도 너의 눈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난 이기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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