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달'에 해당되는 글 30건

  1. 2018.06.07 우울.
  2. 2018.06.07 꽃.
  3. 2018.06.07 같은 자리.
  4. 2018.06.07 편승.
  5. 2018.06.07 일기장.
  6. 2018.06.07 봄날.
  7. 2018.06.07 사랑.
  8. 2018.06.07 망상.
  9. 2018.06.07 죽음.
  10. 2018.06.07 손해.

한없이 침잠할 것이다. 그건 오랜 세월 나와 함께해 온 깊은 우울감과의 무언의 약속, 혹은 당연한 수순과도 같은 거였다. 마치 당연히 정해져 있는 운명처럼 깊은 어둠은 내 발목을 타고 올라와 어느새 목 밑까지 차올랐다. 아니 내가 스스로 가라앉으려 하는지도. 이 우울감은 항상 불시에 나를 덮쳤다. 순식간에 격류에 휘말리듯, 우울감의 파도는 나를 뒤흔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했다.

우울. 불안. 공포. 분노. 슬픔. 절망. 그리고 결국은 허무.

이 모든 감정이 결국은 허무와 비슷하다는 걸. 그걸 깨달은 지금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 우울도 언젠간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마치 먼지가 털어져 나가듯. 그렇게-. 목까지 차오른 우울을 애써 무시했다.

집을 나섰다. 하늘은 내 우울과는 다르게 맑았다.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상쾌해서 우울을 조금씩 털어내기 시작했다. 파도가 먼지가 되어 떨어져 나간다. 나는 또 웃기게도 이 우울을 떨쳐내어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멍청하게도.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옥상을 찾았다. 하늘은 맑았다.

그리고 나는 떨쳐내어 버린 줄만 알았던 어둠이 다시금 발목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찌 이리도 멍청할까. 우울은 날 놀리듯이 목 밑에서 넘실거린다. 멍청한. 우울은 곧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나의 세계를 어둡게 만들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인 것처럼. 난 죽기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고 싶다. 또 그런데도 불구하고 편해지고 싶고, 또 힘을 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난 지금 일기처럼, 혹은 유서처럼 이렇게 글을 남긴다.

다른 누군가가 혹시 이 글을 본다면, 나와 같은 우울의 격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숨이 막힌다면. 다른 이들은, 당신은.

난 아마 몸을 던질 것이다. 이 우울은 날 그렇게 할 것이다. 기어코 날 그렇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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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날 사랑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꽃을 줘"

처음에 꽃을 사서 너에게 간다는 건 쑥스러웠다. 사실 그렇잖은가? 길가에 꽃을 들고 다니는 남자라니,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네가 좋다면-이라고 생각했다. 넌 꽃과 같았다. 아름다운 겉모습뿐만 아니라 옆에 있을수록 더욱 퍼져나가는 너의 매력은 향기와 같았다. 그래서 넌 꽃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너와 닮아서-너와 같아서.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난 꽃을 사들고 너에게 간다는 게 쑥스럽지 않았다. 꽃을 닮은 너의 미소가, 같이 퍼져나갈 너의 향기가 일종의 기대로 바뀌어 있었다. 천팔백일이 가까워 오는 이 순간에도 넌 여전히 꽃과 같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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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0) 2018.06.07
Posted by Ralgo :

도서관에 들어섰다. 항상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왠지 모르게 달라진 그 풍경에 기시감을 느끼며 항상 같은 시간, 같은 내 자리에 앉았다. 책을 읽다 고개를 살짝 들면 그녀가 시야 끝에 걸리는 자리로. 시간이 좀 지나도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뭐-사실 내가 그녀를 걱정하거나 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와 단 한마디도, 어떠한 이야기도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벼운 눈인사라도 하는 그런 사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난 그녀가 계속 신경 쓰였다. 나도 모르는 새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야 들었어?"

