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 정지, 그만. 사실 우리네의 인생이란 어떠한 일을 중지하는 일의 연속일 것이다. 모든 행위에 있어서 중단하고 포기해가는 과정 속에 다른 어떠한 행위로 떠밀리듯 밀려나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따지고 본다면 우리네의 자유의지란 어찌나 빈약한지 알 수 있다. 나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닌 포기해 가는 과정, 양손에 과자를 들고 다른 것을 더 받을 수 없을 때, 아이의 선택이란 어떠한 것의 포기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일 거다. 굳이 따지자면 진화의 과정도 포기가 아니던가. 살아남기 위해, 종족의 번식을 위해, 포기해가는 것은 자연의 섭리와도 같을 것이다.
일어설 수 없는 새끼를 버리고 가는 초원의 말처럼, 사냥을 하지 못하는 늙어버린 사자가 버려지는 것처럼, 나무 둥지의 새끼들을 밀어 떨어트리는 저 새들처럼. 모든 것은 포기와 같았다. 우리네의 인생사에 저들의 생사를 대입해보자면 포기란 멈추는 것과 같았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 우리네의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길 멈추면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게. 대학도, 취직도, 하다못해 결혼과 아이와, 그리고 삶에서 있어서까지. 그것은 중지하는 일의 연속일 것이고 종래에는 결국 삶도 멈추는 것과 동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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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아마 악하게 태어날 것이라 믿는다. 누군가의 괴로움, 혹은 슬픔. 고통과 불행을 주제로 한 비극이란 극의 장르를 봐도 그렇다. 누군가가 괴로워하면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 과정을 지켜봄으로써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그것은 아마 인간이 악하게 태어난 증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이 사람답게(여기서 사람답게란 흔히 선한, 도덕과 규범을 잘 지키는 따위다) 살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 또한 비극의 범주에서 자신은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교육과 법으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걸 최소화하기 위한 일 따위가 아닐까. 자신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당하는 게 싫은. 그렇다면 사람운 태어남 자체로 악한가? 악하게 태어났으니 그들은 갱생의 여지가 없나? 그렇다면 성인은 왜 만들어지는 것이고 왜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인가.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아까 말했던 비극이란 장르에 기대어 다시 한번 설명할 수 있다. 성인, 그들은 그들의 비극에 심취한 사람들이다. 난 단연코 그렇게 믿고 있다. 자신을 비극으로 조금씩 차근차근 몰아넣음으로써 그들은 거기서 느껴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카타르시스로 보상받는 것이다. 그건 마치 어떠한 중독과도 같은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비극, 자신의 희생에 대한 카타르시스. 그것에 중독되어버린 자들의 행위라는 것이다.
나비의 날개를 찢고 개미의 몸에 불을 붙이는 아이의 순수함이란, 그저 남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자신은 그 비극의 뒤에 숨어서 웃을 수 있은 그런 악함이 아닐까. 사실 비극을 즐기는 모든 이가, 세상의 모든 비극이 아이의 순수함과 같을 거라 생각한다.
짧은 머리의 소년과 갈색 빛 긴 머리의 소녀, 둘은 오늘도 서로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었다. 그리고는 서로 무언가 확인하듯이 고개를 흔들어 상대방을 안심시켰다. 그 둘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세상의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런 비밀. 단지 둘만 알고 있는 비밀. 그 둘은 서로의 비밀이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지는 않았을까 매일 노심초사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그 걱정만 하면서 살 정도로. 그 비밀이 지속되는 오랜 시간 동안 소년과 소녀는 어느샌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의심은 아주 작은 부분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커져나갔고, 결국에는 서로의 모든 행동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둘의 아침인사는 그러한 서로를 의심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아침인사. 의심이라는 인사.
