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어와 문장과 글과, 그 속에서 느껴지는 느낌과 감성들에 명칭을 붙이는 게 싫다. 청춘의 사랑이야기가 어느 누군가의 마음을 간질이듯, 어깨 위 짊어지게 된 삶의 고난이 담긴 어른들의 이야기가 마음을 짓누르듯, 꺼져가는 어르신들의 생명에 대한 이야기가 먹먹하듯. 그들의 이야기를 그저 어떠한 명칭을 붙임으로써 퇴색되어가는 게 싫다. 아주 작은 사소한 그 명칭은 시를 시로써, 글을 글로써 읽어나가는 감정을 뭉뚱그려버린다. 그것은 일종의 비하와 멸시가 담긴 것으로써 풍부해져야 할 감성을 짖뭉개기에 충분했다.
사랑이야기가 마음을 간지럽히는 게 언제부터 오글 거리는 것이 되었나. 다른 이의 마음이 살랑 거리는 게 그리도 불편하였던가. 그들의 사랑이야기 속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을 텐데 그들은 그렇게 단정 지어버리는 것으로 더 이상 이런 이야기가 쓰일 수 없게 되었다. 글을 씀에 있어서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비굴한 일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오롯이 써 내려가야 하는 게 글이라면, 이렇게 별칭 지어진 감정들을 써 내려갈 수가 있는 것일까. 남들의 입에 거론될 그 감정들은 점점 사장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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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이란 좋은 것이지, 언제든 어느 때곤 실패를 해도 되돌아갈 시간이 있단 얘기야. 저 절망의 끝에서 유턴할 시간은 우리네에겐 더 이상 없거든, 그래 얼마나 좋은 일이냔 말이야. 늙어빠진 이 몸뚱이를 움직이는 것도 관절의 한마디 한마디가 삐걱거리며 소리를 내지르는 것도 없는, 생각마저 둔해져 멍하니 있어야만 하는 우리와 달리 얼마나 좋냔 말이야. 그러니까 젊음은 좋은 것이지, 웃고 뛰고 울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 있다는 게. 죽음보다 삶이 더 가깝고 아직 살 날보다 살아갈 시간이 많다는 게. 즐기게 젊은이, 아직 시간은 많다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한 발 한 발 우직하게 옮기기만 한다면. 시간은 아직 많다네 젊은이. 앞으로의 세상은 자네들 것 아니겠나? 많은 시련과 고난과 슬픔이 있겠지만 두려울게 뭐 있나? 시간은 자네들 편일세"
"젊음이 뭐가 좋습니까. 당신네들처럼 돈만 많이 있다면 우리들보다 신나게 세상을 살 텐데 말입니다. 취직될까 결혼은 해야 할까 집은 구할 수 있을까 회사에서 잘리지는 않을까. 젊음은 아무짝에 쓸모없어요, 알았어요? 세상은 젊음 따위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니까요. 돈만 있어봐요, 절망에 떨어질 일도, 떨어지더라도 우리들보다 손쉽게 다시 올라갈걸요? 젊어서 고생은 무슨... 엿이나 처먹으라고 그래요. "
그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땅바닥이 가까워 옴으로써 그에게 내 생각을 전한다. 허리를 굽히는 각도에 따라 그의 마음이 흡족하게 바뀔 것이다. 허벅지에 붙인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난 잠시간 그가 나를 보며 자위할 수 있도록 허리를 굽힌 채 멈추었다. 자존심도 구부러져 땅으로 머리처럼 처박힌다. 굴욕감과 자존심은 반비례한다. 그리고 내 인사에 그의 흡족함은 미친 듯이 하늘을 향해 치솟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
그가 내 어깨를 두들겼다. 그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고 나서야 굽혔던 허리를 폈다. 뻐근한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다. 굴욕적인 감사는 그의 거만한 배려로 끝이 났다. 빌어먹을 일은 이렇게 간단히 정리가 되었다. 나 혼자 고개를 숙임으로써, 우리를 짓밟은 그에게 굴욕적인 감사를 함으로써 끝이 났다.
