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언어와 행동, 그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 그래도 난 이해할 노력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은 날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을까. 난 그들에게 언제나 순종해야 했다. 그들은 순종하지 않는 나를 굴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난 신발안의 모래알 같은 불편한 존재였을 테니. 털어내려 해도 털어낼 수 없고, 어느새 모르게 그들의 안에 있는 존재.
그들과 나는 서로에게 있어서 악연과 같았다.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시작된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 도저히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그 악연은 서로에게 상처만 만들어가며 이어지고 있다. 아마 그들과 나의 악연은 누군가가 죽어야 끝이 나겠지, 지긋지긋한 서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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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길 왜 물어요? 벌써 우리만 나쁜 놈 됐는데. 하- 그러니까... 그래요, 그놈은 항상 튀었어요.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구요. 생긴 거요? 아- 물론 잘 생겼죠. 공부도 잘했구요. 심지어 운동도 잘하고. 선생님들이 딱 좋아하는 그런 범생, 학교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런 말끔한 이미지였으니까요. 저요? 그냥 평범하죠. 뭐- 대부분의 일반 학생이 그렇지 않은가요? 뛰어난 애들 몇몇과 노는 애들 몇몇, 그리고 저같이 평범한 애들 몇몇, 그리고 평범하지도 않은 지질한 애들 몇몇. 그렇다고 저희 반이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요. 아- 진짜라니까요. 잘 들어봐요 진짜. 우리도 처음엔 그놈이랑 잘 지내려고 했다고요.
그러니까, 박성하. 그놈이 처음 전학 왔을 땐 모두의 관심이 그놈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죠. 왜 그렇잖아요? 잘생긴 녀석이 전학 오면 여자들은 관심 가지고, 남자들은 경계하고. 여자가 전학 온 다면 반대겠지만. 어쨌든 그놈은 전학 오자마자 학교에서 유명해졌어요. 많은 관심을 받았죠. 예? 아- 이때는 좋은 관심이었어요. 아- 진짜. 얘기 끊지 말고 들어봐요 좀. 저랑 친한 몇 명 애들은 단지 아- 잘생겼네 하고 넘어갔어요. 뭐 씨발 별 수 있어요? 잘생긴 놈은 잘생긴 거지.
그런데 말이죠? 그 새끼가 하은이랑 일이 생긴 거죠. 뭐- 흔한 스토리 같지 않아요? 아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당신네들이 좋아하는 그런 가십거리, 뭐 이건 단순 가십거리가 아니라 사실이었지만요. 그래요 하은이는 임신했어요. 그 새끼는 나 몰라라-. 뭐 솔직히 나라도 시발. 갑자기 임신은 했지 애는 안땐다고 그러지. 그래도 성하 이 새끼는 도가 지나쳤어요. 하은이를 걸레 취급하기 시작한 거죠. 내막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최대한 그런 게 아니라고 무마하기 바빴고요. 그렇지만 선생들과 주위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어요. 하은이만 쓰레기가 돼버린 거였죠. 아무한테나 몸을 대주는 창녀,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문제는 하은이가 상당히 여린 아이였단 거죠. 우리가 그 녀석을 멀리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에요.
하은이가 자살한 그때부터.
아- 예. 걔 맞아요. 사진은 또 어디서 구했어요?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이쁘게 생겼죠? 그 뒷얘기요? 계속해야 돼요? 아- 그만하자고요. 더 들어서 어디에 쓸 건데요. 진짜... 하.
성하 그놈, 장례식장에도 안 왔어요. 오지 못하는 것 까진 이해할 수 있었죠. 씨발. 하은이 부모님한테 맞아 죽을게 뻔한데 미쳤다고 오겠어요? 그러고도 기자 맞아요? 여튼간에 우리는 그 녀석이 최소한의 죄책감을 가지길 바랬어요. 죄책감? 개나 주라 그래요. 그 새끼 하은이 죽고도 여행 다니고 여자 만나고 다녔어요.