그중에서도 소년의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사실 소년은 비밀이 지켜지는가에 대한 여부보단, 소녀가 그 비밀을 누설하고 말 거라는 공포가 더 컸다. 언젠가 그 비밀이 밝히어지고 소녀는 양심이 있는 사람으로, 자신은 양심도 없는 그러한 사람으로 남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소년은 소녀를 의심했다. 미행했다. 항상 뒤에서 바라보았다. 머리에 모든 것은 그 소녀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찼다. 다른 누군가가 보기엔 소년이 소녀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년은 항상 전전긍긍,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초조할 때마다 물어뜯은 손톱은 울퉁불퉁 날카로워졌다. 이렇게 며칠-몇 달, 몇 년이 흐른 뒤의 소년의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 의심은 구름처럼 크고 방대하며, 조각조각 흩어지어 더욱 크게 몸을 불리었다. 몇 년이 흐른 지금에서는 소년과 소녀는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모르는 사람인척, 서로를 보아도 이미 인연을 끊은 것처럼. 하지만 서로의 모든 신경은 서로에게 이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소녀가 친구들과 얼굴을 찌푸리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소녀의 찡그린 얼굴이 왜 이리도 불안해 보였을까. 소년은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에 손을 떨었다. 입을 막아야 해. 다른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게. 내 비밀이 탄로 나지 않게. 입을 막아야 해. 어떻게 하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입을 막을 수 있을까? 내 비밀은 밝혀지면 안 돼. 밤이 깊어갈 동안 고민을 거듭한 소년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물어뜯은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소년은 결국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버리자. 죽이자. 죽여서 입을 막자. 죽으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거야. 내 비밀을. 죽이는 거다. 입을 열 수 없게.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소년은 다짐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엌으로 들어가 식칼 하나를 손에 쥐고 소녀의 집으로 향한다. 어두운 밤길- 가로등마저 빛을 흐리며 점멸하고. 거리의 불빛들이 하나씩 꺼져간다. 소년은 언제가 느끼었던 이 두근거림-, 긴장감. 그리고 불안감에 기분이 고조되었다. 왜일까. 불안한 걸까. 아니면-
소년은 소녀의 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릴 적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때도 이렇게-. 마치 오버랩되듯이 그때의 기억이 눈앞에 덧씌워진다. 놀라우리만치 일치하는 그때의 모습, 그리고 느껴지는 감정. 소년은 빠른 속도로 소녀의 방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레 들어선 소년의 모습에 소녀는 얼굴을 굳히고 노려본다. 하지만 서로 말은 없다. 그저 둘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본다.
소년이 한 발자국 다가선다. 끼익-하는 마룻바닥 소리가 비명을 지른다.
소녀는 고개를 흔든다. 스슥-하는 이불 쓸리는 소리가 음산하게 퍼진다.
소년은 손을 높이 치켜든다. 검은 방안에 밝은 식칼 하나. 소년의 붉은 눈이 소녀를 노려본다. 소녀도 알고 있다. '예전에 자신의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 또한-. 소녀의 몸이 창틀에 걸쳐진다. 커튼이 바람에 휘날리며 소년의 몸을 가렸다 사라진다-. 소년의 손이 내리쳐지고 소녀의 가슴에 식칼이 박힌다. 소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저 감기지 않는 눈으로 소년을 노려본다. 입술이 살짝 끌려 올라가고 창틀에 걸쳤던 몸이 천천히 뒤로 꺾여 떨어진다. 쿵-하는 소리가 방안에 울린다. 그제야 소년은 안심했다. 창 밖에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인 소녀의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신만 조심하면 비밀은 평생 지켜지는 것이다. 나만 조심하면...
소년은 문뜩 떠오른 생각에 머리를 흔들었다. 난 말하지 않아-. 죽을 때까지 숨길 수 있어. 이 비밀은 나만의 것. 다른 누군가에게도 들키지 않아. 소년은 그렇게 고개를 흔들다 거울을 바라보며 움직임을 멈춘다. 거울 속의 자신이 피 묻은 손으로 자신을 노려본다. 웃고 있나? 울고 있나? 아니- 두려워하고 있다. 소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질친다. 소년은 창밖을 바라보고, 입을 다물어버린 소녀의 모습을 바라본다. 죽이자. 죽여버리자. 소년은 창틀에 올라선다. 차가운 바람이 몸을 스친다. 죽어서 비밀을 지키자. 몸을 가볍게 날리고-
쿠웅-
온갖 고통이 몸을 휘젓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붉게 변해버린 시야 밖으로 죽어버린 소녀의 모습이 보이고. 그제야 소년은 안심했다. 나의 비밀은 이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다.
비밀은 지켜졌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소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팔과 발을 뻗기도 전에 꽉 차는 방, 그 방이 내가 있을 장소다. 빛 한점 들지 않은 어둠 속에서, 난 내 몸을 옥죄는 이 방안에서야 평안을 느낀다. 나를 움직이는 충동으로부터. 바스락 거리는 작은 소리, 밖에서 들려오는 구두 소리. 어디선가 스치듯이 들려오는 말소리. 그것들은 나에게 있어 모든 욕구의 방아쇠가 되곤 했다. 그 욕구들은 작은 방아쇠의 움직임으로도 발사되어 거침없이 질주하곤 했다.
