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노을이 땅으로 꺼져갈 때쯤, 우연히 땅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붉은 태양이 점점 땅으로 사라지는 것과 반비례하듯, 그림자는 점점 자신의 몸을 길게 늘였다. 마치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점점 몸을 길게 늘이던 그림자는 빛이 툭-하고 사라짐과 동시에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거기 존재하던 게 거짓말인 신기루처럼.
존재하지 않게 된 그림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눈에 보이진 않게 된 모든 게 신기루 같은 건 아닐 것이다. 떠나간 모든 이가 신기루가 아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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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치지직-.
"그리곤 추락했지요"
치지직-.
"아스팔트에 피가 퍼졌습니다. 깨지어진 머리가 여기저기 튕겨져 나가고"
치지직-.
"팔다리가 이리저리 꺾여 기괴한 형체가 되었습니다"
치지직-.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치지직-.
"꿈인 줄 알았습니다"
탁-. 녹음기를 껐다. 사내는 약이 덜 빠져나갔는지 몽롱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여자 친구를 밀어 죽였다는 걸 제대로 인지하고는 있을까. 아직도 꿈인 줄 아는 걸까.
난 왜 이다지도 나가는 게 무서울까요.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왜 공포가 되는 것일까요.
'네가 쓰레기라 그런 거야! 덜 떨어진 새끼' 아버지는 항상 그렇게 나에게 말하곤 하셨지요.
'조금만 더 용기를 내보렴, 아빠가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란다' 그 이후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셨지요. 사실 두 분의 말씀은 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요.
나는 덜 떨어진 게 맞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모든 행동이 다 이해가 되니까요. 덜 떨어진 쓰레기에겐 자그마한 용기조차 넘지 못할 커다란 산과 같으니까요. 마치 내 방의 문지방처럼요.
세상은 마치 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게 맞을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잘 못 된 걸까요? 아니면 제가 틀린 걸까요?
밖에 나가는 것조차 못 하는 저는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아버지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는 것 같습니다. 전 아마 계속 이렇게 있을 겁니다. 문지방 너머의 변해가는 세상과는 다르게
다음에. 그건 제 입버릇일지도 모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제일 손쉽게 도망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지요. 그들에게 있어서는 언젠가는 마주칠 것만 같은 기약 없는 흐릿한 약속을. 나에게 있어서는 언제든 잊어버려도 괜찮은 죄책감 없는 약속을. 아마 서로는 서로에게 있어서 '다음에'라는 말을 그렇게 사용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저에게 있어서 이런 상황은 퍽이나 난감한 상황입니다. 이웃집 아이가 강아지를 들고 왔습니다. 갈색의 털이 복슬복슬한, 하지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똥개 그 이상은 아닌 것 같은. 아이는 날 보고는 안고 있던 강아지를 내밀었습니다.
"아파요 병원에 가야 해요"
아이의 말에 난 조금 뒤로 물러섰습니다. 강아지는 힘이 없는지 아이의 팔에 몸을 기댄 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같이 갈 이유가 있을까요. 난 현관문을 열며 도망치듯 말했습니다.
"미안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다음에 가면 안 될까?"
재빨리 문을 닫고 상황을 도피하자 마음이 안정됩니다. 컴퓨터를 켜고 밖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헤드폰을 끼었습니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담배가 다 떨어져 별 수 없이 집을 나서기 위해 문을 열었습니다. 그제야 잠시 기억 저편으로 잊고 있던 아이와 강아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또 퍽이나 난감하게도 아이는 아직 문 밖에 앉아있습니다.
"아파요..."
아이가 내민 강아지의 머리가 힘없이 땅으로 고꾸라집니다.
"아..."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만 다음에란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라면을 끓였다. 밤 열한 시. 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김치 한 종지와 소주 한 병을 같이 꺼내었다. 라면 한 젓가락에 소주 한잔. 김치 한 조각.
홀로 하루를 보내고 마무리하는 의식처럼. 켜지 않은 텔레비전의 검은 화면에 비친, 형광등 불빛을 별빛 삼아 한잔. 메마르게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또 한잔.
열두 시가 되기 전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셨나 보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어머니 홀로 그렇게.
불 꺼진 방 안에 홀로 누워있노라면 견딜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이고는 합니다. 그 어떤 실체나 의미 또한 없는.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숨을 가만히 내쉬어 봅니다. 나는 혼자입니다. 차라리 혼자인 게 낫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공포가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이불을 뒤척일 때마다 사르륵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옵니다. 내 심장 소리와 숨소리, 이불 쓸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웁니다. 항상 이렇게 난 견딜 수 없는 공포를 이겨내려 애씁니다. 잘 되지는 않습니다만. 아마 이 공포는 바다 밑으로 침잠해버린 내 자존감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내 인생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짝수와 홀수 중 아마 홀수에 가까울 것입니다.
