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에 해당되는 글 173건

  1. 2018.06.07 사랑.
  2. 2018.06.07 망상.
  3. 2018.06.07 죽음.
  4. 2018.06.07 손해.
  5. 2018.06.06 어쩌다 보니.
  6. 2018.06.06 편지.
  7. 2018.06.06 하루.
  8. 2018.06.06 기다림.
  9. 2018.06.06 거짓말.
  10. 2018.06.06 후회.

'신은 너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말을 제일 엿같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날 사랑한다면, 정말로 그렇다면 그는 지독한 사디스트이거나 정신이상자, 혹은 사이코패스일 것이다. 남의 불행을 즐기며 관음하며 사랑한다 말하는 미친 새끼. 그런 싸이코 새끼가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니, 온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돋을 지경이다. 하다못해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좀 괜찮았을까? 신이 말한 그 사랑은 분명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사랑이라고 보기 힘든 그런 것일 거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버림받았고,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해 사회의 낙오자, 카스트 제도의 제일 아래 불가축 천민처럼 살아왔다. 다른 이들에겐 동물보다 못한 존재로 그렇게. 물론 지금 시대엔 신분제가 없지만 분명 그것이 존재했다. 과거와 다른 게 있다면 지금은 단순히 돈, 돈 하나로 신분이 구분되었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하다못해 교육도 못 받은 나 같은 존재는, 언제나 돈으로 이루어진 카스트 제도를 떠받치기 위해 존재하는 볼품없는 돌멩이 하나에 불과할 것이었다.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불공평하다. 그리고 신은 정당하지 않다. 그리고 또, 신은 적어도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아닌 것이다. 일용직으로 살아온 지 십여 년, 서른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변변한 삶을 꾸리기엔 인생은 치열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버텨나가는 것이었다. 매일 일이 끝나면 술잔으로 삶에서 도피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자주 가는 포장마차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에 술이 차올랐다. 넘칠 듯 말 듯 가득 찬 술잔의 술 몇 방울이 잔을 따라 테이블로 흘러내렸다. 바닥에 물방울무늬를 만든다. 술잔에 담긴 술들이 그의 사랑이라면, 넘쳐흐르는 건 나에 대한 사랑인 걸까. 다른 이들에게 그득그득 채워준 이후에나 한 방울.

그렇게 목마른 이가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될 한 방울. 결국은 흘러넘친 그 한 방울을 위해 인간들은 싸움을 벌인 것일 테지. 몇몇의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넘치게 주어진 그 사랑을, 땅으로 떨어져 결국엔 없어질 그 한 방울을 위해. 신이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한마디에 현혹된 채. 정말 그가 우리를, 아니 나를 사랑한다면 적어도 저 높은 곳에 사는 그들의 절반만이라도, 아니 아주 작은 10분의 1도 안 되는 그 정도의 사랑만 주었어도. 그렇다고만 해도 난 그를 원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신? 좆까는 소리. 결국은 저들이 우리를 부려먹기 위한 아주 얕은 수작일 뿐. 가득 담긴 술을 들이켰다. 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유난히도 술기운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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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1월 17일 14시. 여기는 지하매장. 수많은 사람들 중, 빨간 점퍼를 입은 남자와 노란 머리의 여자 커플이 의심스럽다. 벌써 세 번째 내 시야에 들어왔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수첩에 글씨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가끔 흘기듯이 나를 살피고 진열대 뒤로 몸을 숨긴다. 하지만 난 알 수 있다. 그들이 의심스럽다.]

[1월 17일 19시. 벌써 해가 저물고 있다. 아까의 커플은 교대한 건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에 불이 켜진다. 주변에 많은 사람이 보이지만 딱히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다.]

[1월 19일 9시. 그들은 어딜 가나 항상 내 시야에 있다. 왼쪽- 그러니까 전방 11시 방향.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 눈이 마주치자 시계를 확인한다. 그렇게 행동해도 내 눈을 피할 수는 없다. 오늘은 조심스레 그들을 미행해보기로 한다.]

[1월 19일 12시. 그들을 놓쳤다. 녀석들은 용의주도하게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도망쳤다. 없어졌다. 아쉬운 마음을 참고 길을 되돌아간다. 아마 오늘은 더 이상의 미행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모르는 거겠지만...]

[1월 22일 15시. 오늘은 조금 늦게 집을 나섰다. 아무도 주변에 없지만 난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다. 오른쪽 상호 빌라 3층, 거기서 비추는 미세한 불빛. 몇 년간의 미행 탓인지 난 그걸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최대한 의심 사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 내가 그들을 발견했다는 걸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1월 22일 21시. 한 명이 아니다. 도망가야 한다. 걸린 것 같다.]

[1월 22일 21시 30분. 쫓아오고 있다.]

[하아... 1월 하아- 22일 22시. 여기는 하나아파트 지하. 하아- 넘버 7201 차 뒤에 몸을 숨겼다. 녀석이 날 놓쳤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아직 숨어 있어야겠다.]

[1월 22일 23시. 개 같은 새끼들. 내가 그 새끼들의 수법을 몰랐더라면 지금 난 죽었을 거다. 치밀한 새끼들. 흔적을 지워두고 사라졌다.]

[2월 1일. 시간은... 모르겠다. 며칠째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2월 9일. 녀석들이 밖에 있다. 나갈 수가 없다.]

[2월... 며칠이지? 경찰들은 내 전화를 무시한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나?]

[밖에 분명 녀석들이 있었다. 내가 나가는걸 눈치채자마자 귀신같이 사라졌다. 쥐새끼들...]

[나가면 녀석들이 분명 다시 날 뒤쫓을 거다. 하지만 나가지 않을 수 없다.]

[빨간 점퍼가 수상하다.]

[쫓아갔으나 잡을 수 없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분명히. ]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분명히...]

[난 미치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누군가... 아니다.]

[...]

[......]

[이젠 네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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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나는 죽었다"

감흥이 없다.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는다. 내가 죽었다. 난 죽었다. 아무리 말해봐도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고, 숨 쉬고-.