그래, 나 같은 사람에겐 이런 방이라야 적합하다. 이 좁은 방이라야, 나 혼자인 이 좁은 방이라야 적합하다. 나를 모든 욕구로부터 억압하고, 빛조차 들어오지 않아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 방이라야 적합하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겐, 아니 나와 같은 짐승들에게는 이런 방이라야 적합하다.
작은 말소리에도 치밀어 오르는 이 욕구를 발산할 수 없음에, 난 마음속 깊이 안정을 느낀다. 내가 날 말릴 수 없기에, 내 폭주를 억누를 수 없기에 국가의 개입에 감사한다! 이 얼마나 완벽한 제재인가. 누군가를 범할 일도, 누군가를 죽일 일도,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할 일도 없는 이 곳. 나에겐, 나와 같은 쓰레기에겐, 이 좁디좁은 독방이라야 적합하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언어와 행동, 그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 그래도 난 이해할 노력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은 날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을까. 난 그들에게 언제나 순종해야 했다. 그들은 순종하지 않는 나를 굴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난 신발안의 모래알 같은 불편한 존재였을 테니. 털어내려 해도 털어낼 수 없고, 어느새 모르게 그들의 안에 있는 존재.
그들과 나는 서로에게 있어서 악연과 같았다.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시작된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 도저히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그 악연은 서로에게 상처만 만들어가며 이어지고 있다. 아마 그들과 나의 악연은 누군가가 죽어야 끝이 나겠지, 지긋지긋한 서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이 얘길 왜 물어요? 벌써 우리만 나쁜 놈 됐는데. 하- 그러니까... 그래요, 그놈은 항상 튀었어요.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구요. 생긴 거요? 아- 물론 잘 생겼죠. 공부도 잘했구요. 심지어 운동도 잘하고. 선생님들이 딱 좋아하는 그런 범생, 학교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런 말끔한 이미지였으니까요. 저요? 그냥 평범하죠. 뭐- 대부분의 일반 학생이 그렇지 않은가요? 뛰어난 애들 몇몇과 노는 애들 몇몇, 그리고 저같이 평범한 애들 몇몇, 그리고 평범하지도 않은 지질한 애들 몇몇. 그렇다고 저희 반이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요. 아- 진짜라니까요. 잘 들어봐요 진짜. 우리도 처음엔 그놈이랑 잘 지내려고 했다고요.
그러니까, 박성하. 그놈이 처음 전학 왔을 땐 모두의 관심이 그놈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죠. 왜 그렇잖아요? 잘생긴 녀석이 전학 오면 여자들은 관심 가지고, 남자들은 경계하고. 여자가 전학 온 다면 반대겠지만. 어쨌든 그놈은 전학 오자마자 학교에서 유명해졌어요. 많은 관심을 받았죠. 예? 아- 이때는 좋은 관심이었어요. 아- 진짜. 얘기 끊지 말고 들어봐요 좀. 저랑 친한 몇 명 애들은 단지 아- 잘생겼네 하고 넘어갔어요. 뭐 씨발 별 수 있어요? 잘생긴 놈은 잘생긴 거지.
그런데 말이죠? 그 새끼가 하은이랑 일이 생긴 거죠. 뭐- 흔한 스토리 같지 않아요? 아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당신네들이 좋아하는 그런 가십거리, 뭐 이건 단순 가십거리가 아니라 사실이었지만요. 그래요 하은이는 임신했어요. 그 새끼는 나 몰라라-. 뭐 솔직히 나라도 시발. 갑자기 임신은 했지 애는 안땐다고 그러지. 그래도 성하 이 새끼는 도가 지나쳤어요. 하은이를 걸레 취급하기 시작한 거죠. 내막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최대한 그런 게 아니라고 무마하기 바빴고요. 그렇지만 선생들과 주위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어요. 하은이만 쓰레기가 돼버린 거였죠. 아무한테나 몸을 대주는 창녀,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문제는 하은이가 상당히 여린 아이였단 거죠. 우리가 그 녀석을 멀리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에요.
하은이가 자살한 그때부터.
아- 예. 걔 맞아요. 사진은 또 어디서 구했어요?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이쁘게 생겼죠? 그 뒷얘기요? 계속해야 돼요? 아- 그만하자고요. 더 들어서 어디에 쓸 건데요. 진짜... 하.