옆자리의 남자들이 조용히 입을 놀린다. 그들은 재미난 이야깃거리라도 찾은 듯 눈을 반짝였다. 말을 꺼낸 남성이 턱짓으로 그녀가 항상 앉아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요전번에 뉴스에 나온 그거 있잖아, 학교 앞 놀이터에서-"

"살인사건? 뉴스에 나온"

응응-그 여자래- 그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도서관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그때까지 들리던 작은 소음들은 사라지고 그들의 말소리만이 이 공간을 가득 매웠다. 죽었다는데-죽었다는데-죽었다-.

난 나도 모르게 책상을 쾅치며 일어섰다. 도서관 내의 모든 사람이 날 쳐다본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모를 일이지만, 가십거리가 되어버린 그녀가,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었을 그녀가 서글픈 건 나뿐이었을까. 이름도 모르던 그녀가 가십이 되어버린 게 화가 나는 건 내가 이상한 걸까. 짐을 챙겨 도서관을 나왔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 시야의 한쪽에 걸리던 그녀가 없다는 건 꽤나 불편한 일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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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죽어버려- 쓰레기 같은 년]

난 오늘도 내 방 안에 홀로 앉아 댓글을 남긴다. 사실 난 내가 욕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별 관심도 없다. 그저 그런 시답잖은 연예기사, 알게 뭐람. 그저 내 스트레스 발산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저 여자는 그저 사람들에게 물어 뜯길 좋은 소재만을 들켰을 뿐이다. 그게 죄라면 죄겠지, 숨기려면 끝까지 숨겼어야지, 죽을 때까지.

연예인이라면 당연 욕먹을 것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거 아닌가? 돈을 그렇게 갈퀴로 긁어모은다면 얼마든지 욕먹을 수 있는 거 아니냔 말이야? 내가 생각하는 게 틀리지 않았다는 건 수많은 댓글의 수로 증명이 된다. 조그마한 글 하나, 몇 줄도 되지 않는 짧은 댓글 하나. [희대의 썅년, 악플 쓰게 만든 게 누군데] 지가 어쩔 거야. 사람들의 흐름은 우리에게 있고, 그건 거대한 흐름과도 같은데, 그걸 지가 어쩔 거야.

{가수 A양... 도 넘은 악플 법적 대응}

어쭈 신고? 하려면 하던지. 난 그저 그 거대한 흐름에 편승해 잠시 같이 몸을 실은 거니까. 내가 무슨 심한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당연한 거 아니야? 다수가 정의고 소수는 너 하나인걸. 돈 많이 벌면 그 정도야 당연한 거 아니야? [판사님! 이 글은 고양이가 썻습니다-누후소ㅕ갸에]

어차피 신고해놓고 다 취소할 거면서. 뭘 또 심각한 척, 이번엔 못 참는다는 척 지랄이냐고 지랄이. 근데 얘가 뭔 잘못을 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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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옛날 어릴 적 썼던 일기장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일기장이란 그 시절 그 시간 그때의 나를 간직하고 있는 타임캡슐이 아닐까. 아주 어릴 적 기억도 안나는 작고 사소한 일들이, 일기장에 글자라는 형태로, 그림이라는 사소한 형태로 남아 그때의 향기마저 뿜어 저 나오는 게 아닐까 하고요.