무지에서 비롯된 모든 일이 죄악이었다. 모두는 무지로 인해 실수를 저지르고 후회를 하며 그러면서도 돌이킬 방법을 찾지 않는다. 그래,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더 이상의 자비는 필요 없었다. 수 없이 많은 자비와 아량을 베풀었건만 모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지를 남용 했다. 이쯤에 와서는 그것은 무지라기보단 외면이라고 하는 게 더 올바른 말일 것이다. 모두는 이기적이며 비열하고 악하다. 선한 의지를 갖은 이는 없었다. 그래, 모두 종말이다. 그들의 무지는 내 의지를 뛰어넘어 그들의 존재 가치에 아주 깊숙하게 자리 잡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그들의 무지함을 올바르게 채워주지 못한 내 잘못 일 수도 있었다. 또한 모두가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도 한 가지의 문제일 것이다. 세상을 다시 돌려야 할 것이다. 그곳에서의 시작은 무지를 지운 세상에서의 시작이 돼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두 쌍, 그들에게 지혜를 줄 것이다. 온갖 낙원과 행복을 줄 것이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이뤄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금지된 과일을 주어 지혜를 알게 하리라. 그들이 베어 물은 과일이, 지혜의 그 과일이 결국 무지로 인해 벌어진 모든 실수의 과오를 깨닫게 할 것이다. 끊임없이 무지로 인해 벌어진 과오를 되짚게 할 것이다.
자-이제 종말이다. 40일 밤낮으로 물을 퍼부으리라- 모두의 무지를, 모두의 죄악을, 모두의 과오를 씻어낼 시간이 되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리라, 낙원의 그곳에서부터.
잠에서 깨니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다. 추적거리는 빗소리, 눈물을 닦는다. 축축해진 배게를 옆으로 밀치고,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본다. 천장에 새겨진 무늬가 기하학적으로 꿈틀꿈틀 내 머리 위를 어지럽힌다. 몇 달을 생각나지 않던 너였는데 오늘 왜 꿈에서 나타났을까. 잠시 고민해봤자 머리만 아프다. 잊었던 기억들이 걷잡을 수 없이 분출된다. 너의 미소, 얼굴. 그리고 너의 몸에서 나던 향기까지. 베이비로션을 바르던 너의 목덜미에서 나던 그 향기. 코 끝을 간지럽히던 그 향기. 천장의 무늬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너의 얼굴로 변한다. 언제나 털털하게 웃던 네가 웃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기분이 더럽다.
아닌가?
끔찍하다. 착잡한 마음을 뒤덮는 지금의 감정은, 추악했다. 끔찍한 감정은 내 몸속 곳곳으로, 혈관을 모두 검게 물들였다. 머릿속에 웅웅- 보고 싶다. 단 한마디가 말이 되어 입 밖으로 터져 나온다. 아무도 없는 방이지마는, 난 내가 뱉은 말의 소리에 놀래 움찔거렸다. 적막한 방안에 퍼진 그 소리는 생각보다 너무나 컸다. 마치 귀에 대고 소리친 것 마냥 이리저리 메아리쳐 더욱 증폭되어가는 것 같았다. 감정이 더 격해졌다. 말하지 말걸.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말걸. 괜스레 아까의 일을 후회한다. 몇 달 만에 생각난 니 얼굴에 이렇게 괴로워하고 슬퍼할 수 있을까. 그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왜 지금 이렇게 힘들까.
왜 지금 이렇게 네가 보고 싶은지. 알 수 없다.
그때 너를 붙잡을걸. 떠나가는 너에게 가지 말라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해볼걸. 그때는 아무 말 못 하여놓고서. 그때는 무덤덤하게 넘겼던 모든 일들이 왜 지금에서야 이렇게 힘들까. 무덤덤하게 받아놓고는. 무덤덤하게. 눈물이 또 흐른다. 아무렇게나 눈물을 훔치고 몸을 일으킨다. 빗소리가 잦아들고 있다. 잔뜩 잠긴 목을 헛기침을 해 풀곤 창가에 기댄다. 빗방울이 땅에 고인다. 물결을 그린다.