난 살아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심장이 멈췄다고 할 수는 있었지만, 죽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는 살아있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며 중얼거린다. 그래- 난 살아있다. 아무리 해도 실감은 나지 않지만 난 살아있다. 심장도 뛰지 않고,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가고, 몇 시간이 지났는지 어느새 몸 곳곳에 시반이 퍼지고 있지마는. 그렇지마는 나는 살아있다. 이렇게 움직일 수 있다. 관절이 뻑뻑하고 곧 부서질 것만 같지만 살아있다. 피부가 찢기어져 메말라버린 근육이 드러날 것만 같지마는 나는 살아있다. 나는 창백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시체다"

쿠웅- 하는 느낌과 함께, 그제야 나의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쿵쿵쿵쿵하고 내 처지가 실감이 됐다. 나는 시체다. 나는 죽었다고 볼 수는 없지마는 시체라곤 볼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좀비-. 미국 드라마에서나 혹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그러한 좀비. 나는 시체다. 키키킥-하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긁적거린다. 찌지지직-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손톱 끝에 피부 조각이 찢겨 나온다. 손톱 끝에서 아무렇게나 찢긴 피부- 그리고 그 위로 뻗어진 머리카락. 왠지 모르게 더 웃음이 터져 나온다. 뭐 이런 코미디가 다 있어! 하고 소리 내어 말해본다. 손톱 끝에 걸린 기분 나쁜 피부 조각을 옷에 쓱쓱 문질러 닦는다. 청바지 위에 검게 죽은 핏자국이 붓칠 한 것 마냥 새겨진다. 나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하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딱히 그렇게 확 티가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뭐. 될 수 있는 만큼 살아보지 뭐-하고 속 편히 생각했다. 이미 썩어 문드러져가는 몸뚱이다. 방부처리를 해도 늦겠지. 그 증거로 소매를 걷은 팔 안쪽은 이미 모두 썩어 들어갔다.

침대 한쪽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핸드폰을 집어 든다. 날짜를 보니 내가 '죽어있던' 시간은 5일. 꽤나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핸드폰에는 미확인 문자 2통이 남겨져 있다. 잠금화면을 열고 메시지부터 확인한다.

[ 오늘 밤 재워주실래요? 010-1234-5678]

지랄하네. 아-? 가볼까.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식겁하겠지? 피식-하고 웃음이 흘러나온다. 되지도 않는 생각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 새끼들은 내가 '죽어있던' 걸 알고 이런 문자를 보냈으려나. 뭐- 알 턱이 없지. 병신들. 다음 문자는-

[야- 술 먹자-]

아-이 병신. 또 술먹쟤. 꺼져라 씨뱅아. 분명 술 처먹으면서 돈이나 꿔달라고 하겠지. 시벌놈이 돈 빌려달라고 할 거면 술값은 지가 내던지. 개 같은 놈. 모든 연락을 확인하고 나서는 가만히 앉아있다. 뭐 할 게 없다. 진짜 인간관계 좁구나. 5일 동안 연락 온건 빌어먹을 빈대 새끼 하나랑, 스팸전화 하나. 괜히 씁쓸하다. 문을 열자 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밖에나 나가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방 한쪽 구석에 걸려있던 모자를 집어 든다. 마스크 대신 목도리를 하나 찾아 목에 두른다. 방문을 열고 밖을 나서자 살을 메마르게 하는 햇빛이 쏟아져내린다. 피부가 더 빨리 썩어 들어가지는 않겠지? 잠시 걱정하다가,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걸 보고는 그냥 밖으로 나섰다.

약간은 시야가 흐릿하게 보이는 세상. 이나마도 감사해야 할까. 점점 몸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몸이 완전히 멈춰버리기 전에 어딜가야할까. 몸이 죽어버리기 전에 어딜가야할까. 완전히 죽어버리기 전에.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움직인다. 모르겠다. 받아주실까. 얼마 만에 찾아가는 거지?

수많은 고민을 하며 걸음을 옮긴다. 썩어가는 몸뚱이에선 이상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는지 슬슬 사람들이 나를 피한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마주 인상을 써준다. 그들의 표정이 기괴하게 바뀌어 얼른 눈을 피한다. 병신들-. 덤비지 마. 물어버릴 거야. 혹시 알아? 내가 물면 진짜 좀비처럼 전염될지도? 잠시 궁금했지만 안 하기로 한다. 고마운 줄 알아 시발. 전염은 안돼도 기분은 더럽겠지. 아니면 세균 감염이라도 될지도...

쓸데없는 생각.

때마침 버스정류장에 온 버스에 탑승하려 하지만 기사가 제지한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단호하게 내리게 한다. 아 시벌. 그냥 걸어서 가기로 한다. 사실 딱히 먼 거리도 아니고. 한 30분 걸으면 되려나.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발바닥이 찢기는 기분이 든다. 뭐-찢겼겠지. 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어느새 이 썩어버린 몸뚱이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발목이 뒤틀린 것도 같다. 뭐 어때. 아픈 것도 아닌데. 무릎이 점점 굳어가는 것만 같다. 뭐 어때. 어차피 지금도 사람들이 피하는데.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니 꼬마애 무리들이 물총 싸움을 하며 뛰어온다. 얼씨구- 좋을 때다. 조심해라 나처럼 되기 전에-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꼬마애 한 명이 나에게 몸을 부딪힌다. 뻐걱-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으며, 바닥에 뒹굴었다. 꼬마가 재빠르게 일어나 나를 쳐다보고는, 잔뜩 굳은 얼굴로 도망친다. 야-인마. 사람을 넘어트렸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 거야! 뭐 지금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킨다. 아아-시발.

왼쪽 무릎이 부서졌다. 아예 덜렁거린다.
...꼬마가 사과도 못 하고 도망갈 만도 하네. 으쌰-하고 몸을 일으킨다. 아예 못 걸을 정도는 아니다. 절뚝거리며 걸을 순 있겠지. 꼬마야 놀라게 해서 미안해. 도망가는 꼬마에게 손을 흔든다. 아아-걷는 게 조금 더 느려지려나. 천천히 가지 뭐-. 걸음을 옮긴다.