일기장의 손떼가 묻은 얼룩덜룩한 한 페이지, 그 한 페이지의 작은 귀퉁이. 우리는 아마 일기장의 그곳에 그때의 시간을 조금 떼어 넣어두는지도 모릅니다. 며칠 혹은 몇 달 뒤, 또는 그보다 오랜 시간. 일기장은 그때의 우리를 머금었다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어떤가요? 오늘 당신의 일기장엔 어떤 시간이 담겨있는지 궁금하진 않으신가요? 혹시 모르지요, 그때의 시간이 그대에게 어떤 선물을 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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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나절 화려하게 피었던 벚꽃은, 밤이 되자 땅으로 땅으로 몸을 내던졌다.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벚꽃의 비를 온몸이 분홍빛으로 물들 때까지 맞고 서 있었다. 쏟아져내리는 벚꽃을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검은 하늘에 수많은 분홍 별들이 떨어져 내렸다. 벚꽃이 떨어진 앙상한 가지에 괜히 자신을 대입하여 조금은 서글퍼졌다. 봄날, 화려한 시간은 아주 짧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떨어져 내리는 짧은 봄날을 마주하다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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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너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말을 제일 엿같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날 사랑한다면, 정말로 그렇다면 그는 지독한 사디스트이거나 정신이상자, 혹은 사이코패스일 것이다. 남의 불행을 즐기며 관음하며 사랑한다 말하는 미친 새끼. 그런 싸이코 새끼가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니, 온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돋을 지경이다. 하다못해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좀 괜찮았을까? 신이 말한 그 사랑은 분명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사랑이라고 보기 힘든 그런 것일 거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버림받았고,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해 사회의 낙오자, 카스트 제도의 제일 아래 불가축 천민처럼 살아왔다. 다른 이들에겐 동물보다 못한 존재로 그렇게. 물론 지금 시대엔 신분제가 없지만 분명 그것이 존재했다. 과거와 다른 게 있다면 지금은 단순히 돈, 돈 하나로 신분이 구분되었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하다못해 교육도 못 받은 나 같은 존재는, 언제나 돈으로 이루어진 카스트 제도를 떠받치기 위해 존재하는 볼품없는 돌멩이 하나에 불과할 것이었다.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불공평하다. 그리고 신은 정당하지 않다. 그리고 또, 신은 적어도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아닌 것이다. 일용직으로 살아온 지 십여 년, 서른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변변한 삶을 꾸리기엔 인생은 치열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버텨나가는 것이었다. 매일 일이 끝나면 술잔으로 삶에서 도피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자주 가는 포장마차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에 술이 차올랐다. 넘칠 듯 말 듯 가득 찬 술잔의 술 몇 방울이 잔을 따라 테이블로 흘러내렸다. 바닥에 물방울무늬를 만든다. 술잔에 담긴 술들이 그의 사랑이라면, 넘쳐흐르는 건 나에 대한 사랑인 걸까. 다른 이들에게 그득그득 채워준 이후에나 한 방울.

그렇게 목마른 이가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될 한 방울. 결국은 흘러넘친 그 한 방울을 위해 인간들은 싸움을 벌인 것일 테지. 몇몇의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넘치게 주어진 그 사랑을, 땅으로 떨어져 결국엔 없어질 그 한 방울을 위해. 신이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한마디에 현혹된 채. 정말 그가 우리를, 아니 나를 사랑한다면 적어도 저 높은 곳에 사는 그들의 절반만이라도, 아니 아주 작은 10분의 1도 안 되는 그 정도의 사랑만 주었어도. 그렇다고만 해도 난 그를 원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신? 좆까는 소리. 결국은 저들이 우리를 부려먹기 위한 아주 얕은 수작일 뿐. 가득 담긴 술을 들이켰다. 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유난히도 술기운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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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1월 17일 14시. 여기는 지하매장. 수많은 사람들 중, 빨간 점퍼를 입은 남자와 노란 머리의 여자 커플이 의심스럽다. 벌써 세 번째 내 시야에 들어왔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수첩에 글씨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가끔 흘기듯이 나를 살피고 진열대 뒤로 몸을 숨긴다. 하지만 난 알 수 있다. 그들이 의심스럽다.]

[1월 17일 19시. 벌써 해가 저물고 있다. 아까의 커플은 교대한 건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에 불이 켜진다. 주변에 많은 사람이 보이지만 딱히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다.]

[1월 19일 9시. 그들은 어딜 가나 항상 내 시야에 있다. 왼쪽- 그러니까 전방 11시 방향.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 눈이 마주치자 시계를 확인한다. 그렇게 행동해도 내 눈을 피할 수는 없다. 오늘은 조심스레 그들을 미행해보기로 한다.]

[1월 19일 12시. 그들을 놓쳤다. 녀석들은 용의주도하게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도망쳤다. 없어졌다. 아쉬운 마음을 참고 길을 되돌아간다. 아마 오늘은 더 이상의 미행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모르는 거겠지만...]

