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에 따른 다양한 관점과 생각들이 존재한다. 그 생각들은 개인의 성향과 교육 환경, 그리고 그들이 속한 그룹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 그룹들이란 결국 속한 사람들의 위치와 이익 관계를 대변하게 된다. 사람들은 결국 세상 안의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자신이 속한 그룹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로써 귀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자신이 속하지 않은 그룹의 관점에서 생각을 전개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는 것이지, 정확하게 그들과 같은 관점에서 생각을 전개하기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그들의 생각을 난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는 자만과 위선일 수 있다.
한 남성이 있다, 그는 자신이 페미니스트이길 자처한다. 허나 그가 완벽히, 그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과 동일한 차별과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그걸 몸으로 체득하면서 그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는 남성이고 그가 여성으로써 느낀 부당함을 자신의 몸으로 체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페미니스트적 사고를 견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야 옳다. 그는 남성이라는 그룹에서 여성이라는 그룹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경우를 보자면,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적인 남성과 여성들은 LGBT를 대변할 수 없다. 그들의 생각과 그들이 그러한 결정을 내려 삶을 살아가는 자세까지 대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보면 자신이 겪을 수 없는 모든 경험을 자신이 겪은 것이라 오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입장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서로를 배척해서는 안된다.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지만 페미니스트적 견해를 견지해야한다. 일반적으로 LGBT에 대하여 그들의 삶에 대하여 우리는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그룹의 서로간에 대변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서로 다른 그룹들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계속 관철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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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그랬습니다."
"후우-"
노려보던걸 멈춘다. 내가 노려본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이미 사람을 죽여버린 녀석이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녀석을 죽여버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 녀석에게 무슨 사과를 받아낼 이유도 없다. 나는 그저 말 잘 듣는 로봇처럼, 혹은 마음이 없어져버린 사이코패스처럼,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감정을 억누르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말자.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시체를, 고깃덩어리를 의식하지 말자. 감정의 찌꺼기는 뇌 속 한 공간에 묻어두자. 묵직한 이성 덩어리로 감정을 억눌러 흘러나오지 않게. 그렇게 맘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금 바라본 사건 현장, 붉은 바닥. 흘러내리는 붉은 핏방울. 떨어지는 핏방울 속 걸려있는 고깃덩이. 혹은 사람이었던 그것. 푸줏간을 연상시키는 붉은 불빛. 사람마저 붉게 변해 보이는 그런 공간이다. 아무도 말이 없다. 모든 사람들은 이 상황에 뭐라 말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는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할 일을 깨달은 막내가 녀석의 손목을 잡아끈다. 찰칵-거리는 소리, 질척 거리는 발소리. 막내와 녀석이 사라졌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붉은 공간에서 홀로 검게 물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붉게 변한 물이 채워진 욕조에 다가간다. 이젠 익숙해져 버린 비릿한 냄새. 욕조 속에서 손이라도 뻗어 나올 것만 같다.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몸을 숙여 땅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머리카락 한올을 집어 들었다.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 끝, 그 끝 부분에 거칠게 뜯겨 나간 피부 조각이 들러붙어있다.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눈을 돌릴 수도 없다. 끝까지 보고 파악하고 분석 해내야한다. 냉철해져야 한다. 하지만... 갈수록 그러기가 힘들다. 바지 주머니에서 증거품 수집용 비닐백을 꺼내어 넣는다. 피부 조각이 붙은 머리카락이 휑한 비닐봉지에 담긴다.