느리게 걷는 건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준다. 수많은 풍경- 느리게 스쳐 지나가는 길거리의 사물들. 절뚝거리며 걷는 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약간 흐리게 보인다는 단점 빼고는... 진작 왜 이런 풍경을 보고 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생긴다. 하긴- 그때야 게임에 미치고, 술에 미치고, 담배에 미치고. 주변을 볼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공원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공원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까악-까악-

울고 있는 저 까마귀들은 지나치게 많이 보인다. 그것은 마치 날 노리고 있는 행동 같았다. 잠깐-. 그런데 까마귀도 시체를 먹나?... 뭐-. 못 먹을 건 또 뭐야. 그렇게 생각하니 저것들이 진짜 나를 노리는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나는 녀석들에게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안돼 이 새끼들아. 아직은. 먹더라도 내가 아예 멈추고 먹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어느새 내가 가야 할 곳이 다가오고 있다. 벌써 눈 앞에 보인다. 붉은 담벼락. 푸른색 대문. 그 위로 솟아있는 동그란 호박 전등 두 개. 밤마다 노랗게 불빛이 들어오는 호박 전등. 저 밑에서 매일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엄마는 항상 늦은 시간에 나에게 줄 간식 봉투를 손에 들고, 내가 온 길을 통해서 걸어오셨다. 노란 전등 밑에서 난 엄마를 안고 엄마는 그런 나를 안고. 밀려드는 추억들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걸린다. 조심스레 문 앞에 다가가 벨을 누른다. 띠링-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아-, 어디 가셨나.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파란 대문 앞에 기대어 앉는다. 무릎을 당겨 얼굴을 파묻는다. 쩌걱쩌걱-하는 피부가 들러붙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울려 퍼진다.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빨리 흐른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주변을 살피고 있노라면 더욱 그렇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 용기도 없어서 그냥 지나가는 것들만 구경한다. 시야는 점점 흐려지고, 흐릿하게- 거멓게만 보인다. 가끔 뻐얼건 무언가가 왔다 갔다 한다.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다. 시발. 쳐다보지 마. 조용히 입 밖으로 내뱉는다. 땅거미가 지고 바닥에 빨간 노을이 내려앉는다. 빨간 노을은 검은 그림자를 만들고, 마치 자꾸 커져만 가는 거인처럼 자신을 늘린다. 그리고 저 멀리서 그 그림자의 주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아들?"

대답할 수가 없다. 목이 막힌다. 입이 메말랐다. 일어설 수 없다. 몸에 힘이 들어간다. 주먹을 움켜쥔다. 썩은 고름이 손바닥에 흘러내린다. 몸이 들썩거린다. 움직일 수 없다. 아니 움직이면 안 된다. 다가오지 마요. 엄마. 다가오지 마요. 다가오면 안 돼요. 엄마. 안돼요.

"아들... 맞지?"

...엄마! 엄마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잊을 수 없다. 언제나 따뜻하게 내 맘을 감싼다. 어느새 엄마는 내 앞에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안돼요 엄마. 안돼요. 말을 하고 싶지만 입을 열 수 없다. 입술이 찢어질 것 같다. 썩어버린 피부 조각이 뜯겨내릴 것 같다. 엄마가 잡은 어깨가 덜컥- 빠지는 느낌이 든다.

"아들 맞는 거지? 그렇지?"

엄마...!

일어서서 엄마를 끌어안는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 아마 엄마가 또 맛있는 간식을 사 오셨나 보다. 맛있는 간식을. 베어 물은 고깃 조각에서 피가 흐른다. 달콤하다.

"어... 마...?"

엄마도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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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우리의 관계가 서로에게 손해라는 생각이 든 시점에, 우리는 그렇게 이별했어야 했다. 지지부진한 관계는 끊임없는 하락장 속에서 파란 막대만 차트를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하락에 하락을 계속했기에 빨갛던, 정열적이던 사랑은 더 이상 우리에겐 없었다. 언제 매매를 던져야 할지 몰랐던 우리는 바닥을 향해 치달았다. 언젠가 우리의 사랑이 다시 반등하기를 기다리며.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시간은 오지 않았고, 우리의 거래는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해만 가져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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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오늘도 잠이 오질 않아 컴퓨터 앞에 앉는다. 나는 글쟁이, 혹은 폐인, 혹은 사회 부적응자, 불평불만 많은 아이, 염세주의자, 나에 대한 여러 가지 수식어들. 혹은 나를 정확히 표현한 단어들. 이 우울한 모습들을 들키기 싫어, 평상시엔 웃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마치 광대라도 된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행동하고.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홀로 앉아서 가면을 벗는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글을 쓴다는 걸 비밀로 하고, 오늘도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이렇게 신세한탄 섞인 글을 써 내려간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부끄러운 이야기. 그렇지만 누군가는 봐주었으면 하는 이야기.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이야기. 난 나를 방안에 가두고- 그렇게 조심스레 글을 쓴다. 친한 이들에게, 혹은 가족에게 밝힐 수 없는 나의 우울한 이야기들,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 어릴 적의 상처들. 그것들이 하나로 엮여 내 이야기의 재료가 되어간다. 모두가 들으면 기분 나빠할 그런 이야기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나의 뒷면. 나의 숨겨진 모습. 내 거짓말들. 어쩌다 보니 난 그렇게 내 거짓말들을 글로써 풀어나간다.

이 과정은 꽤나 재미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어서, 글을 써 내려갈수록 드러나는 내 본모습에 머리가 욱신거린다. 우울한 기분에 휩싸인다. 글 속에 드러난 내 본모습에 경멸한다. 속에만 담아두었던 온갖 추악한 찌꺼기. 내 진심, 내 본모습. 내 글의 찝찝한 이야기에 혼자 마음 쓰라린다. 불면증. 그것이 오기 시작한 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는지, 불면증이 와서 글을 쓰기 시작한 건지...

혹은 내가 잠들기 싫어서 글을 쓰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불면증이란 핑계를 대고 글을 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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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두근거리는 심장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글을 써봅니다. 저는 28살의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제가 쓸 이야기는 저와 저의 동거인의 이야기.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동거인이 남긴 편지를 올리는 거겠죠. 저의 동거인의 편지를요. 단지 특이한 점이라면, 편지를 쓴 사람은 귀신입니다.

혹은 원령, 또는 악령이라 불리는 그것. 그리고 전 그것과 동거합니다.

-----1월 17일, 토시오----

To. 이 집의 주인에게.

