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미혼모다. 아니 미혼모였다. 열일곱 살 무렵 달콤한 사랑을 알게 해 준 남성은, 그녀가 둘만의 결실을 맺자 쓰디쓴 이별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그가 남기고 간 슬픔을 안고 배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 당시도 눈물이 멈추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그녀는 아이를 낳았고 자신과 웃는 모습이 닮은, 볼이 퉁퉁한 딸을 낳았다. 아이는 그녀에게 있어서 삶에 있어 불행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준 존재였다. 아이는 두 팔이 없는 채로 태어났다. 그녀는 슬픔을 어찌할지 몰랐다. 그럼에도 엄마이기에 한 아이의 유일한 가족이기에 삶을 살아야 했다. 아이는 그녀의 슬픔과 반비례하듯 밝은 아이로 자라났다. 벚꽃과 녹음과 낙엽과 흰 눈이 몇 번을 반복했다.
인생은 아이러니라 할까, 그녀의 인생은 아이로 인해 가장 밝았으며 그로 인해 벌어진 일로, 그녀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신은 그녀에게 행복을 주려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모든 것인 아이가 죽었다. 음주운전 뺑소니, 그녀는 모든 절망을 쏟아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흘린 눈물이 거대한 호수가 되어 그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흘렸다.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눈물이 멈춘 건, 죽은 아이가 남긴 일기장을 발견한 뒤였다.
삐뚤빼뚤한 그 글씨로 쓰인 글들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절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쓰인 그 문장에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기로 다짐했다. '엄마 울지 마요' 남몰래 눈물 흘렸던 것들을 아이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의 바람대로 슬픔을 묻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병원이고 보육원이고 자신이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지, 어디든지. 몇 년이 지났을까 그녀에게 한 여성이 찾아왔다. 빼빼 마른 몸에 밥은 언제 먹었는지 모를 푹 패인 두 뺨. 여성은 메마른 입술을 움직여 말을 걸었다. 우리 아이를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는 여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의 집에 도착해, 여성의 아이가 있는 문 앞에 섰다. 여성에게 들은 몇 가지의 주의사항과 이야기들을 머리 속에 상기하며 문을 열었다. 언제 환기했는지 모를 방안, 덩그러니 놓인 침대. 그 안에 간혹 경련하듯 몸을 떠는 남성이 잠든 것처럼 누워있다. 그녀는 문에서 들어서지 않고 남성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몸의 움직임, 그의 숨소리, 이불의 들썩거림. 그녀는 그동안 보아왔던 경험으로 그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았다.
조용히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게 됐어요, 피곤한 게 좀 풀리시면 말씀해 주세요"
그리곤 가져온 책을 펼쳤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선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남성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남성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삶을 견디는 원동력이었다. 마음을 닫은 그들이 조금씩 마음을 여는 그 행동, 그것은 그녀에게도 힘이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이었다.
'불편한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73건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 가능하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쑥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이 생각은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 자유를 옭아매는 모든 것들에 분노하고 있었다.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을진대, 저들은 왜 뛰고 움직이며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난 왜 걷지 못하며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며, 내 의지로는 이 좁은 방안에서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그들과 내가 무엇이 그리 다르게 태어났길래 나에겐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주어지지 않았나.
내 몸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다. 빌어먹을 몸뚱이는 언제나 내 정신의 영역 밖에서 날 놀리듯이 뒤틀리고 흔들릴 뿐이었다. 간신히 그놈의 신경줄기를 붙잡고 안간힘을 써야 내 의견을 들어줄 뿐이었다. 그나마 모든 사지육신 중에서 제일 의견을 피력하기 쉬운 오른손을 움직여 레버를 움직였다. 침대는 레버의 움직임에 따라 덜덜 떨리다가 다시 내려간 뒤에 기어코 다시 올라왔다. 빌어먹을 사지육신, 내 의견을 한 번에 들어준 적이 없다.
창 밖은 비가 내리고 있다. 후두둑하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빗 무리가 있는가 하면, 창안의 날 향해 타다닥하며 달려드는 녀석도 있었다. 마치 내가 도망가거나 피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날 향해 달려드는 녀석들을 향해 욕지기라도 내뱉어주고 싶었지만, 글쎄 내 어눌한 말을 녀석들이 알아들을까 싶어 그만두었다. 한참을 그렇게 떨어지는, 혹은 달려드는 빗방울을 보던 즈음 방 문이 열렸다.