우린 그 녀석을 왕따 시키기로 마음먹었죠. 아- 그래요 그래. 우리가 뉴스에 나온 게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좀 도가 지나친 것도 있었어요. 처음엔 가볍게 시작했던 게 점점 일이 커졌으니까요. 심하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멈출 수 없이 굴러가고 있었어요. 남자 녀석들의 집단 린치는 날이 갈수록 거칠어져 갔죠. 멈추는 건 불가능했어요. 멈춘 순간 이미 녀석은 병신이 되어 있었으니까.
뉴스엔 이렇게 나왔죠. 교내 왕따 사건으로 인한 학생 한 명 중태. 우리들은 쓰레기가 된 거죠. 뭐-. 이제 와서 보면 틀린 것도 아니겠지만. 씨발. 저기요? 기자 아저씨. 그쪽도 우리들만 나쁘다고 생각해요? 그렇죠? 우리들만 죄를 지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죠?
어째서 오리들만 나쁘다고만 생각해요? 백조가 씨발놈일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요? 우리말이죠-. 그러니까 오리에요 씨팔. 이쁜 백조 괴롭힌 오리.
개쓰레기 같은 백조를 왕따 시킨 멍청한 오리. 단지 그것뿐인 이야기예요.
씨발. 저 갈게요. 다시 찾아오지 마세요. 이 얘기 더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아 그리고 얘기 값으로 사식 좀 넣어주고 가요. 맛있는 걸로.
오색찬란한 눈이 부신 세상- 눈이 부시다 못해 아프기까지 한 화려한 색상들. 그 속에 걸어가는 사람들,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머리. 똑같은 행동을 하며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특이하지만 그 누구도 특이하지 않다. 평범하지만 그 누구도 평범하지 않다. 세상은 똑같이-. 하나같이 똑같은 얼굴과 모습들로 세상을 얘기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 이 세상은 너무나도 평등해. 아름다운 세상이야'
지랄하지 마! 거짓말하지 마!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며 똑같은 말을 내뱉는 듯 하지만,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 아무도 특별하지 않다. 내가 누구인지, 남이 누구인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죽어도 나와 같은 사람은 내 바로 옆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사람이 죽어도 또 똑같은 사람이 그 옆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무도 특별하지 않다. 아무도 중요하지 않다. 내가 나임으로써 존재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나라는 존재의 존귀함은 만인이 똑같음에 하나의 평범한 물체로 전락한다. 그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똑같은 모양의 자갈들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한다. 난 특별해- 난 존엄한 존재야. 아무도 날 대신할 수 없어.
'웃기지 마. 넌 나와 똑같고, 난 너와 똑같다. 아무도 특별하지 않으며, 아무도 평범하지 않다. 내가 너이고 넌 나이며, 우리는 나이고 너는 우리다.'
똑같다. 하지만 다르다? 개 짖는 소리다. 이 세상은 미쳤다. 개인이 가져야 할 특별함은 무시당한다. 부정당한다. 모난 돌은 깨지고 부수어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버린다. 세상은 말한다. 평범한 게 좋은 거다. 모두가 똑같은 세상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아무도 무시당하지 않고 그 누구도 우상이 되지 않는다. 모두가 우상이 될 수 있고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의심하지 마라. 세상은 평화로워졌다. 부정하지 마라. 모두가 똑같아짐으로써 싸움은 없어졌다. 믿어라. 우리는 모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긋지긋한 슬로건. TV에서 나오는 광고. 잡지에 쓰여있는 문구. 모두는 그렇게 세뇌되어가고 특별하지 않은 것이 특별한 것이라 여기며. 모두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리를 걸어간다. 속도를 맞추어 똑같은 걸음걸이로 똑같은 보폭으로 대열을 맞추고. 흐트러지지 않는 군중. 광장에는 모두가 똑같이 걸어나간다. 아무도 질서를 어기지 않고, 그럼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법과, 그럼으로써 안전한 세상. 더 이상 범죄도 없다. 더 이상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도 없다. 더 이상 테러의 공포에 두려워할 일도 없다.