[1월 22일 15시. 오늘은 조금 늦게 집을 나섰다. 아무도 주변에 없지만 난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다. 오른쪽 상호 빌라 3층, 거기서 비추는 미세한 불빛. 몇 년간의 미행 탓인지 난 그걸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최대한 의심 사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 내가 그들을 발견했다는 걸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1월 22일 21시. 한 명이 아니다. 도망가야 한다. 걸린 것 같다.]

[1월 22일 21시 30분. 쫓아오고 있다.]

[하아... 1월 하아- 22일 22시. 여기는 하나아파트 지하. 하아- 넘버 7201 차 뒤에 몸을 숨겼다. 녀석이 날 놓쳤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아직 숨어 있어야겠다.]

[1월 22일 23시. 개 같은 새끼들. 내가 그 새끼들의 수법을 몰랐더라면 지금 난 죽었을 거다. 치밀한 새끼들. 흔적을 지워두고 사라졌다.]

[2월 1일. 시간은... 모르겠다. 며칠째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2월 9일. 녀석들이 밖에 있다. 나갈 수가 없다.]

[2월... 며칠이지? 경찰들은 내 전화를 무시한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나?]

[밖에 분명 녀석들이 있었다. 내가 나가는걸 눈치채자마자 귀신같이 사라졌다. 쥐새끼들...]

[나가면 녀석들이 분명 다시 날 뒤쫓을 거다. 하지만 나가지 않을 수 없다.]

[빨간 점퍼가 수상하다.]

[쫓아갔으나 잡을 수 없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분명히. ]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분명히...]

[난 미치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누군가... 아니다.]

[...]

[......]

[이젠 네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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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었다"

감흥이 없다.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는다. 내가 죽었다. 난 죽었다. 아무리 말해봐도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고, 숨 쉬고-.

난 살아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심장이 멈췄다고 할 수는 있었지만, 죽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는 살아있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며 중얼거린다. 그래- 난 살아있다. 아무리 해도 실감은 나지 않지만 난 살아있다. 심장도 뛰지 않고,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가고, 몇 시간이 지났는지 어느새 몸 곳곳에 시반이 퍼지고 있지마는. 그렇지마는 나는 살아있다. 이렇게 움직일 수 있다. 관절이 뻑뻑하고 곧 부서질 것만 같지만 살아있다. 피부가 찢기어져 메말라버린 근육이 드러날 것만 같지마는 나는 살아있다. 나는 창백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시체다"

쿠웅- 하는 느낌과 함께, 그제야 나의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쿵쿵쿵쿵하고 내 처지가 실감이 됐다. 나는 시체다. 나는 죽었다고 볼 수는 없지마는 시체라곤 볼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좀비-. 미국 드라마에서나 혹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그러한 좀비. 나는 시체다. 키키킥-하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긁적거린다. 찌지지직-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손톱 끝에 피부 조각이 찢겨 나온다. 손톱 끝에서 아무렇게나 찢긴 피부- 그리고 그 위로 뻗어진 머리카락. 왠지 모르게 더 웃음이 터져 나온다. 뭐 이런 코미디가 다 있어! 하고 소리 내어 말해본다. 손톱 끝에 걸린 기분 나쁜 피부 조각을 옷에 쓱쓱 문질러 닦는다. 청바지 위에 검게 죽은 핏자국이 붓칠 한 것 마냥 새겨진다. 나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하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딱히 그렇게 확 티가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뭐. 될 수 있는 만큼 살아보지 뭐-하고 속 편히 생각했다. 이미 썩어 문드러져가는 몸뚱이다. 방부처리를 해도 늦겠지. 그 증거로 소매를 걷은 팔 안쪽은 이미 모두 썩어 들어갔다.

침대 한쪽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핸드폰을 집어 든다. 날짜를 보니 내가 '죽어있던' 시간은 5일. 꽤나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핸드폰에는 미확인 문자 2통이 남겨져 있다. 잠금화면을 열고 메시지부터 확인한다.