"자니?"
엄마는 항상 그렇게 물었다. 언제나 어느 시간대나 어느 때고. 내가 자는 것 외에는 그다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지 "안 자는구나"하고 말을 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고개를 돌리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내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새 도우미 아줌마가 올 거야, 처음 일하시는 분이니까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줘, 알았지?"
난 또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대답을 하던 하지 않던 그 사람이 필요할 텐데. 나의 반응을 살피던 엄마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도우미라는 분들은 기계와 같았다. 날 위해 움직이는 로봇과 같은, 날 씻기고 밥 먹여주고 앉히고 심지어 대소변도. 그건 참 치욕적인 일이지만 별 수 있나. 이 빌어먹을 몸뚱이가 파업을 멈추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또 나 혼자만의 지루한 몸뚱이와의 대립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나마 말 잘 듣던 녀석이 오늘따라 유난히 말을 안 듣는다. 빌어먹을 자식, 간신히 침대를 눕히고 눈을 감았다. 말 안 듣는 녀석들을 집중해 움직인다는 건 꽤나 정신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노사관계가 이리도 원활하지 않아서야, 항상 투쟁 현장에 있는 기분이다. 도우미가 오기 전까지는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그래야 치욕적인 상황에서 내 의견을 조금이나마 피력할 수 있으니(몸이 피로하면 더욱 말을 안 들으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눈꺼풀이 세상과의 단절을 고하려 할 때쯤 다시 문이 열렸다. 나는 자못 궁금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차피 난 그들의 일거리이니, 그들이 날 달가워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고, 난 그들의 기계 같음이 달갑지 않았다. 날 대하는 그 태도들의 기저에 깔려있는 연민도 싫었다. 그들의 연민과 차가운 태도들은 날 더욱 가라앉게 만들었다. 도우미 아줌마는 잠시 문 앞에 선 채로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내 등을 살피고 있을까. 엄마처럼 '자니?'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이라고 단정 짖고 있는 것일까.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내 옆의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곤 가벼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게 됐어요, 피곤한 게 좀 풀리시면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옆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빗방울 소리와 함께 적막한 방안을 가득 채웠다. 난 슬쩍 고개를 돌리려 했다. 물론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삐걱거리며 덜덜거리며 돌아갔다. 그녀는 조금은 퉁퉁한 외모에, 인상 좋은 아줌마라고 보기엔 조금은 어린 여성이었다. 30대 초반은 되었을까. 그녀는 내가 얼굴을 돌린 것을 보고는 살짝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난 되도록이며 입을 열고 싶지 않았지만 어눌한 입을 놀려 인사했다. 그녀는 내 어눌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주로 그녀는 자신이 재잘거리는 편이었지만, 틈틈이 나에게 불편한 것이 있는지 혹은 자신의 얘기에 질문은 없는지 물어왔다. 여태껏 많은 도우미들의 행동과 너무도 다른 그녀의 행동에 난 잠깐 멍하니 있어야만 했다. 그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이 이 일이 처음이니 실수가 있어도 조금만 이해해달라는 등의 말을 이어나갔다. 난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말하는 것도 불편했다. 그게 실질적인 움직임에 따른 것이 아니라, 내 얘기를 듣는 그들의 행동에서 기인한 불편함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어떤 얘기를 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다들 인상을 찡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찌하면 최대한 말을 안 섞을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난 그런 반응에 말을 더욱 하지 않았다. 그들과 나 모두에게 고통이며 상처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나의 말을 계속해서 들어주었다. 조용히 내가 말이 끝날 때까지 웃으며 말을 듣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난 오랜만에 느끼는, 심지어 가족과도 느껴본 적이 없던 수다라는 행위의 안도감에 빠져가고 있었다. 그녀가 실질적인 도우미 활동을 한 거라곤 내 몸을 몇 번 뒤척인 것과 대소변 통(난 개인적으로 이걸 인격 말살의 쓰레기통이라 부른다)을 정리해 준 것 밖에 없었지만. 난 요 몇 년간 처음 느껴본 사람대 사람의 대화라는 것에 매우 충실한 충족감을 얻어냈다.