모두는 생각한다. 우리는 생각한다. '나들'은 생각한다. 난 특별해 하지만 특별하지 않아. 난 너와 달라. 하지만 넌 나야. 이 평등한 세상, 아무도 특별하지 않은 세상을 부수고 싶다. 하지만 이 안전함을- 이 평등함을 포기할 순 없다. 난 특별하며 평범하다. 그럼으로써 존재하는 나의 모든 평화. 안정감. 한 가지를 포기함으로써 한 가지를 얻는다. 테러도 없다. 공포도 없다. 슬픔도 없다. 행복도 없다. 즐거움도 없다.
평등한 세상. 아~아름다운 세상. 모두가 똑같은 아~아름다운 세상. 빌어 처먹을 아름다운 세상!
"사실 가장 간단한 행위죠, 안 그래요?"
그는 베실 베실 웃으며 그렇게 되물었다. 난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래요 그거, 대답하기 어려운 상황, 혹은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 껄끄러운 상대, 그것들에 대해서 가장 간단한 행위를 지금 하셨네요, 도피. 예, 바로 그거요"
그는 신나 보였다. 손에 들고 있는 차키를 검지 손가락으로 빙빙-, 시선이 쫓아가질 못한다. 그는 내가 차키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자 재빠르게 열쇠를 멈춰 손에 쥐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손을 뻗어 열쇠를 흔든다.
"두 가지의 선택이 있어요, 어떤 게 좋겠어요?"
그는 뻗었던 손을 거둬들여 열쇠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의 빨간 후드티가 흔들흔들, 아스팔트의 아지랑이처럼 흔들흔들거렸다. 난 빨리 결정할 필요를 느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원하는 걸 말해"
일을 치르는 동안 막혀있던 목구멍에선 쇠 긁는 소리가 나왔다. 목을 간질거리는 통에 기침을 몇 번 했다. 그는 그제야 마음에 드는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짓고 있던 미소가 인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그는 손가락 하나를 펴 앞으로 내민 채 입을 열었다.
"첫째. 돈이 있다면 돈을 더 낸다. 그럼 저는 아저씨를 안전하게 원하는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린다"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펼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둘째. 돈이 없으면 저건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요령껏 토막 내어 버리고 나를 따라온다. 단, 저걸 토막 내는 일에 나는 일체의 도움은 주지 않는다. 자~ 선택하시죠?"
나는 그가 가리키는 저것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덜 닫힌 골프 케이스에서 사람의 손이 하나 삐쭉 뻗어 나와있다. 내가 죽인 아내가. 나는 복잡해오는 머리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돈을 더 주지"
그는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래-, 좋은 선택이에요. 도망가는 일은 전문가에 맡기셔야죠, 뭐~ 아저씨도 저걸 토막 내는 선택에선 도망치긴 하셨네요. 간단한 행위라니까요-"
전 해피엔딩이 싫습니다. 온갖 역경을 겪은 주인공이 행복을 쟁취하는 그 과정이 역겹습니다. 그들은 선해야 하고 정의로우며 용기 있는 인물입니다. 그에 비해 저는 어떤가요? 악하고 비열하며 겁쟁이인 저는 말이죠. 그들의 입장에선 악당일까요? 악당이어야만 하는 거 아닐까요? 그들의 성공가도에, 혹은 인생 역경 스토리에 있어서 저는 한낱 넘어야 할 장애물이 되어야만 하는 거 아닐까요? 비단, 저만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겁니다. 모든 사람들은 상위 몇 프로, 저들만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들이 아닌걸요. 결국 전 그들에게 있어서 패배하고 좌절하는 악당이 되는 거겠죠. 저는 결국 그들의 손에 짓밟히고 제 욕심은 뭉개지며 다른 이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저는. 그러면 저는, 저의 인생의 결말은 배드 엔딩으로 끝마치게 되는 걸까요? 자신의 인생이라면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그런 결말 말입니다. 전 정말 해피엔딩이 싫습니다.