성하 그놈, 장례식장에도 안 왔어요. 오지 못하는 것 까진 이해할 수 있었죠. 씨발. 하은이 부모님한테 맞아 죽을게 뻔한데 미쳤다고 오겠어요? 그러고도 기자 맞아요? 여튼간에 우리는 그 녀석이 최소한의 죄책감을 가지길 바랬어요. 죄책감? 개나 주라 그래요. 그 새끼 하은이 죽고도 여행 다니고 여자 만나고 다녔어요.
우린 그 녀석을 왕따 시키기로 마음먹었죠. 아- 그래요 그래. 우리가 뉴스에 나온 게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좀 도가 지나친 것도 있었어요. 처음엔 가볍게 시작했던 게 점점 일이 커졌으니까요. 심하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멈출 수 없이 굴러가고 있었어요. 남자 녀석들의 집단 린치는 날이 갈수록 거칠어져 갔죠. 멈추는 건 불가능했어요. 멈춘 순간 이미 녀석은 병신이 되어 있었으니까.
뉴스엔 이렇게 나왔죠. 교내 왕따 사건으로 인한 학생 한 명 중태. 우리들은 쓰레기가 된 거죠. 뭐-. 이제 와서 보면 틀린 것도 아니겠지만. 씨발. 저기요? 기자 아저씨. 그쪽도 우리들만 나쁘다고 생각해요? 그렇죠? 우리들만 죄를 지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죠?
어째서 오리들만 나쁘다고만 생각해요? 백조가 씨발놈일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요? 우리말이죠-. 그러니까 오리에요 씨팔. 이쁜 백조 괴롭힌 오리.
개쓰레기 같은 백조를 왕따 시킨 멍청한 오리. 단지 그것뿐인 이야기예요.
씨발. 저 갈게요. 다시 찾아오지 마세요. 이 얘기 더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아 그리고 얘기 값으로 사식 좀 넣어주고 가요. 맛있는 걸로.
오색찬란한 눈이 부신 세상- 눈이 부시다 못해 아프기까지 한 화려한 색상들. 그 속에 걸어가는 사람들,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머리. 똑같은 행동을 하며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특이하지만 그 누구도 특이하지 않다. 평범하지만 그 누구도 평범하지 않다. 세상은 똑같이-. 하나같이 똑같은 얼굴과 모습들로 세상을 얘기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 이 세상은 너무나도 평등해. 아름다운 세상이야'
지랄하지 마! 거짓말하지 마!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며 똑같은 말을 내뱉는 듯 하지만,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 아무도 특별하지 않다. 내가 누구인지, 남이 누구인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죽어도 나와 같은 사람은 내 바로 옆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사람이 죽어도 또 똑같은 사람이 그 옆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무도 특별하지 않다. 아무도 중요하지 않다. 내가 나임으로써 존재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나라는 존재의 존귀함은 만인이 똑같음에 하나의 평범한 물체로 전락한다. 그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똑같은 모양의 자갈들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한다. 난 특별해- 난 존엄한 존재야. 아무도 날 대신할 수 없어.
'웃기지 마. 넌 나와 똑같고, 난 너와 똑같다. 아무도 특별하지 않으며, 아무도 평범하지 않다. 내가 너이고 넌 나이며, 우리는 나이고 너는 우리다.'
똑같다. 하지만 다르다? 개 짖는 소리다. 이 세상은 미쳤다. 개인이 가져야 할 특별함은 무시당한다. 부정당한다. 모난 돌은 깨지고 부수어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버린다. 세상은 말한다. 평범한 게 좋은 거다. 모두가 똑같은 세상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아무도 무시당하지 않고 그 누구도 우상이 되지 않는다. 모두가 우상이 될 수 있고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의심하지 마라. 세상은 평화로워졌다. 부정하지 마라. 모두가 똑같아짐으로써 싸움은 없어졌다. 믿어라. 우리는 모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긋지긋한 슬로건. TV에서 나오는 광고. 잡지에 쓰여있는 문구. 모두는 그렇게 세뇌되어가고 특별하지 않은 것이 특별한 것이라 여기며. 모두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리를 걸어간다. 속도를 맞추어 똑같은 걸음걸이로 똑같은 보폭으로 대열을 맞추고. 흐트러지지 않는 군중. 광장에는 모두가 똑같이 걸어나간다. 아무도 질서를 어기지 않고, 그럼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법과, 그럼으로써 안전한 세상. 더 이상 범죄도 없다. 더 이상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도 없다. 더 이상 테러의 공포에 두려워할 일도 없다.