못 해 먹겠다. 속이 메슥거린다. 나는 대충 둘러보다가 방을 나왔다. 잠깐 머리라도 식히자. 더 보고 있자니 묵직한 이성 덩어리가 쩌적 소리를 내며 금이 가고만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이성을 짖눌러 보아도 난 사람이다. 그들과 똑같지 않은. 매달, 혹은 매주, 그것도 지나치면 매일. 나는 지옥과 일상을 오가고 있다. 흔히 악마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과 매일 마주치고 그들의 말을 듣고, 일반인들이 오열하는 걸 견뎌야 한다. 맨 정신으로. 술의 힘을 빌릴 수도 없이. 그들과 매일 마주하며 매시간 환희와 거짓에 찬 목소리와 그들에게 당한 피해자들의 피 흘리는 오열을 들어야 한다. 그들의 어디부터가 거짓이고 진실인지, 그들의 말 틈 어딘가에 빈틈이 없는지 찾아야 한다. 눈물 흘리는 피해자들과 마주하며. 피해가족의 오열과 절규를 악마 놈들의 거짓과 진실처럼 냉정하게 받아야 한다. 익숙해지면 안 된다. 나약해지면 안 된다. 흐트러지면 안 된다. 어디까지나 냉철해야 한다. 하지만 난 사람이다. 난 기계가 아닌 사람이다.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일 이런 것들과 마주하며 살아온 내 선배들이 존경스럽다. 지금의 난 하루하루 깨어져 가고 있는데...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붉은 그곳으로 들어간다. 검은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만 같은 그곳으로 선뜻 발을 내밀기가 힘들다. 수많은 생각이 교차된다. 아까 봤던 그 붉은 공간이 다시 눈 앞에 펼쳐진다. 매달려있던 시체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듯이 움직거린다. 욕조에 담긴 붉은 물에서 손들이 뛰쳐나온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많은 고깃덩어리가 하나가 되어 일어선다. 눈을 질끈 감는다. 어둠에 감싸여 모든 환상이 사라진다. 잠시 숨을 고른다. 거칠어진 숨소리, 심장이 달음박친다.
"에이 씨발"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있던 사표를 꺼내 땅에 아무렇게나 내던진다. 휴대폰 배터리를 뽑아 꺼버린다. 어디 사람 없는 곳으로 가버리자. 일상으로, 지옥과 마주칠 일이 없는 곳으로.
"씨이발..."
...
....
.....
......
다시 사표를 집어 들었다.
여 : 별다른 느낌은 없었어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으니까요. 그저 처음엔 그냥 아~사람이 탔네 하는 정도였죠.
남 : 글쎄요. 그때는 별다른 생각 없었습니다. 뭔가 불안해 보이긴 했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요.
여 : 그런데 그때부터 그의 행동이 이상했죠.
남 : 그런데 그때부터 그년의 행동이 이상했습니다.
"그때요?"
여 : 예. 엘리베이터가 멈춘 뒤부터 그는 지나치게 히스테릭을 부리기 시작했어요.
남 : 짜증 났습니다. 며칠 전부터 계속된 야근에, 상사의 스트레스. 거기에 오늘은 잠도 못 자고 나온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곤 해도 남에게 피해가 가는 그런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여 : 머리를 헝클었어요. 한참을 쥐어뜯다가 거울을 보며 뭐라고 중얼거리더군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남 : 그냥 이 좆같은 상황에 욕을 했을 뿐입니다. 별다른 의미 있는 말은 아니었어요.
여 : 죽여 버린다고 했어요. 분명히 들었다고요.
남 :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 까진 괜찮았어요. 그 뒤가 문제였죠. 그 뒤가...
여 : 엘리베이터가 멈추니까 본색이 드러난 거라니까요?
"멈춘 뒤에요...?"
남 : 불이 꺼진 시점부터요. 엘리베이터는 멈춰있지 덜컹거리는 소리는 계속 들리지. 그런데 갑자기 불이 꺼진 겁니다.
여 : 불이 꺼졌어요. 갑자기! 타악-하고 꺼진 불 틈으로 그놈이랑 눈이 마주쳤어요.
남 : 눈이 마주쳤냐고요? 글쎄요. 그런 것까지 기억할 정신이 아니었어요. 무엇보다 야근 때문에 졸려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요.
여 : 그놈 눈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어요. 마치 공포영화나, 삼류 영화에 나오는 강간범들 같은 그런 눈이었어요!
남 : 아니 그러니까 씨발! 난 가만히 있었다고요. 구석에 박힌 채로! 그런데 그 년이 갑자기 소리치더라니까요!
여 : 가까이 오지 말라고, 분명 난 경고했어요. 수십 번은 했어요!