그녀가 돌아간 그 순간부터 나는 그녀와의 대화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분노의 원천이 사람과의 단절이자 나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발로된 것임을 깨닫게 했다. 여전히 창 밖의 비는 나에게 몰아치듯 창을 두들기곤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열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날이 밝았다. 그녀는 꽤나 이른 시간부터(라고는 하지만 그녀에겐 점심쯤인 시간부터) 나에게 밥을 먹여주고 또다시 재잘거리며 이야길 이어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잘 이어지지 않는 말을 되뇌어가며 혼자 말하기를 몇 년이었나. 그런 나에게 있어서 그녀와의 대화는 지성체끼리의 의견 나눔의 장이니 기분이 들뜰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가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난 그녀가 내 이야기가 지루한가 싶어 덜컥 두려움이 피어났다. 모처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생겼나 싶었더니, 그녀 또한 날 지루해하고 불편해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은 의외의 것이었다.
"글을 써보는 건 어때요?"
나는 그 말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이윽고 이어진 그녀의 말들 속에서 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무언가를 권한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날 낳아놓은 부모님마저 나에게 바라는 건 그저 살아 숨 쉬는 것뿐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남들과 같이, 남들처럼 무언가를 권한 것에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그녀의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물음이 나에겐 크나큰 충격의 격류가 되어 날 적셨다.
그동안 느껴본 적 없던, 메말라가던 내 삶에 대한 의지에 단비와 같았다. 나도 무언가 꽃 피울 수 있는 사람일까. 평생 누군가에게 피해만 끼치고 먹구름이었던 나도. 식물과 다를 바 없는 삶에서 나도 무언갈 할 수 있을까. 이런 빌어먹을 몸뚱이로도 무언갈 할 수 있을까.
"어때요?"
난 그녀의 물음에 삐걱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옆에서 흙먼지가 비산 했다. 튀어나오는 돌멩이들이 철모를 두들겼다. 삐-하는 이명과 함께 넋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총을 꽉 쥐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참호를 따라 이동한다. 죽을 것만 같이 빨리 뛰던 심장 소리가 삐-하는 이명과 같이 들려온다. 몸 전체가 맥박질 하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더 가까이 그리고 다시 멀리, 쾅쾅하는 우레와 같은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 비명소리 계속해서 이어지는 총소리.
참호를 따라 시체들이 빨랫줄마냥 걸려있다. 넝마주이가 된 몸뚱이는 이리 접히고 저리 꺾여서 표지판마냥 걸려있다. 위험하다, 이곳은 위험하다.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저기 걸려있는 저 녀석은 어젯밤 술기운에 취해 춤을 추던 녀석이다. 이름도 모르고 어떤 녀석인지도 잘 모르지만, 그는 이제 어젯밤 추었던 괴상한 몸짓마냥 멈추어있다. 나는 그를 밟고 넘어가 자리를 이동한다. 그의 핏덩이가 군화에 들러붙었는지 찌걱 거린다.
나는 반쯤은 반파된 건물에 들어섰다. 숨을 최대한 참고 천천히 조심스레 위로 이동한다.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이미 부서졌다. 난 3층 계단 벽에 살짝 기대어 앉았다. 우리는 누굴 위해 싸우는 것인가. 잠시 쓸데없는 고민을 한다. 삐-하던 귀의 이명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맥박질 치던 심장도 조금은 조용해졌다. 참아왔던 숨소리를 조금 내쉬려던 순간.
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총을 꽉 쥐었다. 3층 창가, 그 소리는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는 듯했다. 나는 숨을 최대한 죽이고 창가로 천천히 향했다. 덜컹하는 소리를 낸 적군은 창가에 몸을 기댄 채 아군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난 적군을 향해 소리쳤다. 적군은 어깨를 들썩거리더니 몸을 천천히 돌린다. 난 총구를 까딱였다. 적군은 들고 있던 총을 땅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소년병인가, 너무도 앳된 그의 얼굴엔 눈물 자국이 생겨있다. 난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소년병이 뭐라 소리친다. 어느 나라 말인지 잠시 고민하다 생각을 접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소년병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눈물이 턱을 타고 땅에 떨어진다. 난 총을 그의 얼굴에 겨눴다.
탕-하는 소리와 퍽- 하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리고, 쿵하는 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뜨뜻미지근한 피가 얼굴에 튀었다. 난 소년병의 것이었을 피를 대충 닦아냈다. 죄책감이나 슬픔 따위는 없었다. 앳된 소년병의 죽음이 불러오는 그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지금, 여기, 이 곳은 그런 장소였다. 난 소년병이 섰던 창가에 기대어 다른 적군을 겨눴다.