깊은 밤, 달에 기대어 헛소리를 지껄여본다. 난 너에게 참으로 별 볼일 없는 남자였다. 별처럼 반짝이는 너의 미소에 비해 난 그늘진 어둠과 가까웠다. 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에도 그 잘나디 잘난 자존심만 세워가며 너의 미소를 어둡게 만들었다. 그렇게 너와 나 사이에 어둠만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밤하늘 밝게 점멸하던 너의 빛이 하나씩 꺼져가고. 깊은 밤 우리 사이엔 별 볼일 없는 검은 하늘만 남았다.
그녀는 미혼모다. 아니 미혼모였다. 열일곱 살 무렵 달콤한 사랑을 알게 해 준 남성은, 그녀가 둘만의 결실을 맺자 쓰디쓴 이별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그가 남기고 간 슬픔을 안고 배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 당시도 눈물이 멈추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그녀는 아이를 낳았고 자신과 웃는 모습이 닮은, 볼이 퉁퉁한 딸을 낳았다. 아이는 그녀에게 있어서 삶에 있어 불행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준 존재였다. 아이는 두 팔이 없는 채로 태어났다. 그녀는 슬픔을 어찌할지 몰랐다. 그럼에도 엄마이기에 한 아이의 유일한 가족이기에 삶을 살아야 했다. 아이는 그녀의 슬픔과 반비례하듯 밝은 아이로 자라났다. 벚꽃과 녹음과 낙엽과 흰 눈이 몇 번을 반복했다.
인생은 아이러니라 할까, 그녀의 인생은 아이로 인해 가장 밝았으며 그로 인해 벌어진 일로, 그녀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신은 그녀에게 행복을 주려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모든 것인 아이가 죽었다. 음주운전 뺑소니, 그녀는 모든 절망을 쏟아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흘린 눈물이 거대한 호수가 되어 그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흘렸다.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눈물이 멈춘 건, 죽은 아이가 남긴 일기장을 발견한 뒤였다.
삐뚤빼뚤한 그 글씨로 쓰인 글들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절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쓰인 그 문장에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기로 다짐했다. '엄마 울지 마요' 남몰래 눈물 흘렸던 것들을 아이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의 바람대로 슬픔을 묻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병원이고 보육원이고 자신이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지, 어디든지. 몇 년이 지났을까 그녀에게 한 여성이 찾아왔다. 빼빼 마른 몸에 밥은 언제 먹었는지 모를 푹 패인 두 뺨. 여성은 메마른 입술을 움직여 말을 걸었다. 우리 아이를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는 여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의 집에 도착해, 여성의 아이가 있는 문 앞에 섰다. 여성에게 들은 몇 가지의 주의사항과 이야기들을 머리 속에 상기하며 문을 열었다. 언제 환기했는지 모를 방안, 덩그러니 놓인 침대. 그 안에 간혹 경련하듯 몸을 떠는 남성이 잠든 것처럼 누워있다. 그녀는 문에서 들어서지 않고 남성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몸의 움직임, 그의 숨소리, 이불의 들썩거림. 그녀는 그동안 보아왔던 경험으로 그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았다.
조용히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게 됐어요, 피곤한 게 좀 풀리시면 말씀해 주세요"
그리곤 가져온 책을 펼쳤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선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남성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남성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삶을 견디는 원동력이었다. 마음을 닫은 그들이 조금씩 마음을 여는 그 행동, 그것은 그녀에게도 힘이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이었다.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 가능하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쑥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이 생각은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 자유를 옭아매는 모든 것들에 분노하고 있었다.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을진대, 저들은 왜 뛰고 움직이며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난 왜 걷지 못하며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며, 내 의지로는 이 좁은 방안에서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그들과 내가 무엇이 그리 다르게 태어났길래 나에겐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주어지지 않았나.