아-졸리다. 멍해지는 눈을 부릅뜨려 노력하며 책상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쓰디쓴 블랙커피가 순간 정신을 일깨운다. 52시간 37분 22초. 현재까지 제대로 잠들지 못한 채 깨어있는 시간. 째깍째깍 흐르는 시계 소리. 멍해지는 머리.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 나는 뺨을 때리며 정신을 일깨웠다. 52시간 37분 57, 아니 58초.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밖을 바라보니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조금씩 머리를 밀어 올리는 햇빛. 순간 건물들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난다. 방안으로 햇빛이 쏟아 들어져 오고, 다시 졸음이 밀려든다. 미칠 것만 같다. 잠이 들면 다시금 찾아올 그 악몽 때문에.
내가 그 꿈을 꾸기 시작한 건 불과 며칠 전.
시골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였다. 졸음운전-. 그 얼마나 위험한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비비며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꿈은 시작됐다. 저 멀리서 보이는 여인-. 꽤나 좋은 몸매, 하지만 힘이 없이 걷는 몸. 나는 그 여인을 관찰하면서도 계속 졸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내 차 위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붉은 눈, 깨어진 머리, 튕겨져 올라가는 몸. 쿠웅-하고 울리는 차의 흔들림. 손 끝에서 느껴지는 떨림.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 소름이 돋는다. 잠이 달아난다. 나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앞을 살폈다.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여인이 튕겨져 나가며 흘렸을 핏방울도 없다. 온몸이 떨린다. 눈을 천천히 들어 백미러를 바라본다. 다행일까-. 아무것도 없다. 숨을 훅 내쉰다. 문을 확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간다. 다행이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없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체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꿈이다-. 그래 꿈이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차를 몰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주차를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친 몸을 눕히고, 꿈은 계속 이어졌다.
쓰러진 여인이 수풀 속에서 몸을 일으킨다. 깨어진 머리에서 뇌수가 흐르고, 핏물이 뚝뚝 떨어진다. 튀어나온 왼쪽 눈이 흔들-움직여 주위를 살핀다. 여인은 튀어나온 눈알을 어루만지듯 쓰다듬어 제자리로 넣으려 애쓴다. 하지만 흘러내리는 뇌수에 섞여 다시금 흘러내려 흔들-. 시곗바늘이 흔들리는 것만 같다. 허리가 잔뜩 뒤틀린 몸으로 부수어진 다리를 질질 끌며 수풀을 헤치며 걷는다. 무언가를 찾듯이 계속 눈을 움직인다. 흔들거린다. 꺾이어진 무릎에서 빠각-빠각-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녀가 수풀 속에서 뛰쳐나오며 나는 잠에서 깬다.
이때가지의 시간, 처음 꿈을 꾼 뒤로 9시간 20분째. 식은땀으로 서늘해진 몸뚱이, 나는 어제의 꿈이 너무 생생해서겠지-라는 생각으로 넘겼다. 11시간째. 회사에 출근-. 일을 한다.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하고 어제 겪었던 꿈을 얘기한다. 사람들은 피식-웃어넘긴다. 보약이라도 해 먹으라는 말로 이야기를 마친다.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은 거북한 느낌이다. 15시간째. 점심을 먹는다. 입안이 꺼끌꺼끌하다. 먹는 건지 마는 건지, 깨작거리다 먹는 걸 마친다. 회사로 올라와 피곤에 지친 눈을 잠깐 감는다. 15시간 30분째.