"신은 악이오"
"신은 선입니다"
"신은 자신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어린아이의 횡포에 불과하오. 자신의 피조물들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잔인하게 내치는 것이 어째서 선이오? 그것은 혹은 그들은 단지 악이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신이 있다면 말이오"
"신은 자신을 믿지 않는 자를 벌하시는 게 아닙니다. 자신을 믿어 회개하게 하시고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것에 그분의 뜻이 있는 겁니다. 그분은 언제나 세상을 굽어살피시는 거지요. 다른 악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믿으라 하시는 겁니다"
"당신이 말했던 것 중에 하나. 신은 전지전능하다 하였소. 어째서 전지전능한 신이 사람의 마음 하나를 조종하지 못하는 것이요? 성경에 따르면 흙으로 빚어지고 자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존재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 아니겠소? 우리는 그럼 그의 인형놀이에서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가 되는 거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이오? 의지라는 실이 없으면 그는 우리에게 어떠한 힘도 행사할 수 없는 것이오? 대답해보시오. 그는 전지전능합니까?"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무신론자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신부를 노려보았다. 신부는 잠시 생각을 골똘히 정리하는가 싶더니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신의 피조물입니다. 허나 피조물이기 이전에 그의 형상을 본떠 만든 작은 '자신'이지요. 신은 우리가 자신의 자식이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을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는 신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단지 피조물이 아니지요. 당신은 자신의 자식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까?"
"흥-. 말도 안 되는 개소리군. 그럼 어째서 전지전능하다는 거지? 애초에 만들 때 자신의 의지에 거스르지 않게 만들면 되지 않는 건가?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와 뱀의 이야기. 하-. 어린아이에게 총을 쥐어주었나? 뭐가 다른 거지? 애초에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면 만들지 않았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 우리 인간은 그의 자식이라고 쳐봅시다. 그럼 그 뱀은? 뱀은 무슨 존재지? 신의 존재에 반하는 다른 세력인가? 아니면 신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인가? 자신의 말을 거역하고 거짓말하여 자신의 자식을 위험에 처하게 하도록? 자신의 아이들을 위험에 빠트리려고? 자-. 뱀은 뭐지? 당신들이 그리 말하는 성경에서 우리는 자식, 뱀은 뭘까? 자식도 아니면서 신의 의지에 반하는 그 존재에 대해서 설명해주시오"
"단지 성경에 나온 내용을, 그 내용 그대로 받아들이시는군요. 책에 나온 표현은 비유 같은 겁니다. 뱀은 인간에게 있는 기본적인 욕망, 탐욕, 질투 같은 것들이죠. 그것을 비유한 겁니다. 그렇다면 선악과는 우리의-"
"흥-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더니. 그건 단지 너희들의 해석일 뿐 아닌가?"
"그렇지요. 어찌 저희가 신의 말씀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무신론자의 코웃음이 더욱 커졌다. 그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탁자를 내리치며 몸을 앞으로 내민다. 콰아앙- 하는 탁자 친 소리가 방을 울린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가르치다니 흥-. 너희 신부들, 혹은 신자들은 항상 신을 믿으시오. 신을 믿으면 천국 갑니다. 혹은 다른 신을 깔아뭉개지. 지옥에 갑니다! 유황불에 떨어져 죽지도 못하고 되살아나 고통을 받게 됩니다! 하-. 정말 판타지 소설도 이런 대작 판타지 소설이 따로 없구만. 아주 영화로 만들면 블록버스터일 거요? 당신들 신자는 자신들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내용을 가지고,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설파하지. 항상.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내용을 왜곡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또 그것을 배운 사람들이 또다시 왜곡하고. 결국 너희들이 말하는 신의 말씀이란 결국 2천 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너희들이 지어낸 말 뿐이다- 이거요. 권력층에서 범죄를 저지르기 좋게 말이야"
다시 숨을 고른다. 후욱-후욱-하는 거친 숨소리가 내뿜어진다.
"예전부터 권력층은 종교란 걸 이용해서 나라를 다스렸지. 웬 줄 아오? 우매한 백성들을 다스리기엔 그것보다 좋은 게 없었거든. 언제나 왕의 뒤편에선 백성들을 좌지우지하는 신관 녀석들이 잇었지. 그렇게 올라가기 위해서 멍청한 국민 놈들을 구슬리는 거지. 십일조를 내시오. 그래야 천국 갑니다. 면죄부를 팝니다. 이것만 있으면 어떤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용서가 됩니다!! 그딴 식으로 말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신을 믿는 우리는, 신을 믿는 우리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각종 활동을 해왔습니다. 불우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후진국들에게 복지를 하며,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 십자군부터 시작해서 강간, 세금 탈세, 폭력, 강도질. 그것들이 너희들이 하는 행동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단지 일부일 뿐입니다!"