내 몸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다. 빌어먹을 몸뚱이는 언제나 내 정신의 영역 밖에서 날 놀리듯이 뒤틀리고 흔들릴 뿐이었다. 간신히 그놈의 신경줄기를 붙잡고 안간힘을 써야 내 의견을 들어줄 뿐이었다. 그나마 모든 사지육신 중에서 제일 의견을 피력하기 쉬운 오른손을 움직여 레버를 움직였다. 침대는 레버의 움직임에 따라 덜덜 떨리다가 다시 내려간 뒤에 기어코 다시 올라왔다. 빌어먹을 사지육신, 내 의견을 한 번에 들어준 적이 없다.
창 밖은 비가 내리고 있다. 후두둑하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빗 무리가 있는가 하면, 창안의 날 향해 타다닥하며 달려드는 녀석도 있었다. 마치 내가 도망가거나 피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날 향해 달려드는 녀석들을 향해 욕지기라도 내뱉어주고 싶었지만, 글쎄 내 어눌한 말을 녀석들이 알아들을까 싶어 그만두었다. 한참을 그렇게 떨어지는, 혹은 달려드는 빗방울을 보던 즈음 방 문이 열렸다.
"자니?"
엄마는 항상 그렇게 물었다. 언제나 어느 시간대나 어느 때고. 내가 자는 것 외에는 그다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지 "안 자는구나"하고 말을 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고개를 돌리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내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새 도우미 아줌마가 올 거야, 처음 일하시는 분이니까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줘, 알았지?"
난 또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대답을 하던 하지 않던 그 사람이 필요할 텐데. 나의 반응을 살피던 엄마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도우미라는 분들은 기계와 같았다. 날 위해 움직이는 로봇과 같은, 날 씻기고 밥 먹여주고 앉히고 심지어 대소변도. 그건 참 치욕적인 일이지만 별 수 있나. 이 빌어먹을 몸뚱이가 파업을 멈추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또 나 혼자만의 지루한 몸뚱이와의 대립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나마 말 잘 듣던 녀석이 오늘따라 유난히 말을 안 듣는다. 빌어먹을 자식, 간신히 침대를 눕히고 눈을 감았다. 말 안 듣는 녀석들을 집중해 움직인다는 건 꽤나 정신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노사관계가 이리도 원활하지 않아서야, 항상 투쟁 현장에 있는 기분이다. 도우미가 오기 전까지는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그래야 치욕적인 상황에서 내 의견을 조금이나마 피력할 수 있으니(몸이 피로하면 더욱 말을 안 들으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눈꺼풀이 세상과의 단절을 고하려 할 때쯤 다시 문이 열렸다. 나는 자못 궁금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차피 난 그들의 일거리이니, 그들이 날 달가워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고, 난 그들의 기계 같음이 달갑지 않았다. 날 대하는 그 태도들의 기저에 깔려있는 연민도 싫었다. 그들의 연민과 차가운 태도들은 날 더욱 가라앉게 만들었다. 도우미 아줌마는 잠시 문 앞에 선 채로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내 등을 살피고 있을까. 엄마처럼 '자니?'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이라고 단정 짖고 있는 것일까.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내 옆의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곤 가벼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게 됐어요, 피곤한 게 좀 풀리시면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옆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빗방울 소리와 함께 적막한 방안을 가득 채웠다. 난 슬쩍 고개를 돌리려 했다. 물론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삐걱거리며 덜덜거리며 돌아갔다. 그녀는 조금은 퉁퉁한 외모에, 인상 좋은 아줌마라고 보기엔 조금은 어린 여성이었다. 30대 초반은 되었을까. 그녀는 내가 얼굴을 돌린 것을 보고는 살짝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난 되도록이며 입을 열고 싶지 않았지만 어눌한 입을 놀려 인사했다. 그녀는 내 어눌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주로 그녀는 자신이 재잘거리는 편이었지만, 틈틈이 나에게 불편한 것이 있는지 혹은 자신의 얘기에 질문은 없는지 물어왔다. 