남 : 가까이 갔냐고요? 하-씨발. 난 가까이 안 간다고 그저 손만 뻗어서 흔들었어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고요.
여 : 예. 찔렀어요. 그놈이 손을 뻗고 가까이 다가오길래, 먼저 찔렀어요!
"찔린 곳은 괜찮습니까?"
남 : 하... 괜찮을 거 같아요? 시벌.
여 : 그런 놈은 죽어버렸어야 돼요. 그런 상황을 틈타서, 여자를 어떻게 해봐야겠다는 개새끼들은.
남 : 시펄. 그년 고소할 겁니다. 개 같은 년.
"이대로 죽게 해줘요 엄마..."
그녀는 아들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산소호흡기로 인해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말을 꺼낸 아이의 말이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소리가 병실에 가득 메워진다. 그녀는 아들에게 고개를 흔들곤 머리를 쓰다듬었다. 독하디 독한 약으로 인해 맨들 머리가 된 아이의 피부는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것만 같았다. 푸석한 진흙더미를 만지는 듯한 기분에 그녀는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아이의 이마에 키스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잠깐 사이에 아이는 생명이 끊어진 것처럼 잠이 들었다. 간혈적으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쌕쌕 소리만이 아이가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선채로 한참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아이의 고통을 계속해서 연장하는 것이 누구에게 좋은 것일까. 그녀는 지난한 몇 년간의 간병생활에 지쳐있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머리를 가득 메운 하나의 상념을 잊을 수 없어 크나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입 밖으로 차마 내기도 어려운 그 생각이 잠을 설치게 했다. 점점 심해져만가는 수면장애는 결국 불면증으로 이어졌고, 그녀 또한 나날이 심약해져 갔다. 사실 굳이 따지고 보자면 이날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오랜 간병생활의 하루일 뿐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언제나 아이가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일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아이의 말이 마치 명령처럼, 혹은 아이의 간절한 소망처럼 마음을 옥죄어왔다.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 투병으로 인해 아이의 얼굴은 여기저기 상해있었다. 약에 취해 잠에 들었음에도 고통스러운 표정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아이의 몸을 여기저기 찌르고 있는 선들이 아이를 속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유로워 지기를 바라는, 고통 없는 세상을 바라는 아이를 자신의 이기심으로 붙잡아두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아이의 몸 위로 올라탔다. 침대의 흔들림에 아이가 슬며시 눈을 떴다. 아이는 마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베개를 집어 들었다. 아이는 마치 선물을 보채는 아이처럼 그녀에게 말없이 재촉했다. 어서요, 빨리요-. 그녀는 베개로 아이의 얼굴을 짓눌렀다. 베개 위로 보이는 눈이 그녀를 향해 깜빡인다. 고마워요, 엄마. 그녀는 환청처럼 들리는 그 소리에 베개를 더욱 세게 짓눌렀다. 아주 미약한 힘도 내기 힘든 아이는 잠시 잠깐 손발을 버둥거리다 이내 축 쳐졌다. 그녀는 아이가 움직임을 멈추고, 병실에 가득 시끄러운 소리가 채워졌음에도 아이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웃고 있는 아이의 눈에 흐른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냈다. 그리곤 아이의 이마에 키스했다.
"잘 자렴, 우리 아가"
합격 소식을 들었다, 너의. 난간에 올라 담배를 물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몸을 적신다. 저 밑의 사람들은 개미처럼 재빨리 걸음을 옮긴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피해 이리저리 걸음을 재촉한다. 우산을 꺼내 쓰고 가방과 옷으로 머리를 가린다. 누군가는 그늘 밑으로 몸을 숨기고 또 몇몇 사람은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긴다. 카악-하는 소리를 내며 입에 가래를 머금는다. 천천히 밑을 조준하고 퉤- 내뱉는다. 빗방울에 섞여 침이 떨어져 내린다. 땅으로, 누군가의 머리 위로, 또는 누군가의 우산으로, 누군가의 가방 위로.