아니라면 무한히 홀수에 가까워지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내 삶이 싫다고는 표현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또 좋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난 이루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사내는 눈 앞의 과자를 하나 집어먹으며 입을 열었다. 그는 녹여먹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천천히 과자를 씹었다. 입안에 들어간 지 한참 후에야 아그작하는 과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런 느린 동작으로 입 안을 비운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전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학교나 직장, 혹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원. 독서실, 극장. 그 어느 곳에서나 눈에 띄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면 잊어버릴 얼굴 또한 내 존재감에 한몫했을 겁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 한 구석에 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데 말이죠, 전 그런 제 일상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런 평범함에 함몰되어, 나라는 존재의 가치는 없는 게 아닐까? 수 없이 많은 평범한 존재들 속에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있는 것일까?"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손을 뻗어 거울 속 자신과 손을 맞추었다.
"에디슨, 그는 세상에 빛을 가져왔지요. 물론 그의 이름은 알려져야 마땅합니다. 베토벤, 그 또한 귀가 안 들릴 때에도 작곡을 하는 아주 그럴듯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물론! 그의 이름도 알려지는 게 당연하지요. 헬렌 켈러, 퀴리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듯 숨을 골랐다.
"그렇다면 피카소, 엔디 워홀, 몬트리안이나 마크 로스코도 당연한 이야기일 겁니다. 그러면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은 나와 무엇이 다르길래 세상 곳곳 모든 사람들이 이들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요 명성, 그들은 명성을 떨칠 수 있는 무언가 업적을 남긴 사람들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그는 거울에서 몸을 돌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면 테드 번디, 에드 게인, 제프리 다머. 이들도 업적을 남긴 사람들일까요? 업적과 명성이 비례한다면 그 방법에 있어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 아아아-물론 좋고 나쁜 방법이란 차이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의자에 묶인 남성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그 나쁜 방법이 제 이름을 알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란 것도 말이죠"
사내는 탁자에 놓인 과자를 다시 입에 넣었다.
"그래서 당신을 어떻게 죽여야 내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까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말이죠"
아그작-.
몇 달 전 병원을 나선 그날부터, 며칠을 고민하다 작은 돌을 주워왔다. 선물로 이런 걸 주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려나. 잠시 고민했지만 글쎄 내가 줄 수 있는 게 별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돌을 주워 온 날부터, 그 돌을 쓰다듬는 건 내 하루의 일부가 되었다. 그저 내 온기가 스며들 수 있도록. 차가운 돌에 내 온기가 스며들 수 있도록. 몇 달간 쓰다듬은 돌은 이제는 꽤나 반질반질해졌다.
그런데 이거 좋아하려나.
넌 언제나처럼 햇살이 제일 따뜻한 시간대에 찾아왔다. 아니, 네가 와서 따뜻한 걸지도. 넌 평소와 같이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야위었어라는 말에 최대한 힘내어 웃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난 베개 밑에 숨겼던 돌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많이 없더라고. 앞으로 얼마나 더 같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내 온기가 담길 수 있게 많이 쓰다듬었는데... 그럴진 모르겠네. 그냥..."
네가 울기 바라진 않았는데... 그냥 나라는 사람을 만났다는 기념품처럼, 그냥 어떤 여행지에서 스쳐 지나가는 기념품처럼 가지고 있어줘. 중요하지 않게 그냥 창고에 박혀 있어도. 네 옆에만 있으면 내가 있었다는 걸 문득 한 번씩 생각해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어... 미안...
울고 있는 널 난 달래줄 수 없었다.
길을 잃어버렸다. 가끔씩 혹은 이따금씩 생각나는 기억들의 편린은 날 혼란에 빠트렸다. 집을 찾아갈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한발자욱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곤 발바닥을 통해 올라오는 차디찬 땅의 냉기에, 내가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또한 내가 걸음을 내딛는다는 그 자체도 생소하다는 것도.
난 기억을 되짚었다. 일분 전에 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난 어디에 있었나? 여기는 어디인가? 모르겠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십 분 전에는, 한 시간 전에는? 전혀... 아니. 한 가지 기억이 되살아났다. 안개 낀 바다 위에서 스리슬쩍 얼굴을 들이밀듯 기억이 나타났다.
난 걸음을 다시 옮겨 산을 올랐다. 약간 숨이 거칠 어 올 때쯤, 산 중턱에 다다랐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내가 죽기로 한 곳이구나. 난 잠시 앉아 산 아래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어버리기 시작할 때쯤, 그렇게 생각했다. 이 곳에서 저녁노을 지는 마을을 바라보며 죽어야겠다고. 붉게 물들어가는 마을만은 내 눈에 기억되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이 찾아오고 해는 숨었다. 난 몸을 돌렸다.
내가 여기에 왜 왔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길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