그녀가 수풀 옆, 도로를 걷는다. 찌익-찌익- 하는 생살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스팔트 위로 붉은 길이 새겨진다. 찌익-찌익- 그녀가 다가온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땅에 쓰러진다. 퍼석-하는 소리와 함께 매달려 있던 눈알 하나가 터져나간다. 그녀는 괴로운 듯 소리를 지른다. 소름 끼치는 소리. 끄아악-하는 그 괴로운 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그녀가 시신경만 매달린 눈을 흔들며 다시 일어선다. 다시 걸어온다.
다시 나는 잠을 깬다.
16시간째.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너무나도 생생한 울음-. 고통에 찬 목소리. 나는 회사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냉장고에서 맥주 하나를 꺼내어 들이킨다. 시발. 뭐야 도대체. 잠자기가 두렵다. 나는 책상 의자에 걸터앉아 남은 맥주를 다 들이켰다. 현재시간 그 일로부터 22시간 18분째. 그녀가 계속 다가온다. 잔뜩 부서진 몸을 이끌고. 하지만 꿈이잖아? 그래 꿈이었어. 내 차엔 아무런 이상도 없었고, 그 씨발년의 몸뚱이도 없었어. 꿈이야. 내가 그때 일에 정신이 홀린 거야. 하아-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어 불을 붙인다. 하얀 연기가 방안을 퍼진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23시간째. 두려움을 안고 다시 잠에 든다.
그녀는 어느새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얼굴을 찌푸린다. 하지만 그다지 제재할 생각은 없는 듯 그저 물러서기 바쁘다. 그녀는 꽤나 먼 거리를 걸어왔는지 부수어졌던 오른 다리의 발목 부분은 사라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붉은색을 물든 뼈와, 그 위에 잔뜩 찢기어진 가죽만이 땅을 끌고 있었다. 까자작-까자작-하는 뼈 긁히는 소리가 괴상하게 들린다. 아픈 다리가 신경 쓰이는지 그녀는 절뚝거리면서도 계속 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괴성에 가깝기도-. 혹은 말일지도.
"여... 릴꺼... 버... 아아아아아아아악"
그녀의 괴성에 잠에서 깬다. 하아-하아-. 문뜩 바라본 시계. 그 일로부터 32시간째. 잠을 자기가 두렵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꿈. 그녀는 어느새 도시로 들어섰다. 나는 잠을 잘 수 없다. 나는 회사에 전화를 하고는, 동네 슈퍼로 가서 커피와 에너지 음료를 잔뜩 사 온다. 그때부터 그 꿈으로부터 도망친 시간.
53시간 20분째.
까자작-까자작-
밖에서 꿈에서 들었던 그 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까자작-까자작- 쿠우 우 우웅-쿠우 우웅-
문이 흔들리다. 끄아아악-하는 괴성도 들려온다. 다시금 쿠우웅-쿠우웅-.
까자작-까자작-.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문에 가까이 다가간다.
까자작-쿠우 우웅-
그리고 꿈에서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까자작-까자작-.
어떤 의미에선 역병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의 마음을 좀먹는 존재. 어느 순간 보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질병. 단지 몇 명만이 벗어날 수 있는 그런 질병. 모두들 죽어간다. 마음이- 생각은 어느새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역병이었다 아니, 역병을 옮기는 들쥐. 그것이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중독되어 죽어가고 있다. 뜻도 모를 말을 하며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저희를 구원하소서, 저희를 굽어살피소서!' 빌어먹을! 지랄 맞은 신! 지랄 맞은 신도들! 빌어먹을 신앙, 역병!