먼저 인사드립니다. 나는 토시오. 여러분들이 흔히 말하는 귀신. 혹은 원령. 또는 악령이라 불리는 그것입니다. 허나 분명 저에게도 이름은 있습니다. 그것은 토시오. 사실 이 이름은 제가 저에게 붙인 것입니다만. 몇 달 전 당신이 TV로 영화를 볼 때에, 전 저와 똑같이 생긴 귀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옆에서 같이 숨어서 보는데 얼마나 심장이 뛰던지요.(아 물론 전 심장이 있지도 않고 뛰지도 않습니다만) 전 거기서 나오는 귀신의 이름을 따서 저를 토시오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토시오. 토시오. 저의 파란 피부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지요. 저는 제 이름을 붙였습니다만, 절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제가 만나는 사람이라곤 이 집에 사는 당신과, 가끔 찾아오는 반장 아주머니 정도. 아- 신문배달부 한 명과 택배 아저씨들이 있겠네요. 당신은 다른 사람을 집에 부르는 편도 아니었고, 저 또한 그들에게 나서기는 힘들었습니다. 아 물론 당신에게도 절 내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름이 생기기 시작한 이후로부터는 욕심이 생기더란 말입니다. 저에겐 이름이 있고, 이렇게 생각도 할 수 있고 놀 수도 있는데, 그 누구도 저를 불러주진 않습니다. 저를 보아주지 않습니다. 예전 어느 누군가의 책에서(이건 제 생의 기억인지 사후의 기억인지는 애매합니다만) '사람은 이름 지어지고 불리움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당신들과는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는 있다지만. 전 아마 사람으로서 당신들과 마주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저에게 이 이름은 커다란 의미였지요.

아마 이 편지를 읽고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곧 제 존재를 드러내겠습니다. 부디 놀라지 마시고 저를 맞아주시길. 나는 토시오. 당신의 집에서 살고 있는 귀신, 혹은 원령 또는 악령이라 불리는 그것입니다.

From. 토시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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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첫 번째 편지를 받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악질적인 장난이라니! 어떤 도둑인지, 혹은 내 친구들의 장난인지, 며칠 전에 놀러 왔던 가족들의 장난인지는 확실치 않았습니다만 꽤나 악질적인 장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거겠지요? 누가 이런 이야기를 믿겠습니까? 귀신이라니? 그리고 이렇게 편지를 남기는 귀신이라니! 이 얼마나 웃기는 코미디 같은 상황인지! 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편지를 접어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습니다. 약간은 젖어있는 듯한 이 편지를 그때 의심했었야 했는데. 그건 토시오의 첫 번째 자신의 흔적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토시오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 폴더 가이스트 현상을 만들어 냈습니다.(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물건을 가지고 노는 정도, 그 정도라고는 하였지만) 주전자가 날아다니고 베개가 서서 춤을 추고, 뒹굴던 음식들이 요리가 되어 떨어지는 그런 괴상한 현상들. 가끔씩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소리가 들렸지만 딱히 무슨 의미가 있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소름이 돋아 마땅한 그 순간이었음에도, 저는 꽤나 침착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편지 때문이었을지도, 혹은 이런 괴상한 상황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뒤로 몇 번이나 이러한 현상을 겪으면서 두 번째 편지가 놓이길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편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자리에 다시 놓아져 있었습니다. 언제 썼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1월 30일, 토시오----

To.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

다시 인사드립니다. 나는 토시오, 당신의 집에 얹혀사는 귀신. 혹은 원령, 또는 악령이라 불리는 그것입니다. 며칠 동안 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저를 보지 못하는 듯하였습니다. 저는 저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많은 물건들을 잡고 흔들었습니다. 영령인 저에게 모든 물건들은 꽤나 무거운 것들이라서 몇 번 물건들을 흔들고 나면 몸이 흐릿해지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이게 꽤나 섬뜩한 느낌이라서 많이 겪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목소리를 내어 당신에게 말을 걸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제 목소리를 듣는 듯하였습니다만, 정확히 대답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당신의 말소리는 제대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이건 우리간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문제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꽤나 근사한 발견을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며칠 간이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게 저 때문이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깨우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왠지 저를 알아주지 못하는 당신이 원망스러운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만, 이제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아!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에게 편지를 남겨 주시겠습니까? 저는 기쁜 마음으로 당신과의 대화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From. 당신의 악령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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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번째 편지를 받고 저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시오는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제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지요. 전 그 즉시 토시오에게 전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소통을 위한, 첫 장. 사람과 귀신의 제대로 된 의사소통의 첫 발자국이었을지도 모릅니다.





=====2월 1일, 정인====


To. 제 집에 얹혀사는 토시오에게.

당신이 자주 하는 말처럼, 제 집에 얹혀사는 귀신, 혹은 원령. 또는 악령이라 불리는 토시오에게 이 편지를 남깁니다. 저는 당신을 보진 못했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목소리도 들었고, 당신의 행동을 모두 보았습니다. 며칠간은 두려움에 잠을 자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앞으로 이어질 이 재밌는 동거가 기대되기까지 합니다. 언제든지 저에게 편지를 남겨주세요. 저도 당신에게 편지를 남기겠습니다.

P.S* 아! 최근 토시오가 해놓은 계란 프라이는 상당히 짰습니다. 소금을 조금만 덜 쳐주세요.
P.S* 저의 이름은 정인이에요, 토시오.

From. 집주인 정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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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시오는 이 편지의 대답에 꽤나 기뻤던지 A4용지 세장 분량의 편지를 남겼었습니다만, 이 내용은 죄다 자신이 이제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음에, 당신과의 첫 교류를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식의 어려운 단어들의 집합이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같이 사는 생활에 익숙해졌고, 어느 순간부터 저는 제 집의 물건들이 하늘을 날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움직이는 물건을 향해 손을 흔들면, 그 물건들도 마주 흔들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 토시오도 저에게 인사하기 위해 열심히 물건을 흔드는 것이겠지요.

이 이후에는 그저 중요했던 몇 가지의 편지들만 올려보도록 할게요.



-----6월 20일, 토시오-----

To. 더위에 지쳐가는 정인에게.

이제 곧 여름이네요. 곧 하늘에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풀들은 파래지고, 동물들은 무더운 더위에 지쳐가는 날이 오겠네요. 정인도 더위 먹지 않게 조심하세요. 저는 요즘 당신에게 해주기 위해서 요리책을 보고 있습니다. 며칠 전 사다주신 요리책에서 아주 마음에 드는 요리를 발견하였지요. 그다지 어려운 식재료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무난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번 주 토요일을 기대해주세요. 맛있게 만들어 드릴게요.