여태껏 많은 도우미들의 행동과 너무도 다른 그녀의 행동에 난 잠깐 멍하니 있어야만 했다. 그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이 이 일이 처음이니 실수가 있어도 조금만 이해해달라는 등의 말을 이어나갔다. 난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말하는 것도 불편했다. 그게 실질적인 움직임에 따른 것이 아니라, 내 얘기를 듣는 그들의 행동에서 기인한 불편함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어떤 얘기를 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다들 인상을 찡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찌하면 최대한 말을 안 섞을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난 그런 반응에 말을 더욱 하지 않았다. 그들과 나 모두에게 고통이며 상처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나의 말을 계속해서 들어주었다. 조용히 내가 말이 끝날 때까지 웃으며 말을 듣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난 오랜만에 느끼는, 심지어 가족과도 느껴본 적이 없던 수다라는 행위의 안도감에 빠져가고 있었다. 그녀가 실질적인 도우미 활동을 한 거라곤 내 몸을 몇 번 뒤척인 것과 대소변 통(난 개인적으로 이걸 인격 말살의 쓰레기통이라 부른다)을 정리해 준 것 밖에 없었지만. 난 요 몇 년간 처음 느껴본 사람대 사람의 대화라는 것에 매우 충실한 충족감을 얻어냈다.
그녀가 돌아간 그 순간부터 나는 그녀와의 대화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분노의 원천이 사람과의 단절이자 나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발로된 것임을 깨닫게 했다. 여전히 창 밖의 비는 나에게 몰아치듯 창을 두들기곤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열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날이 밝았다. 그녀는 꽤나 이른 시간부터(라고는 하지만 그녀에겐 점심쯤인 시간부터) 나에게 밥을 먹여주고 또다시 재잘거리며 이야길 이어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잘 이어지지 않는 말을 되뇌어가며 혼자 말하기를 몇 년이었나. 그런 나에게 있어서 그녀와의 대화는 지성체끼리의 의견 나눔의 장이니 기분이 들뜰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가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난 그녀가 내 이야기가 지루한가 싶어 덜컥 두려움이 피어났다. 모처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생겼나 싶었더니, 그녀 또한 날 지루해하고 불편해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은 의외의 것이었다.
"글을 써보는 건 어때요?"
나는 그 말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이윽고 이어진 그녀의 말들 속에서 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무언가를 권한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날 낳아놓은 부모님마저 나에게 바라는 건 그저 살아 숨 쉬는 것뿐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남들과 같이, 남들처럼 무언가를 권한 것에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그녀의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물음이 나에겐 크나큰 충격의 격류가 되어 날 적셨다.
그동안 느껴본 적 없던, 메말라가던 내 삶에 대한 의지에 단비와 같았다. 나도 무언가 꽃 피울 수 있는 사람일까. 평생 누군가에게 피해만 끼치고 먹구름이었던 나도. 식물과 다를 바 없는 삶에서 나도 무언갈 할 수 있을까. 이런 빌어먹을 몸뚱이로도 무언갈 할 수 있을까.
"어때요?"
난 그녀의 물음에 삐걱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옆에서 흙먼지가 비산 했다. 튀어나오는 돌멩이들이 철모를 두들겼다. 삐-하는 이명과 함께 넋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총을 꽉 쥐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참호를 따라 이동한다. 죽을 것만 같이 빨리 뛰던 심장 소리가 삐-하는 이명과 같이 들려온다. 몸 전체가 맥박질 하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더 가까이 그리고 다시 멀리, 쾅쾅하는 우레와 같은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 비명소리 계속해서 이어지는 총소리.