도망쳐야 한다! 여기서! 이 빌어먹을 사이비 집단 틈에서- 나도 광기에 물들어버리기 전에.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은 미쳐가고 있다. 물들어가고 있다! 이 지랄 맞은 들쥐들 틈에서 달아나야 했다! 끝나지 않는 믿음, 지랄 맞은 믿음, 타협이란 모르는 빌어먹을 들쥐들의 역병을 피해서.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한 수 없이 많은 시도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정답을 얻는다. 그것은 수많은 실패와 허무 끝에 얻어낸 아주 작은 성취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그런 성취감.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언제나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그들의 가르침은 벼랑 끝 줄타기처럼 한발 한발이 위태롭게 만들었다. 실수하면 떨어져 내릴지도 몰라, 한순간 저 나락으로, 난 실패하고 말 거야. 팽팽한 줄타기 위에 그들은 내 머리 위로 그득그득 짐을 지운다. 마치 언젠가 내가 떨어져 내릴 것을 더욱 가속화하려는 것처럼. 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떨어질 때엔 그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며 다들 나를 비웃겠지. 박장대소하며 나의 실패를 아주 즐거운 연극인 것처럼 바라볼 것이다. 난 시행착오를 거듭한다. 줄타기에 간혹 떨어질 것처럼 매달려가며, 아주 비굴하게 그들의 관심을 얻어가며 그들의 말 잘 듣는 개처럼.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들의 관심이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게. 그리고 그들이 겉으로 내뱉지 않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수많은 시행착오를 수정해 나간다. 언젠간 결국 떨어져 버릴 것을 알면서도.
"저는 죄인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무릎을 꿇었다. 사실 우리들로써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리고 왜 우리에게 사죄를 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최근 들어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는 들었으나, 그의 눈에는 어떠한 진정성도 담겨 있었기에 우리는 그를 말릴 수 조차 없었다. 그는 자신을 일으키려는 비서의 행동을 저지하고는 머리를 숙였다. 백발의 노인이 우리에게 사죄를 할 일이라 무엇이 있을까. 심지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유명항 독립운동가이며 독립운동 역사관이라는 박물관을 만든 사람이.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우리의 얼굴을 살피고, 주변의 전시품들을 살폈다. 마치 그의 남은 인생 동안 모든 기억을 끄집어내는 모습 같았다. 이윽고 그의 메마른 입술에서 거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약간은 흐느끼듯 또는 부끄러운 그런 목소리로.
"저는 당신들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분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또 우리 민족을 팔아먹은 죄인입니다"
이윽고 이어진 그의 말은 우리를 침묵에 휩싸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는 독립운동가가 아닙니다. 저의 이름은... 그러니까 저는 김성복이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전중철, 우리 민족을 고문하고 짓밟고 팔아넘긴 사람입니다."
김성복, 아니 전중철은 고개 숙여 흐느끼며 말을 함에도, 그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그 자신의 진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떠한 맹세라도 한 듯 아직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우리의 얼굴을 표정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눈에서 흐르던 눈물을 닦아내고 입을 열었다.
"저의 이야기를, 아니 본래 김성복이었을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합니다. 김성복은 본래의 독립운동가인 김성복으로, 전중철, 아니 다나카 테츠는 본래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의 모습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전중철은 잠시간 숨을 고르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김성복을 만난 건 제가 순사부장으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저는 상부로부터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에 합류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 당시의 김성복은 조선총독부를 폭파할 계획을 가진 무력단체의 단장으로 있었습니다."
전중철의 눈이 전시품들을 향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내는 듯 입술을 꽉 물었다. 그는 마치 하나라도 놓치어 설명하면 안 되는 의무라도 쥔 것처럼 굴었다.
"저는 몇 번의 협력과 그들과의 공조로 그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습니다. 김성복은 언제든지 당장 폭탄을 들고 뛰쳐나갈 기세였습니다. 다른 독립 무력단체의 단장들과는 다르게 그는 항상 최전선에 있길 바랬습니다. 단원들과 한 몸, 한날 한뜻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고 죽기를 바라 왔지요. 거사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저를 포함한 단원 3명과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말을 멈추었다. 전시품들을 향했던 눈이 다시금 땅을 향했다.