"그 일부도 너희인 거다"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하면 안 되는 것이요!"
"그 일부가 모여 너희들이 되는 것이지"
탁-.
신자는 책을 덮었다. 거울 속 격양된 자신을 바라본다. 잔뜩 거칠어진 얼굴의 '그'가 자신을 쳐다본다. 책장 속 언젠가 챙겨두었던 칼을 꺼내 들었다. 달빛이 스며들어 반짝거린다. 신자는 자신과의 토론에서 이길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신에 대한 신념은 굽힐 수 없었다.
"그래도 신은 선이요."
차악-하는 소리와 함께 손목이 그어진다. 피가 흘러내린다.
"그래도 신은 선이요... 그래도..."
한없이 침잠할 것이다. 그건 오랜 세월 나와 함께해 온 깊은 우울감과의 무언의 약속, 혹은 당연한 수순과도 같은 거였다. 마치 당연히 정해져 있는 운명처럼 깊은 어둠은 내 발목을 타고 올라와 어느새 목 밑까지 차올랐다. 아니 내가 스스로 가라앉으려 하는지도. 이 우울감은 항상 불시에 나를 덮쳤다. 순식간에 격류에 휘말리듯, 우울감의 파도는 나를 뒤흔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했다.
우울. 불안. 공포. 분노. 슬픔. 절망. 그리고 결국은 허무.
이 모든 감정이 결국은 허무와 비슷하다는 걸. 그걸 깨달은 지금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 우울도 언젠간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마치 먼지가 털어져 나가듯. 그렇게-. 목까지 차오른 우울을 애써 무시했다.
집을 나섰다. 하늘은 내 우울과는 다르게 맑았다.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상쾌해서 우울을 조금씩 털어내기 시작했다. 파도가 먼지가 되어 떨어져 나간다. 나는 또 웃기게도 이 우울을 떨쳐내어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멍청하게도.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옥상을 찾았다. 하늘은 맑았다.
그리고 나는 떨쳐내어 버린 줄만 알았던 어둠이 다시금 발목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찌 이리도 멍청할까. 우울은 날 놀리듯이 목 밑에서 넘실거린다. 멍청한. 우울은 곧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나의 세계를 어둡게 만들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인 것처럼. 난 죽기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고 싶다. 또 그런데도 불구하고 편해지고 싶고, 또 힘을 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난 지금 일기처럼, 혹은 유서처럼 이렇게 글을 남긴다.
다른 누군가가 혹시 이 글을 본다면, 나와 같은 우울의 격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숨이 막힌다면. 다른 이들은, 당신은.
난 아마 몸을 던질 것이다. 이 우울은 날 그렇게 할 것이다. 기어코 날 그렇게 만들 것이다.
"날 사랑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꽃을 줘"
처음에 꽃을 사서 너에게 간다는 건 쑥스러웠다. 사실 그렇잖은가? 길가에 꽃을 들고 다니는 남자라니,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네가 좋다면-이라고 생각했다. 넌 꽃과 같았다. 아름다운 겉모습뿐만 아니라 옆에 있을수록 더욱 퍼져나가는 너의 매력은 향기와 같았다. 그래서 넌 꽃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너와 닮아서-너와 같아서.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난 꽃을 사들고 너에게 간다는 게 쑥스럽지 않았다. 꽃을 닮은 너의 미소가, 같이 퍼져나갈 너의 향기가 일종의 기대로 바뀌어 있었다. 천팔백일이 가까워 오는 이 순간에도 넌 여전히 꽃과 같이 아름다웠다.
도서관에 들어섰다. 항상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왠지 모르게 달라진 그 풍경에 기시감을 느끼며 항상 같은 시간, 같은 내 자리에 앉았다. 책을 읽다 고개를 살짝 들면 그녀가 시야 끝에 걸리는 자리로. 시간이 좀 지나도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뭐-사실 내가 그녀를 걱정하거나 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와 단 한마디도, 어떠한 이야기도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벼운 눈인사라도 하는 그런 사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난 그녀가 계속 신경 쓰였다. 나도 모르는 새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야 들었어?"