참호를 따라 시체들이 빨랫줄마냥 걸려있다. 넝마주이가 된 몸뚱이는 이리 접히고 저리 꺾여서 표지판마냥 걸려있다. 위험하다, 이곳은 위험하다.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저기 걸려있는 저 녀석은 어젯밤 술기운에 취해 춤을 추던 녀석이다. 이름도 모르고 어떤 녀석인지도 잘 모르지만, 그는 이제 어젯밤 추었던 괴상한 몸짓마냥 멈추어있다. 나는 그를 밟고 넘어가 자리를 이동한다. 그의 핏덩이가 군화에 들러붙었는지 찌걱 거린다.
나는 반쯤은 반파된 건물에 들어섰다. 숨을 최대한 참고 천천히 조심스레 위로 이동한다.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이미 부서졌다. 난 3층 계단 벽에 살짝 기대어 앉았다. 우리는 누굴 위해 싸우는 것인가. 잠시 쓸데없는 고민을 한다. 삐-하던 귀의 이명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맥박질 치던 심장도 조금은 조용해졌다. 참아왔던 숨소리를 조금 내쉬려던 순간.
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총을 꽉 쥐었다. 3층 창가, 그 소리는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는 듯했다. 나는 숨을 최대한 죽이고 창가로 천천히 향했다. 덜컹하는 소리를 낸 적군은 창가에 몸을 기댄 채 아군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난 적군을 향해 소리쳤다. 적군은 어깨를 들썩거리더니 몸을 천천히 돌린다. 난 총구를 까딱였다. 적군은 들고 있던 총을 땅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소년병인가, 너무도 앳된 그의 얼굴엔 눈물 자국이 생겨있다. 난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소년병이 뭐라 소리친다. 어느 나라 말인지 잠시 고민하다 생각을 접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소년병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눈물이 턱을 타고 땅에 떨어진다. 난 총을 그의 얼굴에 겨눴다.
탕-하는 소리와 퍽- 하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리고, 쿵하는 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뜨뜻미지근한 피가 얼굴에 튀었다. 난 소년병의 것이었을 피를 대충 닦아냈다. 죄책감이나 슬픔 따위는 없었다. 앳된 소년병의 죽음이 불러오는 그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지금, 여기, 이 곳은 그런 장소였다. 난 소년병이 섰던 창가에 기대어 다른 적군을 겨눴다.
"신은 악이오"
"신은 선입니다"
"신은 자신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어린아이의 횡포에 불과하오. 자신의 피조물들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잔인하게 내치는 것이 어째서 선이오? 그것은 혹은 그들은 단지 악이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신이 있다면 말이오"
"신은 자신을 믿지 않는 자를 벌하시는 게 아닙니다. 자신을 믿어 회개하게 하시고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것에 그분의 뜻이 있는 겁니다. 그분은 언제나 세상을 굽어살피시는 거지요. 다른 악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믿으라 하시는 겁니다"
"당신이 말했던 것 중에 하나. 신은 전지전능하다 하였소. 어째서 전지전능한 신이 사람의 마음 하나를 조종하지 못하는 것이요? 성경에 따르면 흙으로 빚어지고 자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존재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 아니겠소? 우리는 그럼 그의 인형놀이에서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가 되는 거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이오? 의지라는 실이 없으면 그는 우리에게 어떠한 힘도 행사할 수 없는 것이오? 대답해보시오. 그는 전지전능합니까?"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무신론자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신부를 노려보았다. 신부는 잠시 생각을 골똘히 정리하는가 싶더니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신의 피조물입니다. 허나 피조물이기 이전에 그의 형상을 본떠 만든 작은 '자신'이지요. 신은 우리가 자신의 자식이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을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는 신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단지 피조물이 아니지요. 당신은 자신의 자식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까?"