P.S* 세탁기에 양말을 넣을 땐 뒤집지 말고 넣어주세요.

From. 더위를 타지 않아서 좋은 토시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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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1일, 정인======

To. 잔소리꾼 토시오에게.

토시오는 모르겠지만 벌써 무더운 더위에 선풍기를 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선풍기 내놔요. 어디다 감춘 거예요? 전기세는 제가 내는 거라고요. 거기다가 양말 좀 돌려 넣었다고 잔소리는... 물론 토시오가 해주는 요리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사다준 책에서 먹고 싶은 요리가 있었는데, 표시해 두신 거 보았나요? 그걸 먹고 싶었던 건데. 어쨌든 요번 주 토요일은 약속 취소하고 빨리 집에 돌아오겠습니다.

P.S* 잔소리 좀 그만해요

From. 이 집 주인 정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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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토시오----

To. 놀러 간 정인에게.

오늘은 정인이 놀러 갔다는 걸 알고 있지만 조금은 서운하네요. 다른 집의 사람들처럼 24일에 가족끼리 보내고 싶었는데요. 크리스마스트리도 꾸미고 별도 달고 꼬마전구도 두르고 그렇게요. 물론 정인은 사회생활이 바쁘다는 걸 알고 있으니 할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있어요. 그래도 같이 보내고 싶었어요.

From. 나 홀로 집에 토시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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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정인====

To. 나이를 모르는 토시오에게.

며칠 전 크리스마스에는 미안했어요. 사과를 했어야 되는데 꽤 오랜 시간을 끌고 말았네요. 토시오의 정확한 나이도 모르고, 생일도 몰라서 이렇게 케이크와 함께 편지를 남깁니다. 오늘을 새해의 첫날일 뿐만 아니라 토시오의 생일로 삼기로 해요. 나이는 오늘부터 1살. 사람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오늘을 토시오의 첫 생일. 어때요? 괜찮아요? 비록 맛은 못 보겠지만 모양이라도 마음에 들었으면 싶어서 제일 이쁜 케이크로 사 왔어요.

생일 축하해요 토시오.

From. 한~~~~참 누나 정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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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편 지가 끝은 아니지만 더 이상의 편지는 다 비슷비슷한 내용이네요. 벌써 몇 년째 이렇게 같이 살고 있으니까요. 끝을 어떻게 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이만 저희의 글을 줄입니다.

귀신, 혹은 원령. 또는 악령이라 불리는 토시오, 그리고 집주인 정인이의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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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lgo :

아침에 일어나 시계를 본다. 여섯 시 반. 대충 몸을 추스르고 정신을 차린다. 일곱 시. 옷을 입고 외출 채비를 한다. 일곱 시 반. 잠시 멍하니 시간을 보낸 후, 집을 나선다. 여덟 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를 기다린다. 여덟 시 십분. 늦게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 카드를 찍는다. 삑-하는 무성의한 기계음이 들린다. 아무 창가에나 앉아서 창문을 열고 몸을 기댄다. 여덟 시 이십 분. 목적지가 다가올수록 시계를 바라보는 시간이 잦아진다. 여덟 시 삽십분. 삼십일 분. 삼십이 분. 삼십삼 분. 목적지에 내린다. 여덟 시 삼십오 분. 주위를 한번 살피고 후욱-숨을 내쉰다. 얼마나 올라야 정상을 볼 수 있을까. 오랫동안 굳어있던 몸을 억지로 움직인다. 온갖 관절에서 삐그덕 소리를 내며 산을 오른다. 아홉 시. 아직 정상까진 멀었다. 하지만 이미 한계. 이쯤 할까?라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다시 몸을 움직인다. 언제 또 할 수 있다고. 아홉 시 반. 정상이 코앞이다. 토할 것만 같은 몸을 채찍질해 정상에 다다른다. 정상에 서서 바라본 마을은 아름다웠다.

작고 수수했지만 아름다웠다. 드문드문 보이는 논밭과 푸른 소나무. 슬쩍슬쩍 보이는 사람들. 뛰어노는 어린아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마실 나가는 할머니. 평상 위에 앉아 소나무 그늘을 차양막 삼아 장기 두는 할아버지. 뭐가 그리 신나는 건지 이리저리 뛰어노는 똥개.

아름다웠다. 이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예전부터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꼭 한번 해봐야지. 꼭 한번 해봐야지 했던 것.

"야-아-호-!!!"

있는 힘껏 내지른다. 생각만큼 큰 소리를 내지르지 못했지만 속이 후련했다. 다만 영황에서 보던 것처럼 야호~호~호오~하는 메아리를 듣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열 시 반. 몸을 추스르고 다시 걸음을 재촉해 산을 내려왔다. 드문드문 보이는 등산객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고개를 마주 끄덕이곤 발을 움직인다. 산에서 볼 때는 멀리 있던 다른 세상의 풍경 같던 마을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온다. 커다랗게 눈 앞에 펼쳐진다. 열한 시 반.

꼬르륵-배고픈 소리에 괜히 기분이 좋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약간은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선다. 된장찌개를 시키고 앉아있으려니 입안에 침이 고인다. 잠시 그렇게 있으려니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가 나온다. 수저를 뻗어 한입. 구수하게 퍼지는 된장찌개의 향.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음식의 맛이 이리도 좋았던 거였나. 배가 터질 것처럼 밀어 넣는다. 꺼억-하는 트림 한번. 잠시 배를 두들기며 그렇게 앉아있는다. 몇 분이나 흐른 뒤에야 간신히 몸을 일으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선다. 열두 시 이십 분.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잠시 기다려 지나가는 마을버스에 몸을 싣는다. 열두 시 오십 분. 마지막 줄 바로 앞, 바퀴가 있는 자리 뒤.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없이 휑~하니 펼쳐진 도로. 가끔 보이는 논밭. 스쳐 지나가는 전봇대.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 문뜩 바라본 하늘은 비라도 내릴 것처럼 검은 먹구름이 몰려든다. 나는 몰려드는 졸음을 몰아내려 머리를 흔들고, 시계를 바라본다. 한시 오십 분. 벌써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그리고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구나. 후우-하고 숨을 내쉰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하고 버스에서 내린다. 두시. 주변을 살펴 목욕탕을 찾는다. 꽤나 허름한 목욕탕을 발견하고 문을 열고 들어선다. 삐그덕-하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꽤나 뻑뻑한 문이지만 여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 안에 들어가 카운터에서 돈을 계산한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지폐 몇 장을 꺼내 건넨다. 주인장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마주 끄덕이고는 목욕탕에 들어선다.

