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갠 다음 날, 집 앞에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보곤 합니다. 흙과 뒤섞여 적당히 갈색빛을 띠는 구정물은 아지랑이를 피워내듯 이리저리 흙을 일렁거립니다. 그건 마치 살아있는 생명과도 같아서 이리저리 섞이고 흩어지고 뭉쳤다가 부서지곤 합니다. 침전물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해 맑은 물이 상층으로 올라오고 나면 바닥은 한없이 고요해집니다. 그리고 마치 다른 세상으로 연결해주는 터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가라앉은 흙을 뚫고 들어간다면 다른 세상이 확 펼쳐질 것만 같다고도 생각합니다. 나니야 연대기의 옷장이나 해리포터의 9와 3/4 플랫폼처럼. 이 곳을 뚫고 들어간다면 모험이 펼쳐질 거란 생각에 손을 넣어봅니다. 당연하게도 새로운 세상으로의 모험은 없습니다. 가라앉은 침전물이 이리저리 섞이고 흩어지고 뭉쳤다가 부서집니다. 마치 모험이 없는 이 곳의 인간군상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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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울적해 집을 나섰습니다. 간혹 가슴속 저 깊숙한 어딘가에서 훅 하고 무언가 치달아 오르곤 합니다. 집안의 퀘퀘한 곰팡이 냄새와 눅진한 공기는 몸에 들러붙는 것만 같습니다. 바다로 향했습니다. 저에게 바다는 일종의 쓰레기통이었습니다, 감정의 쓰레기통. 바닷바람을 맞으며 치밀어 오른 감정을 바다에 쏟아내면, 마치 저 바다의 끝, 빛이 한 줌 닿지 않은 심연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둠이 더욱 깊어지고 빛이 점점 사라질수록 제 감정도 그렇게 저곳으로 빨려 들어가길. 저 바다의 깊은 곳으로 끊임없이 가라앉기를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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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기운이 없어진 너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참 야속하기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와 지낸 지 십여 년의 시간 동안 넌 그저 나에게 사랑을 주기에 바빴다. 난 너의 머리를 쓰다듬고 너의 눈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총기가 사라지는 네가, 이제 곧 나를 못 알아볼 것만 같아 두려웠다.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게 쓰라린 고통이었다. 나는 너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넌 지난한 고통을 견디고 있겠지. 너와 나의 시간이 다름에, 기필코 올 수밖에 없던 이별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푸석해진 털과 힘없이 흔드는 꼬리가 너와의 이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너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나를 보는 너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넌 언제나 첫 만남 속에서 한없이 뛰어놀던 작은 아기 같았다. 너에게 고통을 참아내고 조금만 더 살아달라는 부탁을 하는 건, 그저 나의 이기심일 것이다. 텅 빈 집안을 바라보고 있는 고통을 견뎌야 할 내가 무서운, 그런 이기심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기적인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단 일 년이라도, 한 달이라도, 하루라도. 아니면 단 몇 시간만이라도 너의 눈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난 이기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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