침을 맞지 않은 자들과 맞은 자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서도, 그 무수히 많은 빗방울 속에서도 침을 맞은 사람의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들의 노력은 무엇이 있었을까. 아니 맞지 않은 그들은 무슨 노력이라도 해서 피하기라도 한 것일까. 침을 피한 이가 합격이라 한다면 그에겐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내가 하는 행위가 저 위의 누군가가 하는 행위와 다를 바는 또 무엇이란 말일까. 합격한 너의 노력과 나의 노력이 무엇이 그리 차이가 난 걸까.
담배를 난간 밖으로 던졌다.
너를 갈망한다. 사막에 오아시스를 찾듯, 목마른 이들이 비 한 방울을 기다리 듯. 난 너를 갈망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끊임없는 갈증과 같았다. 절대 채워지지 않는, 아니 정확히는 채워질 수 없는 그런.
넌 나에게 다가올 리 없는 파랑새였기에, 나에게 희망이나 행복 따위는 다가올 리 없었다. 그건 마치 끊임없는 수렁으로 날 밀어 넣는 행위와 같았음에도, 난 끊임없이 그 나락으로 내 몸을 던져 넣었다. 그것은 일종의 내 마음에 대한 자살과 같았다. 스스로 내리는 마음의 사형선고라 할 수 있다. 널 가질 수 없음에 널 갈망하는 게 끊임없는 죽음의 고통과 같았다.
나의 갈망은 나 자신에게 독이었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감정의 갈증에 난 그 독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죽음으로 나락으로 감정이 죽어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때까지, 내가 갈증을 느낄 수 없도록. 참으로 멍청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절대 해결될 일이 없는 갈증임을 알면서도, 너를 갖기 전까진 없어지지 않을 갈망이며 갈증임을 알면서도.
난 절망과도 같은 갈증이 없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갈망을 들이켰다. 최대한 빨리 내가 죽어 스러질 수 있도록. 내가 갈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스러질 때뿐이란 걸 알기에.
여름밤, 달빛을 친구 삼아 혼잣말을 털어놓았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할 얘기들을.
난 어릴 적 많은 고민과 고통을 가진 아이였다. 그건 때로는 분노 발작처럼, 다른 이들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내 폭탄과도 같은 성질을 견뎌내어야만 했다는 것과 동일했다. 특히 그건 내 옆에 있는 가족들에게 더 심한 트라우마처럼 심어지기에 충분했다.
난 사회의 피해자이며 가해자였다. 학교에서 당한 모든 폭력은 고스란히 내면 깊숙한 곳에 상처를 만들었다. 절대 아물리 없는 흉터처럼, 곪고 곪아 썩어버리는 그런 흉터는 고름을 잔뜩 머금은 채 날 죽여가고 있었다. 웃기게도 이런 상처는 나를 가해하는 가해자들에게 화살이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있어서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허들과 같았다. 내가 아무리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고 그들에게 애원해도, 그들은 가차 없이 날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다. 마치 즐거운 유희처럼, 난 그들의 장난감과 같았다. 언제 어느 때고 부서져도 문제없는 싸구려 장난감. 그런 그들에게 난 반항할 수 없었다. 반항은 용기 있는 자의 행동이었으니까.
나는 모든 폭력의 분출구를 가족에게로 돌렸다. 그들에게는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난 그들에겐 피해자였으나, 가족에겐 가해자일 뿐이었다. 그들의 가혹성이 정도를 더해갈수록, 반대급부로 가족에게 가해지는 피해망상은 한없이 치솟았다. 그것은 내가 아직 이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지만, 가족에겐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계속되는 자살시도에 가족들은 지쳐갔다. 내 안에 깊이 가라앉은 해결되지 않는 분노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파괴했다. 고통의 나날이 지속되었다. 그들과 마주칠 일이 없게 된 뒤에도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날 옥죄었다. 정신병동에 갇히기를 반복해가는 와중에서야, 난 아주 간신히 내 분노를 돌릴 수 있었다. 그것은 가족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향하지 않는 아주 이상적인 형태로, 나에게 나타났다.
여름밤, 정신병동에서 퇴원한 오늘 밤, 달빛을 친구 삼아 혼잣말을 털어놓는다. 누군가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를.