옷을 대충 벗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잔뜩 풀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아-맞다. 다시 일어서서 목욕탕 안에 있는 이발소로 들어선다. 바지 하나 입은 이발사가 머리를 흔들고 일어선다. 찌뿌둥한지 기지개를 켜고 가까이 다가온다.

"머리 하실 거요?"

"아... 예"

이발사가 몸에 가운을 둘러주고, 잠시 이발 준비를 하며 물었다.

"어떻게 해드릴까?"

"깔끔하게 해주세요. 깔끔하게"

...오랜만에 어머님을 뵈러 가는 거니 깔끔하게 해주세요... 뒷말은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이발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침없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가운 위로 잘리어진 흰머리가 떨어져 내린다. 가운 위가 흰 머리칼로 뒤덮인다. 나는 잠시 그렇게 잘려나가는 머리를 보며 있었다. 오랜만에 뵈러 갑니다. 어머니. 나는 머리를 자르는 동안 가만가만 떠오르는 기억들을 추억했다.

"거-. 다 됬수. 계산은 나갈 때 하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가볍게 얘기를 하고 마저 몸을 씻는다. 뜨거운 물에 풀어진 몸을 이끌고 샤워기 앞에 다가선다. 차가운 물을 틀어 몸을 헹군다. 후우- 약간은 멍했던 정신이 다시금 맑아진다. 나는 밖으로 나가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린다. 오랜만에 보는 내 얼굴에 어색한 것도 잠시, 스킨을 얼굴에 펴 바른다. 어디 한 곳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곤 문을 열고 나선다. "아 저기-"하는 소리를 듣고는 아차!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건네어준다. "잘 가십쇼~"하는 소리에 맞춰 삐이걱-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시계를 바라보니 네시. 근처 옷가게를 들어간다. 조그마한 가게였지만 제일 깔끔한 옷을 찾아 입으니, 나 자신도 꽤나 깔끔해 보였다. 아직도 어색하기는 했지만. 또 주섬주섬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선다. 옷 찾는데 꽤나 시간이 들었구나. 다섯 시 반.

다시 산을 타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산이라기보다는 야트마한 언덕 같은 곳이었지만.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납골당이라 쓰인 푯말이 보인다. 여섯 시. 나는 납골당에 들어서기 전, 옆에 주차되어 있는 차에 얼굴을 비춰본다. 숨을 한번 고르고. 긴장을 풀고. 납골당에 들어선다. 수많은 함 들을 지나쳐 어머니의 이름을 찾는다. 그리고 이윽고 어머니의 유골함을 찾았다. 멈추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간신히 한마디 내뱉을 수 있었다. 고개를 가볍게 숙이었다. 왠지 머릿속에서 텅~텅~하는 목탁 치는 소리가 맑게 들려온다. 고개를 들고 몸을 돌린다. 일곱 시 반. 너무나 조금, 그동안 못 찾아뵀던 시간에 비해선 지나치게 짧은 그런 시간만을 어머니와 마주하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고.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시 마을로 내려온다.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 하나를 사고 주변의 강이 보이는 곳을 찾아간다. 강에 도착해 벤치에 앉자 시간은 아홉 시. 벤치에 앉아 사온 맥주를 따고 한입 들이킨다. 오랜만에 마신 맥주의 탄산은 목을 따갑게 한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단축번호를 누른다. 띠-띠-하는 소리와 함께 신호가 가지만 연결이 되지 않는다. 메시지를 눌러 짧게 단어를 입력한다. '그동안 미안했소.' 얼마 만에 쓰는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건강하시구려. 괜히 날 만나 오랜 시간 고생이 많았소. 고마웠소. 사랑하오. 하고 싶은 말은 머릿속에 넘쳐났지만, 저 짧은 텍스트 하나만을 입력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맥주를 들이켜고. 지나간 추억들을 되새긴다. 아이들에게도 짧은 문자를 남길까 하다가 그만뒀다. 시간을 보자 열한 시.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강물에는 별이 내려앉고 달이 떠올랐다. 검은 물 위로 물고기 몇 마리가 뻐끔뻐끔 고개를 내밀었다가 사라진다. 야트마하게 자란 풀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제 곧 다가올 시간에 괜스레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리고 아침까지만 해도 다가올 것 같지 않았던 시간이 다가온다. 열한 시 오십 구분.

그리고 곧.

열두 시.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키자마자 시야가 어두워진다. 밤하늘 별이 떠 있던 강물이 어두워지어 사라지고,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두운 틈으로 어둠보다 더 어두운 사내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 사내는 너무나도 느긋하게 걸어와 내 앞에 선다.

"하루는 괜찮았습니까?"

"고맙습니다. 내 생애 가장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나는 나에게 손을 내미는 사내의 손을 보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웃을 수 있었다, 마지막 하루. 십 년을 넘게 식물인간으로 살던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하루. 내가 쓰러진 뒤로 날 찾지 않던 아이들보다... 내 머릿속에 항상 살고 계시던 어머님.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승사자 양반"

"말씀하십시오"

"나중에- 우리 마누라 오면... 거...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겠다고 좀 전해주세요"

내 말에 사내는 잠시 멈칫하나 싶더니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사내의 행동에 웃었다.