[ 오늘 밤 재워주실래요? 010-1234-5678]

지랄하네. 아-? 가볼까.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식겁하겠지? 피식-하고 웃음이 흘러나온다. 되지도 않는 생각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 새끼들은 내가 '죽어있던' 걸 알고 이런 문자를 보냈으려나. 뭐- 알 턱이 없지. 병신들. 다음 문자는-

[야- 술 먹자-]

아-이 병신. 또 술먹쟤. 꺼져라 씨뱅아. 분명 술 처먹으면서 돈이나 꿔달라고 하겠지. 시벌놈이 돈 빌려달라고 할 거면 술값은 지가 내던지. 개 같은 놈. 모든 연락을 확인하고 나서는 가만히 앉아있다. 뭐 할 게 없다. 진짜 인간관계 좁구나. 5일 동안 연락 온건 빌어먹을 빈대 새끼 하나랑, 스팸전화 하나. 괜히 씁쓸하다. 문을 열자 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밖에나 나가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방 한쪽 구석에 걸려있던 모자를 집어 든다. 마스크 대신 목도리를 하나 찾아 목에 두른다. 방문을 열고 밖을 나서자 살을 메마르게 하는 햇빛이 쏟아져내린다. 피부가 더 빨리 썩어 들어가지는 않겠지? 잠시 걱정하다가,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걸 보고는 그냥 밖으로 나섰다.

약간은 시야가 흐릿하게 보이는 세상. 이나마도 감사해야 할까. 점점 몸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몸이 완전히 멈춰버리기 전에 어딜가야할까. 몸이 죽어버리기 전에 어딜가야할까. 완전히 죽어버리기 전에.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움직인다. 모르겠다. 받아주실까. 얼마 만에 찾아가는 거지?

수많은 고민을 하며 걸음을 옮긴다. 썩어가는 몸뚱이에선 이상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는지 슬슬 사람들이 나를 피한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마주 인상을 써준다. 그들의 표정이 기괴하게 바뀌어 얼른 눈을 피한다. 병신들-. 덤비지 마. 물어버릴 거야. 혹시 알아? 내가 물면 진짜 좀비처럼 전염될지도? 잠시 궁금했지만 안 하기로 한다. 고마운 줄 알아 시발. 전염은 안돼도 기분은 더럽겠지. 아니면 세균 감염이라도 될지도...

쓸데없는 생각.

때마침 버스정류장에 온 버스에 탑승하려 하지만 기사가 제지한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단호하게 내리게 한다. 아 시벌. 그냥 걸어서 가기로 한다. 사실 딱히 먼 거리도 아니고. 한 30분 걸으면 되려나.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발바닥이 찢기는 기분이 든다. 뭐-찢겼겠지. 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어느새 이 썩어버린 몸뚱이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발목이 뒤틀린 것도 같다. 뭐 어때. 아픈 것도 아닌데. 무릎이 점점 굳어가는 것만 같다. 뭐 어때. 어차피 지금도 사람들이 피하는데.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니 꼬마애 무리들이 물총 싸움을 하며 뛰어온다. 얼씨구- 좋을 때다. 조심해라 나처럼 되기 전에-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꼬마애 한 명이 나에게 몸을 부딪힌다. 뻐걱-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으며, 바닥에 뒹굴었다. 꼬마가 재빠르게 일어나 나를 쳐다보고는, 잔뜩 굳은 얼굴로 도망친다. 야-인마. 사람을 넘어트렸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 거야! 뭐 지금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킨다. 아아-시발.

왼쪽 무릎이 부서졌다. 아예 덜렁거린다.
...꼬마가 사과도 못 하고 도망갈 만도 하네. 으쌰-하고 몸을 일으킨다. 아예 못 걸을 정도는 아니다. 절뚝거리며 걸을 순 있겠지. 꼬마야 놀라게 해서 미안해. 도망가는 꼬마에게 손을 흔든다. 아아-걷는 게 조금 더 느려지려나. 천천히 가지 뭐-. 걸음을 옮긴다.