"흥-. 말도 안 되는 개소리군. 그럼 어째서 전지전능하다는 거지? 애초에 만들 때 자신의 의지에 거스르지 않게 만들면 되지 않는 건가?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와 뱀의 이야기. 하-. 어린아이에게 총을 쥐어주었나? 뭐가 다른 거지? 애초에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면 만들지 않았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 우리 인간은 그의 자식이라고 쳐봅시다. 그럼 그 뱀은? 뱀은 무슨 존재지? 신의 존재에 반하는 다른 세력인가? 아니면 신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인가? 자신의 말을 거역하고 거짓말하여 자신의 자식을 위험에 처하게 하도록? 자신의 아이들을 위험에 빠트리려고? 자-. 뱀은 뭐지? 당신들이 그리 말하는 성경에서 우리는 자식, 뱀은 뭘까? 자식도 아니면서 신의 의지에 반하는 그 존재에 대해서 설명해주시오"
"단지 성경에 나온 내용을, 그 내용 그대로 받아들이시는군요. 책에 나온 표현은 비유 같은 겁니다. 뱀은 인간에게 있는 기본적인 욕망, 탐욕, 질투 같은 것들이죠. 그것을 비유한 겁니다. 그렇다면 선악과는 우리의-"
"흥-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더니. 그건 단지 너희들의 해석일 뿐 아닌가?"
"그렇지요. 어찌 저희가 신의 말씀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무신론자의 코웃음이 더욱 커졌다. 그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탁자를 내리치며 몸을 앞으로 내민다. 콰아앙- 하는 탁자 친 소리가 방을 울린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가르치다니 흥-. 너희 신부들, 혹은 신자들은 항상 신을 믿으시오. 신을 믿으면 천국 갑니다. 혹은 다른 신을 깔아뭉개지. 지옥에 갑니다! 유황불에 떨어져 죽지도 못하고 되살아나 고통을 받게 됩니다! 하-. 정말 판타지 소설도 이런 대작 판타지 소설이 따로 없구만. 아주 영화로 만들면 블록버스터일 거요? 당신들 신자는 자신들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내용을 가지고,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설파하지. 항상.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내용을 왜곡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또 그것을 배운 사람들이 또다시 왜곡하고. 결국 너희들이 말하는 신의 말씀이란 결국 2천 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너희들이 지어낸 말 뿐이다- 이거요. 권력층에서 범죄를 저지르기 좋게 말이야"
다시 숨을 고른다. 후욱-후욱-하는 거친 숨소리가 내뿜어진다.
"예전부터 권력층은 종교란 걸 이용해서 나라를 다스렸지. 웬 줄 아오? 우매한 백성들을 다스리기엔 그것보다 좋은 게 없었거든. 언제나 왕의 뒤편에선 백성들을 좌지우지하는 신관 녀석들이 잇었지. 그렇게 올라가기 위해서 멍청한 국민 놈들을 구슬리는 거지. 십일조를 내시오. 그래야 천국 갑니다. 면죄부를 팝니다. 이것만 있으면 어떤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용서가 됩니다!! 그딴 식으로 말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신을 믿는 우리는, 신을 믿는 우리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각종 활동을 해왔습니다. 불우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후진국들에게 복지를 하며,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 십자군부터 시작해서 강간, 세금 탈세, 폭력, 강도질. 그것들이 너희들이 하는 행동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단지 일부일 뿐입니다!"
"그 일부도 너희인 거다"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하면 안 되는 것이요!"
"그 일부가 모여 너희들이 되는 것이지"
탁-.
신자는 책을 덮었다. 거울 속 격양된 자신을 바라본다. 잔뜩 거칠어진 얼굴의 '그'가 자신을 쳐다본다. 책장 속 언젠가 챙겨두었던 칼을 꺼내 들었다. 달빛이 스며들어 반짝거린다. 신자는 자신과의 토론에서 이길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신에 대한 신념은 굽힐 수 없었다.
"그래도 신은 선이요."
차악-하는 소리와 함께 손목이 그어진다. 피가 흘러내린다.
"그래도 신은 선이요...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