마지막 하루는 끝나버렸지만 웃을 수 있었다. 행복하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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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로운 햇살 아래 의자에 앉아 책 하나 손에 들고. 가끔은 구름 그늘에 가리어 몸을 식히고, 약간은 김이 빠진 콜라를 한입 입에 머금고. 집을 찾아가는 강아지 한 마리 내 발 밑을 스쳐지나고. 작은 참새 한 마리 짹짹 거리며 내 옆에 날개를 접어 쉬며. 아무런 생각도. 어젯밤 싸웠던 친구의 일 따윈 모두 잊고. 두 귀에 꽂은 이어폰에선 약간은 신나는 그런 음악이 흘러나온다. 문득 여기가 하와이, 혹은 열대지방의 어느 섬. 바닷가라고 생각하고. 흘러가는 구름에서 모양 찾기 놀이를 하듯 여러 가지 동물을 끄집어낸다. 토끼. 고양이. 강아지. 방금 하늘로 날아간 참새의 어미. 쌍둥이 아가. 허리를 숙인 노파. 수많은 그림들을 찾아내고서야 햇빛이 얼굴을 빼꼼-. 뜨거운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져내린다. 뜨거운 햇살에 눈이 찌푸려지고,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머리 위로 들어 햇빛을 가리고, 옅게 생긴 그늘 밑으로 태양을 훔쳐본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햇빛의 갈기. 이리저리 흩날리는 메두사의 머리처럼. 잠시 보고 있자니 눈이 아파와 다시 옅은 그늘에 머리를 감춘다. 시간의 흐름은 오직 구름의 흐름만으로, 태양의 기울기로만 느낀다. 내가 아는 모든 동물 모양의 구름을 다 찾았을 때. 태양이 슬슬 머리를 땅속으로 집어넣고 있는 때가 돼서야 엄마가 돌아온다. 양손에 먹을거리가 가득 든 비닐봉지 두 개. 출렁거리는 봉투 사이로 보이는 내가 좋아하는 먹을거리. 입에 웃음이 걸린다. 두 팔 벌려 엄마를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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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작은 피노키오의 꿈이었어요. 사람이 되는 것. 거칠은 나뭇결의 몸이 아닌 부드러운 피부를 갖는 것.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관절이 아닌 부드러운 움직임의 관절을 갖는 것. 거짓말을 할 때마다 늘어나는 코가 아닌, 늘어나지 않는 코를 갖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어요. 처음 생각을 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꿈꿔왔던 일. 사람이 되어서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것. 제페토 할아버지의 진짜 손주가 되고 싶다는 것.

하지만 꿈은 언제나 꿈일 뿐이었죠. 이루어질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날이 갈수록 삶에 희망이 없어지고. 잔뜩 해왔던 재밌던 일도 이제는 슬슬 질려가고 있었어요. 매일 조금씩 자라나는 자신의 피부결을 대패로 밀며 생각했어요. 내가 사람이 될 방법만 있다면, 그 어떤 힘든 일도 해낼 수 있을 텐데.

그때였어요. 펑-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땅딸막한 요정이 나타났어요. 요정은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을 애써 정리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요리조리 흔들었어요. 요술봉 끝에서 보라색 불빛이 이리저리 글씨를 만들었어요. 요정은 잠시 에헴-하는 작은 헛기침을 하고는 피노키오의 코 앞으로 쑤욱- 다가왔어요. 그리고는 수염에 가리어진 입을 씨익-. 금 색깔 이빨이 드문드문 밝은 빛을 발했어요. 피노키오는 갑작스레 앞에 나타난 요정에 잠시 몸을 움츠렸어요. 자신의 몸을 대패로 밀고 있는 건 그 누구라고 해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심지어 자신을 만들어주신 제페토 할아버지조차도. 피노키오는 손에 들고 있던 대패를 뒤로 슬쩍 감추고는 다른 손으로는 요정을 살짝 밀쳐내었어요. 요정은 등에 달린 작은 날개로 뒤로 쓰윽-날아올라 다시금 요술봉을 흔들었어요. 땅딸보 요정은 다시 한번 에헴-. 작은 헛기침을 하곤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요술봉을 뻗어 피노키오를 가르켰어요.

"너 말이야,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땅딸보 요정의 말에 피노키오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어요. 이 땅딸보 요정에겐 말을 쉽사리 할 수 없었어요. 왠지 어려웠어요. 턱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어요.

"내가 말이야, 단순한 나무인형한테 말이야, 응? 그니까, 응. 내가 움직이게도 해주고 말이야, 이렇게 착하게 살라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이야, 응. 거짓말할 때마다 코도 늘어나게 하고 말이야. 응? 그렇게 해줬는데 말이야. 응? 욕심이 너무 지나치면 안되는거야! 알아 응? 욕심도 적당히 부려야지 말이야"

"... 그래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말이야! 응! 니 놈이 하는 생각이 계속 귓가를 웅웅- 울 린단 말이야! 얼마나 신경 쓰이는 줄 알아!?"

"전 그냥 사람이 되고 싶어요. 피부를 갖고 싶어요.... 늘어나는 코 같은 거 필요 없어요. 매일 이렇게 대패질하는 것도 지쳤어요"

"이게... 아고... 내가 진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 자고 말이야. 착하게 살겠다고... 하이고-"

땅딸보 요정은 한숨을 계속 내쉬었어요. 한참을 그렇게 요술봉을 이리저리 흔들던 땅딸보 요정은 생각을 정리한 건지, 여태껏 흔들고 있던 요술봉을 손에 탁탁 내려쳤어요. 그리곤 씩-다시 그 웃음을 지었어요.

"진짜 사람이 되고 싶냐?"

"예, 되고 싶어요"

"그러면 말이야-"

이후로 땅딸보 요정은 피노키오에게 한참을 이야기하였어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요. 땅딸보 요정을 말을 들을수록 피노키오는 마음속에 담고 잇던 자신의 꿈이 꿈틀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드디어 될 수 있어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한참을 되뇌었어요. 잊어먹지 않으려고 조그마한 조각칼을 들어 자신의 팔에 방법을 새겨 넣기 시작했어요.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 사람이 되려면 바다도 건너고 산도 넘어야 하고 많은 어려움이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되고 싶었어요. 피노키오는 생각했어요. 사람이 된다면 제페토 할아버지와 같이 목욕을 하자고. 제페토 할아버지의 진짜 손주가 되자. 제페토 할아버지를 꽉 끌어안고.

여행을 떠난 피노키오는 산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는 와중에, 작은 여우를 만났답니다. 작은 여우는 큰 눈을 똘망똘망 거리며 피노키오의 다리에 자신의 몸을 비비었어요. 피노키오는 몸을 숙여 작은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답니다. 그러자 작은 여우가 깽깽-거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었어요.

"나무인형아. 넌 혼자 어딜 가니?"