느리게 걷는 건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준다. 수많은 풍경- 느리게 스쳐 지나가는 길거리의 사물들. 절뚝거리며 걷는 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약간 흐리게 보인다는 단점 빼고는... 진작 왜 이런 풍경을 보고 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생긴다. 하긴- 그때야 게임에 미치고, 술에 미치고, 담배에 미치고. 주변을 볼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공원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공원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까악-까악-

울고 있는 저 까마귀들은 지나치게 많이 보인다. 그것은 마치 날 노리고 있는 행동 같았다. 잠깐-. 그런데 까마귀도 시체를 먹나?... 뭐-. 못 먹을 건 또 뭐야. 그렇게 생각하니 저것들이 진짜 나를 노리는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나는 녀석들에게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안돼 이 새끼들아. 아직은. 먹더라도 내가 아예 멈추고 먹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어느새 내가 가야 할 곳이 다가오고 있다. 벌써 눈 앞에 보인다. 붉은 담벼락. 푸른색 대문. 그 위로 솟아있는 동그란 호박 전등 두 개. 밤마다 노랗게 불빛이 들어오는 호박 전등. 저 밑에서 매일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엄마는 항상 늦은 시간에 나에게 줄 간식 봉투를 손에 들고, 내가 온 길을 통해서 걸어오셨다. 노란 전등 밑에서 난 엄마를 안고 엄마는 그런 나를 안고. 밀려드는 추억들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걸린다. 조심스레 문 앞에 다가가 벨을 누른다. 띠링-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아-, 어디 가셨나.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파란 대문 앞에 기대어 앉는다. 무릎을 당겨 얼굴을 파묻는다. 쩌걱쩌걱-하는 피부가 들러붙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울려 퍼진다.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빨리 흐른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주변을 살피고 있노라면 더욱 그렇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 용기도 없어서 그냥 지나가는 것들만 구경한다. 시야는 점점 흐려지고, 흐릿하게- 거멓게만 보인다. 가끔 뻐얼건 무언가가 왔다 갔다 한다.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다. 시발. 쳐다보지 마. 조용히 입 밖으로 내뱉는다. 땅거미가 지고 바닥에 빨간 노을이 내려앉는다. 빨간 노을은 검은 그림자를 만들고, 마치 자꾸 커져만 가는 거인처럼 자신을 늘린다. 그리고 저 멀리서 그 그림자의 주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아들?"

대답할 수가 없다. 목이 막힌다. 입이 메말랐다. 일어설 수 없다. 몸에 힘이 들어간다. 주먹을 움켜쥔다. 썩은 고름이 손바닥에 흘러내린다. 몸이 들썩거린다. 움직일 수 없다. 아니 움직이면 안 된다. 다가오지 마요. 엄마. 다가오지 마요. 다가오면 안 돼요. 엄마. 안돼요.

"아들... 맞지?"

...엄마! 엄마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잊을 수 없다. 언제나 따뜻하게 내 맘을 감싼다. 어느새 엄마는 내 앞에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안돼요 엄마. 안돼요. 말을 하고 싶지만 입을 열 수 없다. 입술이 찢어질 것 같다. 썩어버린 피부 조각이 뜯겨내릴 것 같다. 엄마가 잡은 어깨가 덜컥- 빠지는 느낌이 든다.

"아들 맞는 거지? 그렇지?"

엄마...!

일어서서 엄마를 끌어안는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 아마 엄마가 또 맛있는 간식을 사 오셨나 보다. 맛있는 간식을. 베어 물은 고깃 조각에서 피가 흐른다. 달콤하다.

"어... 마...?"

엄마도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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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가 서로에게 손해라는 생각이 든 시점에, 우리는 그렇게 이별했어야 했다. 지지부진한 관계는 끊임없는 하락장 속에서 파란 막대만 차트를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하락에 하락을 계속했기에 빨갛던, 정열적이던 사랑은 더 이상 우리에겐 없었다. 언제 매매를 던져야 할지 몰랐던 우리는 바닥을 향해 치달았다. 언젠가 우리의 사랑이 다시 반등하기를 기다리며.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시간은 오지 않았고, 우리의 거래는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해만 가져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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