옆자리의 남자들이 조용히 입을 놀린다. 그들은 재미난 이야깃거리라도 찾은 듯 눈을 반짝였다. 말을 꺼낸 남성이 턱짓으로 그녀가 항상 앉아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요전번에 뉴스에 나온 그거 있잖아, 학교 앞 놀이터에서-"
"살인사건? 뉴스에 나온"
응응-그 여자래- 그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도서관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그때까지 들리던 작은 소음들은 사라지고 그들의 말소리만이 이 공간을 가득 매웠다. 죽었다는데-죽었다는데-죽었다-.
난 나도 모르게 책상을 쾅치며 일어섰다. 도서관 내의 모든 사람이 날 쳐다본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모를 일이지만, 가십거리가 되어버린 그녀가,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었을 그녀가 서글픈 건 나뿐이었을까. 이름도 모르던 그녀가 가십이 되어버린 게 화가 나는 건 내가 이상한 걸까. 짐을 챙겨 도서관을 나왔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 시야의 한쪽에 걸리던 그녀가 없다는 건 꽤나 불편한 일이 될 것 같았다.
[죽어버려- 쓰레기 같은 년]
난 오늘도 내 방 안에 홀로 앉아 댓글을 남긴다. 사실 난 내가 욕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별 관심도 없다. 그저 그런 시답잖은 연예기사, 알게 뭐람. 그저 내 스트레스 발산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저 여자는 그저 사람들에게 물어 뜯길 좋은 소재만을 들켰을 뿐이다. 그게 죄라면 죄겠지, 숨기려면 끝까지 숨겼어야지, 죽을 때까지.
연예인이라면 당연 욕먹을 것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거 아닌가? 돈을 그렇게 갈퀴로 긁어모은다면 얼마든지 욕먹을 수 있는 거 아니냔 말이야? 내가 생각하는 게 틀리지 않았다는 건 수많은 댓글의 수로 증명이 된다. 조그마한 글 하나, 몇 줄도 되지 않는 짧은 댓글 하나. [희대의 썅년, 악플 쓰게 만든 게 누군데] 지가 어쩔 거야. 사람들의 흐름은 우리에게 있고, 그건 거대한 흐름과도 같은데, 그걸 지가 어쩔 거야.
{가수 A양... 도 넘은 악플 법적 대응}
어쭈 신고? 하려면 하던지. 난 그저 그 거대한 흐름에 편승해 잠시 같이 몸을 실은 거니까. 내가 무슨 심한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당연한 거 아니야? 다수가 정의고 소수는 너 하나인걸. 돈 많이 벌면 그 정도야 당연한 거 아니야? [판사님! 이 글은 고양이가 썻습니다-누후소ㅕ갸에]
어차피 신고해놓고 다 취소할 거면서. 뭘 또 심각한 척, 이번엔 못 참는다는 척 지랄이냐고 지랄이. 근데 얘가 뭔 잘못을 했더라?
오랜 옛날 어릴 적 썼던 일기장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일기장이란 그 시절 그 시간 그때의 나를 간직하고 있는 타임캡슐이 아닐까. 아주 어릴 적 기억도 안나는 작고 사소한 일들이, 일기장에 글자라는 형태로, 그림이라는 사소한 형태로 남아 그때의 향기마저 뿜어 저 나오는 게 아닐까 하고요.
일기장의 손떼가 묻은 얼룩덜룩한 한 페이지, 그 한 페이지의 작은 귀퉁이. 우리는 아마 일기장의 그곳에 그때의 시간을 조금 떼어 넣어두는지도 모릅니다. 며칠 혹은 몇 달 뒤, 또는 그보다 오랜 시간. 일기장은 그때의 우리를 머금었다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어떤가요? 오늘 당신의 일기장엔 어떤 시간이 담겨있는지 궁금하진 않으신가요? 혹시 모르지요, 그때의 시간이 그대에게 어떤 선물을 줄런지요.
아침나절 화려하게 피었던 벚꽃은, 밤이 되자 땅으로 땅으로 몸을 내던졌다.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벚꽃의 비를 온몸이 분홍빛으로 물들 때까지 맞고 서 있었다. 쏟아져내리는 벚꽃을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검은 하늘에 수많은 분홍 별들이 떨어져 내렸다. 벚꽃이 떨어진 앙상한 가지에 괜히 자신을 대입하여 조금은 서글퍼졌다. 봄날, 화려한 시간은 아주 짧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떨어져 내리는 짧은 봄날을 마주하다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