피노키오는 너무나 놀랐답니다. 여우가 말을 하다니요!?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고는 자신에게 말을 건 여우를 바라보았어요. 여우는 고개를 갸우뚱.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여행 중이란다"

"사람이 되기 위해서?"

피노키오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작은 여우는 피노키오의 행동을 보고 잠시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어요. 며칠 전 보았던 놀라운 광경에 대해서 말이죠.

"혹시... 그 방법을 내가 알지도 몰라"

"응!? 어떻게!? 진짜!?"

"응. 거기서는 사자가 사람으로 바뀌고, 다시 사람이 사자로 바뀌기도 해. 곰이 사람처럼 걸어 다니기도 하고, 사람들의 몸이 조각조각 찢기기도 하지만, 반대로 붙기도 하지. 그곳이라면 네가 사람이 되는 방법도 알 수 있을 거야! 분명히! 서커스단으로 가자! 서커스단이야!"

작은 여우의 말에 피노키오는 들떴어요. 사람이 될 수 있다니! 피노키오는 땅딸보 요정이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리기 위해 팔을 바라보았어요. 하지만 흐릿해진 팔에는 '···으로 가라'라는 말만 쓰여있다. 뭐였지? 잠시 고개를 갸웃. 옆에서 작은 여우가 계속 '서커스단으로 가자!'라고 외치는 것을 들었어요. 그래- 거긴 가보다. 피노키오는 작은 여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쫓아가기 시작하였어요

두 명의 사람이 아닌 것들은 금세 서커스단에 도착했어요. 곧이어 피노키오를 본 단장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뛰쳐나왔답니다. 허리에 찬 벨트 위로 두툼한 뱃살이 출렁 튀어나왔어요. 단장은 피노키오의 몸을 이리저리 만지며 씩-웃었어요. 금이빨이 반짝. 피노키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내었어요.

"좋-아. 사람이 되는 방법 말이지? 크하하. 좋아. 알려주지. 알려주고말고"

단장의 말에 피노키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어요. 자기도 모르게 단장의 손을 움켜쥐었어요. 방금 전까지 그렇게 껄끄러웠던 상대였는데 말이에요. 단장은 피노키오의 손을 조심스레 떨쳐낸 후 검지 손가락을 펼쳐 들고 피노키오의 앞으로 내밀었어요.

"단. 여기서 일 년간 일을 해야 해. 너에겐 중간의 작은 막을 맡기지. 그렇게 한다면 일 년 뒤에 너에게 사람이 되는 법을 알려주겠어"

"좋아요! 할게요! 하겠어요!"

피노키오는 잠시도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어요. 단장이 적어준 계약서에 사인을 하였어요. 잠시 지나자 어떤 말이 쓰여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일 년만 지나면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사람이. 피노키오는 자신의 꿈이 눈 앞에 성큼 다가온 것만 같아 너무나 기뻤어요.

그 계약을 한 일 년 뒤, 피노키오에겐 많은 일이 있었어요. 드디어 계약이 만료되고, 사람이 되는 법을 듣는 날, 피노키오는 어두운 골방에 웅크리고 앉아 움이지 않았어요.

수많은 일이 있었어요. 서커스단의 중간 막을 맡은 피노키오는, 뒤에 있을 공연들을 위해서 분위기를 띄워야 했어요. 처음엔 거짓말을 했어요. 코가 늘어나고 관객들은 즐거워했어요. 하지만 그건 얼마 가지 않았어요.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해서 늘어난 코를 잘랐어요. 텅-하며 잘려나가는 코를 보며 사람들이 즐거워했어요. 시간이 지나고, 피노키오는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코에 불을 붙였어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부숴나갔어요. 하나하나. 피노키오는 자신의 몸이 부서져 나갈 때마다 웃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어요. 코가 잘려나가자 자지러지게 웃는 여자부터, 팔을 타고 올라오는 불꽃을 보며 박장대소하는 남자. 다리가 꺾이자 비웃는 아이들, 늘어난 코를 지팡이로 써야겠다며 잘라가는 노인들.

피노키오는 만신창이가 되어 어두운 골방에 앉아있어요. 그을린 팔다리, 몇 번이고 갈아 끼운 몸뚱이. 피노키오가 움직이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있을 때, 단장이 두툼한 뱃살을 흔들며 나타났어요. 금이빨이 씨익-.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요.

"피노키오? 어때. 사회 구경은 잘했나? 내가 말이야-응? 힘 좀 썼지, 응."

단장은 요술봉을 흔들면서 그렇게 말했어요. 땅딸보 단장은 요술봉으로 힘껏 피노키오의 머리를 내려쳤어요. 피노키오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피노키오에게 물었어요.

"어때, 피노키오. 아직도 사람이 되고 싶나?"

피노키오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자신을 바라보던 관객들의 웃음이 떠올라요.

"예. 되고 싶어요"

피노키오의 코가 쭈욱-. 늘어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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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릴 수 있는 것. 그것은 내 여태껏 삶의 모든 후회들에 직결되어 있다. 나는 항상 후회하고 절망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실망하고-. 다시 후회하고.
그런 쓸데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런 것들의 연속에 나는 점점 과거를 회상했다.

그때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그때 이렇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때 그런 식으로 했다면. 다른 생각을 했다면! 후회한다. 되돌릴 수 있는 것-. 되돌아 갈 수 없는 과거. 그리고 되돌아가고 싶다는 희망. 헛된 희망. 그것은 내 맘을 조금씩 무너트렸다. 좀벌레처럼-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나는 썩어 들어가고 있다. 붕괴되어가는 마음을 다시 붙이려 해보았자- 후회는 더욱 커졌다. 자신의 그림자를 더욱 넓히고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 좀먹고 있다.

되돌릴 수 있는 것-. 그것. 되돌릴 수 있다면- 만약. 아주 만약. 되돌릴 수 있는 것이 하나만 주어진다면. 그렇다면. 난. 뭘. 어떻게. 무엇을. 바꿔야 할까. 제일 뒤틀려버린 무엇. 끊어져버린 그것. 생각났다.

나의 꿈. 나의 모든 꿈. 내가 어렸을 적 꾸었던 꿈. 내 이상. 나의 미래. 그것은 내 전부였던 후회. 그래 꿈이었다. 되돌릴 수 있을까. 되돌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붙잡을 수 있을까. 다시 할 수 있을까. 너무-

늦진 않았나.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되돌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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