"다 죽여버리고 싶다"
도심 속의 나는 홀로 있다. 회색빛의 거인들 틈에서 작은 나는 홀로 있다. 마치 나 혼자 동떨어진 존재인 것처럼 난 홀로 서 있다. 회색빛 거인들이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날 짓누를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 꺼멓게 당장이라도 비를 토해낼 것만 같은 구름도 언젠간 날 향해 빗줄기를 쏟아낼 것만 같다. 웅웅 거리며 귓가를 스치는 저 바람들도, 회색 거인들이 뿜어내는 입김처럼 날 저 멀리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난 홀로 있다, 이들 틈에서, 아무도 나의 위로가 되어주지 않는 이 군중 속에서.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나 홀로 외면을 느끼며 난 홀로 있다. 이 도심에선 아무도 내 곁에 서 있지 않는다. 아무도 날 위해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난, 홀로 서 있다.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쏟아지는 여름날이었다. 본래 그날그날의 날씨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 그날도 우산 없이 학교를 갔던 게 화근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었다.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은 우산을 들고 오실 수 없었음이 당연했고, 이미 십수 년 전의 이야기니 핸드폰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핸드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세상의 신이란 작자는 일이란 꼬일 수 있으면 더욱 꼬아버리곤 하는 괴팍한 심보를 가진 게 틀림없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뒤진 안주머니엔 분명 있어야 할 버스 승차권이 없었다. 이때의 나는 내성적이며 예민했으며 남들과 어울리기 상당히 힘들어하는 성격이었기에(사실은 이 성격은 십수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빗 속을 걸어가기로 했다.
집까지는 대략 중학생 아이의 걸음으로 30분, 참으로 미련하게도 난 그렇게 집으로 걸어갔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온 몸은 젖어들고, 하늘은 어둑어둑해졌다. 참으로 웃긴 건 그때의 그 상황이, 지금 이 시점에서도 그때 느낀 감정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빗방울이 물결을 그리는 웅덩이의 비릿한 물 냄새. 젖은 땅에서 흐릿하게 올라오는 흙냄새. 빗방울에 고개를 떨군 나뭇가지가 그리는 그림자. 구름에 가리어진 햇빛이 슬쩍슬쩍 얼굴을 내미는 그 순간. 이윽고 어둠이 내려온 그 상황에서 나 혼자 서 있는 그 길. 옆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만 시끄럽게 귀를 괴롭히는 그 순간. 어린 마음에 혼자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 서글픔이 아주 조금 눈물처럼 나오던 그 순간.
서글펐던 감정은 그때 단 한순간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서글픔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는 있다. 그래도 그때의 왠지 모를 서글펐던 감정은, 아마 사라지지 않고 마음 속 깊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에게 전할 얘기가 있어. 아,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좋은 소식일리 없잖아? 우리가 뭐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응, 그래. 나도 마음 같아선 네 목소리 따위 듣고 싶지 않아. 욕하지 마,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어? 도대체가 넌... 아니야. 응, 만나서 얘기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아니,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 거 같아. 야! 말 이쁘게 하라고, 너랑 말해야 하는 상황이 난 좋은 것 같아? 미친, 야! 너만 욕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다 만나면 또 때리겠다? 야, 그래. 그게 자랑이니? 네가 때렸던 게 자랑이냐고. 찾아오기만 해봐. 미친 새끼, 만날 장소나 정해. 아니, 낮에. 아니, 너 무서워서 어떻게 밤에 보겠어? 낮에 봐. 응, 그때 그 카페, 기억나? 어딘지? 미친, 헤어졌던 거기 말이야. 응. 그래. 욕하지 말랬지? 하~ 지친다. 야, 그냥 전화로 말할게. 야 나 임신했어. 그래, 니 새끼지 쓰레기 새끼야. 응, 지울 거야. 나도 니 새끼 키울 생각 없으니까. 응, 돈은 계좌로 보내. 오늘 중으로 보내, 아니면 회사고 어디고 찾아가서 미친짓 할 테니까. 그래, 당장 보내. 응, 그래.