"전 그들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들로써는 그때의 상황에서도 조선총독부로 향하는 걸음을 옮기려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을 잡아넣을 수 있었습니다. 총을 맞으며 수많은 사람에게 휩싸여 몰매를 맞으며 그들은 허망하게 조선총독부의 근처도 가지 못한 채 끌려가야 했습니다... 김성복은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습니다. 손톱과 발톱이 뽑히고, 생 이빨이 뽑히는 건 아주 작은 고통에 불과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고 그와 함께 끌려온 단원들이 모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건장했단 김성복도 한없이 야위어 독방의 벽 구석에 기대어 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하려 애쓰는 듯했다. 나를 비롯한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저를 부르더군요. '전중철 동지 나와 내기 하나 하지 않겠냐'며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는 그러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저를 동지라 부르기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그는 제가 그 동지라는 말에 멈출 것을 확신한 것만 같았습니다. 그의 내기란 제가 그에게 고문을 하며 했던 말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만약에 조선이 독립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자손들을 위해 일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그는 독립은 결단코 될 것이며, 독립운동가와 그와 같은 무력단체의 후손들은 경원시당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측이심이 될 것을 알았던 셈이지요. 그때의 저는 독립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만, 김성복은 확신에 찬 말투였습니다. 그리고는 독립이 되지 않았을 때에는, 구천에 떠도는 귀신이 되어 절 저주할 일은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며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리곤 자신은 가족도 다 죽었으며, 자신을 아는 단원들도 여기서 숨을 거뒀으니, 원한다면 이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김성복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내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그는 아마 자신이 죽을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일 이후로 며칠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습니다'
전중철은 거기까지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참을 무릎 꿇고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웃기게도 그렇게도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독립은 왔습니다. 그리고 기억 속에 잊고 지내던 그가 한 말이 마치 메아리처럼, 눈덩이처럼 머리 속에서 점점 몸집을 불렸습니다. 웃기게도 전 그가 일방적으로 정한 내기에 응하고 말았던 거지요. 전 김성복으로 살기로 했습니다. 그건 그가 남기고 간 작은 복수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죽음에서도 초연한 그가 바라는 것은 독립이었으며, 그의 후손들을 위한 죽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복수의 작은 불꽃은 저를, 전중철을, 다나카 테츠를 욕하고 때리고 불태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요. 그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팔아넘겨 번 돈으로 그들의 후손을 돕는 셈이었으니까요"
그는 그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여기 이렇게 여러분께 지금에 와서야, 아주 뒤늦은 지금에 와서야 말하는 저를 용서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전중철은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를 비롯한 그가 후원한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은, 그를 비난할 수도,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못하는 이 상황을 황망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 앞에는 붉은 전망대가 있습니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전망대라고 하기에도 조금 민망한 그런 것입니다만. 그 붉은 전망대는 이제는 운영하지 않는, 폐건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밤바다의 길을 비추는 등대 였다고도 합니다만 세월의 흐름 속에 더 이상 밤바다를 비출 필요가 없어진 등대는 밤바다에 빛나는 전망대가 되었습니다.
전 이 전망대에 아주 몰래 오르곤 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이 전망대를 싫어하셨습니다. 저 붉은 전망대를 보고 있노라면, 밤바다에 멀뚱히 서서 노란빛을 발하는 저 붉은 전망대를 보고 있노라면. 어머니는 저 바다에 가라앉은 영혼들이 모여드는 것만 같다고 했습니다. 밤바다에 죽은 영혼들이 붉은 원한을 가지고 영혼을 불태운다고 말이지요.
그렇게 따지자면 전 참 말을 안 듣는 아이였습니다. 전 시시때때로 이 전망대에 올라 밤바다에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검기만 한 바다 위에 전망대에서 떨어져 내리는 빛이 조금 비추는 그 순간이 좋았습니다. 저 멀리서 통통배가 어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 배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안정감마저 느끼곤 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이 밤바다가 주는 선물 같은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밤바다에 마음을 뺏긴 채 돌아온 뒤에는 항상 어머니께 혼이 났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는 몰라도. 그 후로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어머니가 그 전망대를 싫어하시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죽게 만든 등대, 밤바다에 가라앉힌 등대였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아직도 저 붉은 전망대에 오릅니다. 마치 밤바다에 영혼을 뺏긴 것처럼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