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밤하늘을 이불 삼아 모닥불에 둘러앉았다. 각자 내어놓는 얘기는 시시껄렁한 사담이었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안도하고 있었다. 이런 얘기가 계속된다면 우리는 해어지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중 한 녀석이 입을 열었다. 조금은 멀리 지금은 없어진 고향 얘기.

"제 고향은 완전 시골이라서요. 전기도 안 들어오고 그랬어요. 그때도 친구들이랑 이렇게 모닥불 피워놓고..."

그렇게 시작한 녀석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던 표정 속에서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녀석은 말을 할수록 점점 그곳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녀석이 말을 끝내고 잠시 우리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는 시간이 흘렀다. 밤하늘이 무겁게 몸을 눌렀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던 모닥불이 서서히 불빛을 사그라트렸다.

우리 사이에 어둠이 가득 찼다. 말을 꺼냇던 녀석은 이윽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모닥불이 희망의 봉화였던 마냥. 녀석의 흐느낌은 쉽사리 전염되어서 모두들 고개를 무릎에 처박고 고통을 쏟아냈다. 다들 그렇게 참고 있던 불안을 어둠에 쏟아내었다. 어둠 속에서 서로 속에서 표정을 숨기고 소리를 숨긴 채 감정만이 요동쳤다.

난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몇 개비 남지 않았던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담배 끝의 빨간 불빛이 뻑뻑 점멸한다. 세상이 멸망했다고 말한 날로부터 3개월, 우리들은 각자의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하지만 분명히 다들 지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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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결정해 주셔야 합니다"

의사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떨궜다. 그는 연신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고 다리를 떨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눈에선 결국 눈물이 맺혔다. 사내는 결정할 수 없었다. 단어가, 글자가 말이 되지 못한 채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생각들 틈으로도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의사는 초조했다. 결정이 늦어질수록 확률은 떨어질 것이다. 의사도 사람이었기에 쉽사리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게 의사의 심장을 짓눌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말을 해야 했다. 최소한 보호자의 작은 죄책감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보호자의 결정에 등을 떠밀어주기라도 해야 했다. 그게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우선순위를 고려하셔야 합니다"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이미 눈물로 뒤덮였다. 헝클어진 머리가 이리저리 삐쳐있다. 사내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흐느낀 탓에 꺽꺽 거리는 쇳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사내는 간신히 말을 꺼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는 연신 몸을 들썩였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내의 결정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기 때문에 위로의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사내는 힘든 결정을 내렸다. 결혼한 지 십 년 만에 생긴 아이와 평생 사랑할 부인, 그리고 지금의 상황. 사내는 결정을 해야만 했다. 부인이 얼마나 간절히 아이를 원했었는지 알면서도 결정을 해야만 했다. 사내는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이제 곧 사그라질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만 같았다. 사내는 듣지 못한 아이의 울음소리를 평생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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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음성을 들었소!"

그는 또 소리치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은 날이라면, 난 당연히 그를 무시하고 지나갔을 거다. 어느 세상이든 저런 또라이 사이비들은 있으니까. 그런 그의 행동을 지금 이렇게 보는 것은 아마 내가 죽기로 결정해서일 거다. 다들 그렇지 않나? 죽기 직전 회개하고 천국을 가기 위해서, 선량한 사람이든 악인이든 부자이든 거지이든 간에 아무런 접점도 없는 사람들이 죽음을 앞에 두면 그렇게들 신을 찾는다. 구원이란 사람을 참 비참하고 비굴하게 만든다. 난 그의 시선이 간신히 머물만한 거리에 걸터앉았다. 겨우 몇 걸음 움직였다고 심장과 폐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는 땅에 머리를 박고는 손을 머리 위로 쳐올렸다. 그 행동은 세계의 유명한 명화나 교회 벽면에 그려져 있을 법한 회개하는 자의 모습이었지만, 그의 남루한 행색이 그를 빛바래게 만들었다. 그는 한참을 중얼거렸다. '신의 음성을 들었소, 신의 음성입니다!' 계속 그 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고개를 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움푹 패인 두 눈이 흡사 죽은 사람의 동공마냥 초점을 잃은 채.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 느릿한 움직임에 나는 오히려 일어서 자리를 피할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내 앞에 서서는 방금 전 교회 앞에서 한 자세를 다시금 취했다.

"신의 음성을 들었소, 신의 음성이란 말입니다"

그는 마치 나에게 되물어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 풀린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말을 걸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끌리듯 입을 열고 말았다.

"신이 무슨 말을 하십니까?"

그는 퍼석거리는 수염을 손으로 거칠게 쓸고는 입을 열었다.

"세상은 종말에 다다랐습니다. 신은 저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을 끝낼 때가 되었으니 모두 그 끝을 대비하라'라고 말이요! 이제 세상은 끝날 때가 되었습니다! 엿새 후 달이 태양을 감추는 그 순간에 말입니다!"

어느 곳에나 있는 흔한 종말론이다. 사실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세상의 종말이건 인류의 종말이건 무슨 상관 이냔 말이다. 난 심드렁해질 수밖에 없었다. 좀 더 회개하라거나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갈 거라거나 그런 류의 이야기가 좀 더 흥미로웠을 터다.

"그래서 종말이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모두 죽습니다. 세상의 끝이란 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 그냥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신은 말하셨습니다. '내 너희를 가엾이 여기며 긴 세월을 보내왔으나 너희의 오만과 실수 거짓된 야욕과 분노, 이기심과 편협함으로 인해 다 끝내기로 하였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천국과 지옥은 없습니다! 세상의 끝인 거란 말입니다!"

난 그 사이비의 말에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죽을 거 망해버리라지. 세상이 어찌 되든 내가 상관할 일 없지 않나. 그냥 망해버리든 끝나버리든.

"최근에 제가 들은 개소리 중 가장 맘에 드는 개소리네요"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땅에 처박고 '신의 음성을 들었소'라는 말 따위를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나는 죽을 거 세상도 같이 끝나버리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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