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불 꺼진 무대, 중앙에 내려오는 핀 조명

핀 조명 안에 놓인 의자로 사내가 걸어온다. 그는 의자에 앉기 전 헛기침을 하곤 관객들을 둘러본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의자에 걸터앉는다. 끼익-하는 소리. 다리를 꼬고 턱을 매만진다.

"많이 있은 일이죠, 뭐- 사실 살면서 한 번쯤은 밝혀질 거라 생각했어요. 어쩔 수 없잖아요? 평생을 숨기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사내는 웃는 듯 우는 듯한 미소를 짓는다. 머리를 긁적이고 고개를 숙인다.

조명이 꺼진다.

Scene 2

비어있는 무대, 무대 한쪽 끝에서 사내가 손에 술병을 든 채 걸어 나온다. 무대 중앙, 다시 내려오는 핀 조명. 사내는 술을 들이켜고는 관객석을 둘러본다. 수염이 더 자란 상태, 사내는 입에 묻은 술을 대충 문질러 닦는다.

"그게 큰 잘못은 아니잖아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줍니까? 대답해봐요! 내가 당신들한테 피해를 주냐고!"

사내는 관객석을 향해 술병을 들이대며 소리친다. 관객석의 조명이 노란색으로 변경. 사내는 숨을 몰아쉬며 관객들을 바라본다.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관객석에 다가선다.

"내가 역겹습니까? 더러워요? 내가 괴물처럼 보입니까? 대답해보세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사내가 물어보는 관객에게 빨간색 핀 조명. 무대의 조명이 꺼진다.

Scene 3

무대 가운데 핀 조명이 천천히 들어온다. 사내는 조명 한가운데 쓰러져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성애자인 줄 알았던 둘은 서로를 만나 사랑을 나눴죠. 20년에 걸친 시간 동안"

사내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관객석에 빨간색 핀 조명이 하나 더 내려온다.

"제가 게이란 사실이 당신들에겐 혐오스럽겠죠"

관객석에 빨간색 핀 조명이 조금씩 늘어간다. 많은 자리에 빨간 핀 조명이 보인다.

사내는 관객을 둘러본다. 점점 늘어가는 빨간 핀 조명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인다. 무대 위 사내에게도 빨간 핀 조명이 떨어진다.

조명이 꺼진다.

Sence 4

탕-하는 총성과 함께 무대 중앙 핀 조명이 서서히 들어온다. 사내는 중앙에 쓰러져있다.

조명이 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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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이름이 되어 불리지 못한 모든 것들에게.

이름이 없는 너희들에게 내가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알량한 동정심일 것이다. 만약 내가 너희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내 위선일 것이다. 너희는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채 아스라이 사라져 버렸지만, 너희의 존재는 누군가에겐 아픔이 되고 슬픔이 되고 흉터로 되어 남을 것이다.

너희가 사라진 일도, 너희를 사라지게 한 일도, 모두의 사정과 이해가 있을 것이다. 슬퍼말아라. 원망 말아라. 내 아무리 너희에게 말을 해보아도 그건 너희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외침은 그저 허공 속에 흩날려버릴 테니. 이렇게 글을 쓰는 일로 공허 속의 너희가, 이름이 되어 불리지 못한 너희가, 잠시라도 기억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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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그는 어두운 방에 들어섰다. 빛 한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손에 들고 있던 후레시 주위만이 그의 시야가 되었다. 터벅하는 발소리에 후레시 주위로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는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애써 참아냈다. 폐 속에서 나오지 못한 먼지는 고통이 되어 그의 목을 긁었다. 숨을 애써 고르고 다시 발을 옮겼다.

오래된 선반. 먼지가 수북이 앉은 탁상시계. 물 대신 먼지가 담긴 물 잔. 언제 찍은 사진인지 모를 가족사진. 모든 것이 지나간 시간 속에 먼지에 파묻혔다. 그는 바닥의 먼지가 비산 하지 않게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뒤틀리고 갈라져버린 나무 바닥이 끽-하는 거친 파열음을 만들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탁상시계를 집어 들었다. 먼지를 털어냈다. 11시 48분, 시간은 아직 그때 그날에 멈춰있었다.

그는 잊을 수 없었다. 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그를 거친 감정의 격류에 밀어 넣곤 했다. 그는 시계를 내려놓고는 사진으로 손을 뻗었다. 이미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사진, 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땀방울이 이마에 맺혔다 턱을 타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사진을 들어 먼지를 닦아냈다. 아- 그래, 이 소녀였구나. 그는 사진 속 작은 소녀를 바라보다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친 빗소리, 몰아채는 바람, 저 멀리서 들려오던 총소리. 그는 그 날로 되돌아갔다. 탕-하는 소리에 옆에 있던 나무가 터져나간다. 숨을 제대로 내쉴 틈 없이 땅을 뒹굴었다. 돌과 나무들이 온몸을 두들기는 것 같았다. 공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폐가 없어질 것만 같다. 근육은 고통을 내질렀다. 그는 그래도 몸을 움직였다. 살고 싶었다. 죽을 수 없었다. 몸을 되는대로 굴려 가시나무 수풀을 지났다.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이 곳이 나타났다. 지금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오래된 나무집, 그는 집으로 들어섰다.

그는 소녀의 사진에서 눈을 돌려 그때의 자신을 쫓았다. 자신은 긴장했으며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총을 들어 방 한쪽으로 향했다. 오지 마, 오면 안 돼. 오지 마. 그는 소리쳤으나 기억 속의 자신은 천천히 이쪽을 향했다. 그리고 끼익-. 방 한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총을 돌려 갈겼다. 나무 벽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비가 멎었다. 그리고 광기에 휩싸인 것만 같았던 그의 총질도 멈추었다. 그는 침을 삼키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엔 소녀가 쓰러져있다. 머리가 박살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소녀가, 뼛조각이 바닥에 굴러다닌다. 피가 바닥을 타고 점점 퍼져간다.

안돼, 안돼. 그는 기억 속의 자신에게 소리쳤다. 안돼 안돼... 얼굴을 알아볼 수 없던 소녀의 얼굴이 보인다. 지난 십여 년간 머릿속을 헤집던 얼굴 없는 소녀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소녀를 보며 계속해서 되뇌었다. 미안해, 미안해. 난 무서웠어. 미안해, 미안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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