모두는 생각한다. 우리는 생각한다. '나들'은 생각한다. 난 특별해 하지만 특별하지 않아. 난 너와 달라. 하지만 넌 나야. 이 평등한 세상, 아무도 특별하지 않은 세상을 부수고 싶다. 하지만 이 안전함을- 이 평등함을 포기할 순 없다. 난 특별하며 평범하다. 그럼으로써 존재하는 나의 모든 평화. 안정감. 한 가지를 포기함으로써 한 가지를 얻는다. 테러도 없다. 공포도 없다. 슬픔도 없다. 행복도 없다. 즐거움도 없다.
평등한 세상. 아~아름다운 세상. 모두가 똑같은 아~아름다운 세상. 빌어 처먹을 아름다운 세상!
"사실 가장 간단한 행위죠, 안 그래요?"
그는 베실 베실 웃으며 그렇게 되물었다. 난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래요 그거, 대답하기 어려운 상황, 혹은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 껄끄러운 상대, 그것들에 대해서 가장 간단한 행위를 지금 하셨네요, 도피. 예, 바로 그거요"
그는 신나 보였다. 손에 들고 있는 차키를 검지 손가락으로 빙빙-, 시선이 쫓아가질 못한다. 그는 내가 차키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자 재빠르게 열쇠를 멈춰 손에 쥐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손을 뻗어 열쇠를 흔든다.
"두 가지의 선택이 있어요, 어떤 게 좋겠어요?"
그는 뻗었던 손을 거둬들여 열쇠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의 빨간 후드티가 흔들흔들, 아스팔트의 아지랑이처럼 흔들흔들거렸다. 난 빨리 결정할 필요를 느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원하는 걸 말해"
일을 치르는 동안 막혀있던 목구멍에선 쇠 긁는 소리가 나왔다. 목을 간질거리는 통에 기침을 몇 번 했다. 그는 그제야 마음에 드는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짓고 있던 미소가 인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그는 손가락 하나를 펴 앞으로 내민 채 입을 열었다.
"첫째. 돈이 있다면 돈을 더 낸다. 그럼 저는 아저씨를 안전하게 원하는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린다"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펼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둘째. 돈이 없으면 저건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요령껏 토막 내어 버리고 나를 따라온다. 단, 저걸 토막 내는 일에 나는 일체의 도움은 주지 않는다. 자~ 선택하시죠?"
나는 그가 가리키는 저것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덜 닫힌 골프 케이스에서 사람의 손이 하나 삐쭉 뻗어 나와있다. 내가 죽인 아내가. 나는 복잡해오는 머리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돈을 더 주지"
그는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래-, 좋은 선택이에요. 도망가는 일은 전문가에 맡기셔야죠, 뭐~ 아저씨도 저걸 토막 내는 선택에선 도망치긴 하셨네요. 간단한 행위라니까요-"
전 해피엔딩이 싫습니다. 온갖 역경을 겪은 주인공이 행복을 쟁취하는 그 과정이 역겹습니다. 그들은 선해야 하고 정의로우며 용기 있는 인물입니다. 그에 비해 저는 어떤가요? 악하고 비열하며 겁쟁이인 저는 말이죠. 그들의 입장에선 악당일까요? 악당이어야만 하는 거 아닐까요? 그들의 성공가도에, 혹은 인생 역경 스토리에 있어서 저는 한낱 넘어야 할 장애물이 되어야만 하는 거 아닐까요? 비단, 저만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겁니다. 모든 사람들은 상위 몇 프로, 저들만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들이 아닌걸요. 결국 전 그들에게 있어서 패배하고 좌절하는 악당이 되는 거겠죠. 저는 결국 그들의 손에 짓밟히고 제 욕심은 뭉개지며 다른 이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저는. 그러면 저는, 저의 인생의 결말은 배드 엔딩으로 끝마치게 되는 걸까요? 자신의 인생이라면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그런 결말 말입니다. 전 정말 해피엔딩이 싫습니다.
깊은 밤, 달에 기대어 헛소리를 지껄여본다. 난 너에게 참으로 별 볼일 없는 남자였다. 별처럼 반짝이는 너의 미소에 비해 난 그늘진 어둠과 가까웠다. 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에도 그 잘나디 잘난 자존심만 세워가며 너의 미소를 어둡게 만들었다. 그렇게 너와 나 사이에 어둠만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밤하늘 밝게 점멸하던 너의 빛이 하나씩 꺼져가고. 깊은 밤 우리 사이엔 별 볼일 없는 검은 하늘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