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의 나는 홀로 있다. 회색빛의 거인들 틈에서 작은 나는 홀로 있다. 마치 나 혼자 동떨어진 존재인 것처럼 난 홀로 서 있다. 회색빛 거인들이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날 짓누를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 꺼멓게 당장이라도 비를 토해낼 것만 같은 구름도 언젠간 날 향해 빗줄기를 쏟아낼 것만 같다. 웅웅 거리며 귓가를 스치는 저 바람들도, 회색 거인들이 뿜어내는 입김처럼 날 저 멀리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난 홀로 있다, 이들 틈에서, 아무도 나의 위로가 되어주지 않는 이 군중 속에서.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나 홀로 외면을 느끼며 난 홀로 있다. 이 도심에선 아무도 내 곁에 서 있지 않는다. 아무도 날 위해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난, 홀로 서 있다.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쏟아지는 여름날이었다. 본래 그날그날의 날씨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 그날도 우산 없이 학교를 갔던 게 화근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었다.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은 우산을 들고 오실 수 없었음이 당연했고, 이미 십수 년 전의 이야기니 핸드폰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핸드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세상의 신이란 작자는 일이란 꼬일 수 있으면 더욱 꼬아버리곤 하는 괴팍한 심보를 가진 게 틀림없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뒤진 안주머니엔 분명 있어야 할 버스 승차권이 없었다. 이때의 나는 내성적이며 예민했으며 남들과 어울리기 상당히 힘들어하는 성격이었기에(사실은 이 성격은 십수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빗 속을 걸어가기로 했다.
집까지는 대략 중학생 아이의 걸음으로 30분, 참으로 미련하게도 난 그렇게 집으로 걸어갔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온 몸은 젖어들고, 하늘은 어둑어둑해졌다. 참으로 웃긴 건 그때의 그 상황이, 지금 이 시점에서도 그때 느낀 감정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빗방울이 물결을 그리는 웅덩이의 비릿한 물 냄새. 젖은 땅에서 흐릿하게 올라오는 흙냄새. 빗방울에 고개를 떨군 나뭇가지가 그리는 그림자. 구름에 가리어진 햇빛이 슬쩍슬쩍 얼굴을 내미는 그 순간. 이윽고 어둠이 내려온 그 상황에서 나 혼자 서 있는 그 길. 옆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만 시끄럽게 귀를 괴롭히는 그 순간. 어린 마음에 혼자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 서글픔이 아주 조금 눈물처럼 나오던 그 순간.
서글펐던 감정은 그때 단 한순간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서글픔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는 있다. 그래도 그때의 왠지 모를 서글펐던 감정은, 아마 사라지지 않고 마음 속 깊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에게 전할 얘기가 있어. 아,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좋은 소식일리 없잖아? 우리가 뭐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응, 그래. 나도 마음 같아선 네 목소리 따위 듣고 싶지 않아. 욕하지 마,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어? 도대체가 넌... 아니야. 응, 만나서 얘기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아니,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 거 같아. 야! 말 이쁘게 하라고, 너랑 말해야 하는 상황이 난 좋은 것 같아? 미친, 야! 너만 욕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다 만나면 또 때리겠다? 야, 그래. 그게 자랑이니? 네가 때렸던 게 자랑이냐고. 찾아오기만 해봐. 미친 새끼, 만날 장소나 정해. 아니, 낮에. 아니, 너 무서워서 어떻게 밤에 보겠어? 낮에 봐. 응, 그때 그 카페, 기억나? 어딘지? 미친, 헤어졌던 거기 말이야. 응. 그래. 욕하지 말랬지? 하~ 지친다. 야, 그냥 전화로 말할게. 야 나 임신했어. 그래, 니 새끼지 쓰레기 새끼야. 응, 지울 거야. 나도 니 새끼 키울 생각 없으니까. 응, 돈은 계좌로 보내. 오늘 중으로 보내, 아니면 회사고 어디고 찾아가서 미친짓 할 테니까. 그래, 당장 보내. 응,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